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왜 하필 헌책방
스산한 계절의 끝자락은 입춘을 향해가건만, 나는 어둡고 좁은 방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안면에 얼음주머니를 비비고 있다. 춥다가 덥다가 미쳐버릴 것 같다. 이게 무슨 볼썽사나운 광경인가 싶겠지만, 지금 나는 대포주사의 부작용을 겪고 있다.
[대포주사 부작용으로는 폐경증상을 겪게 되는데. 발한, 불면, 피로감, 우울, 안면 홍조, 등이 있다.]
“무릎 통증은 없네.......더럽게 아픈데.”
인터넷으로 검색한 지식인 글을 보면서 연거푸 비탄을 토해내지만 알아주는 이 하나 없다. 강제로 생리를 중단하는 대포주사를 맞은 지 두 달 하고도 삼일 째, 한 달 동안은 그저 천국이었다. 생리 때마다 뼈가 으스러질 강도의 통증, 축축하고 꿉꿉한 아랫도리, 월경 없는 삶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자유롭고 쌈빡함 그 자체였다. 삼십 년 가까이 생리대와 진통제 값으로 얼마나 많은 비용을 퍼부었던가. 가계부를 정리하면서 절약된 생활비로 외식의 날을 만들어볼까? 궁리하던 게 딱 61일 전이다. 정확하게 두 번째 생리를 건너뛰고 폐경증상이 시작되었다. 숨이 턱 막히는 호흡곤란에 얼마나 당황을 했던지. 얼굴에 숯불을 끼얹는 것 같은 열감은 또 어떻고. 앉으나 서나 무릎통증. 지나가는 사람만 봐도 솟구치는 짜증과 분노. 가만히 책을 보다가도 엄습하는 두려움. 당장이라도 세상이 끝날 것만 같은 공포심. 방금 전 자지러지게 웃다가도 앞으로 어떻게 살지? 밑도 끝도 없이 찾아오는 침울함. 그냥 죽어버릴까? 끝을 상상하게 하는 북받치는 우울함.
아....... 내 나이 서른일곱, 누구는 내일 모레 애를 낳는다는데 나는 갱년기와 씨름을 하고 있다. 삼개월간 나의 자궁을 잠자는 뱃속의 공주님으로 만들어놓는 동안, 내 몸은 대포 주사의 부작용을 겪고 있다. 호르몬을 돌게 하려면 자순이가 힘이 들고. 자순이가 편하면 호르몬이 지랄을 한다. 어찌 되었든 나는 아픈 운명을 타고났나 보다. 이런 식에 자기 연민이 뇌 속에 살포시 발을 담그는 순간, 폭풍 같은 감정들이 한도 끝도 없이 쳐들어온다. 지금 막지 않으면 태어난 자체를 후회하며, 한강다리 난간을 붙들고 서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나 정말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이 아닌데.......’
두꺼운 솜이불을 목까지 덮고는 먼지 낀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는 모양이 구슬프게 처량 맞아 실소가 터져 나온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리에 꽃 달고 63빌딩에서 번지점프 할 것 같다. 그래도 호르몬 불균형과 응급실행 생리통 중에 고르라면 과감 없이 월경 없는 폐경상태의 삶을 선택하리. 다시 근거 없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재빨리 이불을 걷어차고 선풍기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때, 휴대폰에서 ‘띠링’ 하고 문자 음이 울렸다.
“아이씨, 미친년!”
입에서 자동으로 욕이 튀어나온다. 요즘 나는 대포주사 부작용으로 휘청 이고 있는 와중에, 문자 테러 까지 당하고 있다. 정말이지, 한강다리로 다이빙하고 싶은 심정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욕쟁이 할망구도 울고 갈 만큼 상스러운 그 여자의 문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문 사장 : 너 내 딸한테 뭐라 그랬어? 그리고 당장 가게 문 열어놔! 내가 두고 온 게 있어서 가져간다는데 왜 못 가져가게 해? 나를 아주 도둑년 이미지를 만드네?]
가슴이 네 갈래로 찢기는 듯 고통스럽다. 문자 한 줄, 한 줄이 독처럼 스며들어 심장을 파고든다. 동시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욕이 터져 나왔다.
“하! 이런 버러지 같은 년!”
이런 괴롭힘을 당하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약 세 달 전 일이었다. 딱 봐도 노련해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찾아와, 보증금 300에 월세 50만 원인 가게를 보증금 100만 원으로 낮춰 달라면서 시원하게 계약을 성사시켰다. 우리는 그 중년 여자를 ‘문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토스트 가게를 열거라는 문 사장은, 공사 기간 일주일도 월세에서 빼달라고 요구했다. 내 입장에서는 너무 손해 보는 계약이었고, 문 사장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기분이었지만, 대출 압박이 더 힘들어서 결국 그녀의 요구를 전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계약 일주일 뒤, 문 사장은 가게 안에 집기며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둘 들여놓기 시작하더니 매장 하나를 통째로 가릴 만큼 큼지막한 포장마차를 상가 앞에 갖다놓았다. 그런데 그렇게 다 준비해 놓고도, 한 달이 다 되도록 가게 문은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월세 날이 넘어가는데도 세가 들어오지 않아, 전화를 해봤더니, 돌아온 대답이.
“아가씨 내가 천안에 농장을 운영 중인데, 사업자를 두 개 낼 수 없어. 가게를 오픈하지 못해요. 사업자 빌려줄 사람을 좀 찾고 있어요.”
경순이는 찜찜하다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 사장님 뭔가 이상해. 큰 포장마차를 가게 앞에 가져다 놓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가게 사이즈에 맞게 가판대를 맞춰야지, 왜 포장마차로 막아 놓지? 그것 때문에 책방 간판까지 가리는 걸? 너무 문 사장한테 끌려 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뭔 헛소리야! 대학로에서 장사 베테랑이라는데! 넌 모르면 잠자코 있어!”
일주일 뒤, 문 사장은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사정이 생겨서 장사를 못 하게 됐어요.”
그리고는 가게 앞에 덩그러니 세워놓은 포장마차며, 가게 내부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폼 벽지까지, 그 모든 시설투자비를 다음 세입자에게 권리금으로 받겠다는 통보를 전했다.
“아가씨! 내가 알아서 다음 세입자 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 말에 나는 무력하고 힘없는 호구 중에 상 호구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럼 사장님 사정도 딱하니, 다음 세입자 구하는 동안엔 월세 반값만 받을게요.”
그리고 일주일 뒤.
“아가씨, 바빠서 그러는데, 벼룩신문에 세입자 구해줄래요? 사례비는 줄게요.”
다행히 몇 주 만에 다음 세입자가 나타났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문 사장에게 보증금 100만 원을 돌려주며 말했다.
“사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보증금은 통장으로 입금해 드렸습니다. 포장마차 값 200만 원은 다음 세입자가 사장님께 직접 드린 다네요.”
하지만 불행히도, 다음 날 새로 들어올 세입자는 계약 취소를 요청해왔다.
“가게는 마음에 드는데, 포장마차까지 떠안아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워요. 매장 앞에 딱 맞는 상판을 짜고 싶은데, 저 큰 포장마차를 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포장마차 값이 가게보다 더 비싸다니, 상가 주인이 아가씨라면서, 전 세입자가 주인 행세를 하는 꼴이라 기가 막힙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뇌를 감싸고 있던 투명한 막들이 하나씩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경순이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깨달음의 경종이 울렸다. 나는 단호하게 마음먹고, 문 사장에게 선언했다.
“포장마차 때문에 다른 세입자들이 들어오려 하지 않아요. 포장마차는 가져가세요.”
그러자 그녀는 안면을 싹 바꾸고는, 보증금 돌려받은 건 무효라며 협박성 문자를 쉴 새 없이 보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차분히 설명해도 돌아오는 건 오직 막무가내식 땡깡뿐이었다.
[보증금 돌려받으셨죠? 그럼 계약은 끝난 겁니다. 포장마차 가져가세요. 저것 때문에 가게도 안 나갑니다.]
[문 사장 : 절대 못 나가! 내 계약 기간 남았다고! 누가 맘대로 나가래? 너, 사기죄로 고발할 거야! 한번 두고 봐! 좋게 대해줬더니, 날 병신 좃밥으로 아네? 대신 계약해준다고 사기 친 것이 어따 대고 말장난이야? 그리고 포장마차 받는 조건으로 나간다고 했던 거고, 다음 세입자랑 계약파기면, 내가 보증금 받은 것도 파기야! 모든 게 원위치된 거고. 나는 다시 세입자가 된 거야!]
[제가 계약해준다고 한적 없습니다. 당신이 벼룩신문에 사람 구해달라고 했고, 지금 세입자분도 당신이 먼저 만나서 포장마차 받는 조건으로 먼저 계약했구요. 당신이 주인도 아니면서요.]
[문 사장 : 이것이? 너 유리한대로만 될 것 같냐? 중요한 핵심은 건너뛰고? 너 경계선지능이야? 일단 너 꼴리는데로 해봐라! 나야말로 법 위반한 적 없고 피해자이고 증거 다 있으니까, 포장마차 니가 갖다노랬지?]
[포장마차 갔다놓으란 적 없습니다. 나가실 때, 당연히 가져갈거라 생각해서 별말 안했을 뿐입니다. 계약서에 본인 시설물은 퇴거 시 가져간다. 쓰여 있습니다. 어쨌든 당신이 보증금을 받은 것으로 계약은 끝이 났으니, 당장 시설물 퇴거 해주십시오!]
[문 사장 : 당신당신 하지 말고! 너 내 포장마차 한번 건드려봐!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이를 보다 못한 경순이는 부동산 중개인 양 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문 사장에게 시설물에서 퇴거하지 않을 경우 민사 고발을 진행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현조야, 그 여자, 자기 이름으로 계약한 것도 아니고 딸 이름으로 계약했더라. 이건 명백한 사문서 위조야.”
경순이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간 쌓인 피로도와 공포로 경순이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이틀 뒤, 내용 증명을 받은 문 사장은 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협박 문자를 보냈다.
[문 사장 : 내용증명 잘 받았고, 오늘 변호사 상담 받았고. 너랑 통화내용 다 증거물이야. 내가 월세를 안냈어? 포장마차도 내가 강제로 놨어? 니가 괜찮다고 한 녹음 증거물이야. 고소? 한번 해봐! 한 몇 년은 걸릴걸? 내가 쉽게 물러날줄알아? 증거자료 다 모아서 녹취록까지 다 제출할거야. 내용증명 읽어보니 아주 소설을 써보냈네? 그리고 너 교회다닌다면서, 거짓말하고 사기를 치니? 포장마차 필요한 사람한테 팔려고 하는 게 왜 위법이야? 통화내역 들어보니 소름끼쳐, 착한 척 연기한 것. 아 참 가게 열쇠 문 앞에 걸어놔! 열쇠 원위치! 열쇠 문 앞에 걸어놓으라고 분명 고지함! 열쇠! 원위치!]
계속 울려대는 협박에 나는 질겁했었다. 휴대폰을 힘껏 내던지고는, 망망대해에 홀로 조난당한 선원처럼 허공을 향해 목 놓아 울부짖고 말았다.
“경순아아아~~~!”
그리고 경순이가 내용증명을 보낸 지 열흘 만에 문 사장 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50만 원의 위로금을 주는 대신 포장마차를 철거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합의를 했음에도 문 사장은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문자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교회 다니는 년이 사기를 쳤다는 둥, 한 적도 없는 말들을 마치 진실인 양 꾸며서 문자로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경순이 말로는, 그 여자 딸도 본인 엄마를 그냥 무시하라고 했단다. 그래서 차단하라고 조언했지만, 이상하게 차단하는 건, 자존심이 상해 이렇게 꼬박꼬박 문자를 확인하며 모든 내용을 스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로 나는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 여자가 포장마차로 가게 앞을 막아놓는 바람에 많은 세입자들을 놓쳤고, 위로금으로 50만 원을 뜯겼으며,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도 휴대폰 벨 소리만 울려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중요한 교훈은 하나 얻었다. 앞으로는 절대 세입자를 들이지 않을 것이다. 창고상가는 그냥 공실로 비워 둘 것이다. 어차피 사들인 헌책들이 늘어나서 책방에 다 진열하지 못하는 책들은 옥탑 방에 쌓아두고 있는 참이다. 돈에 쪼들리는 게 낫지 파렴치한 인긴 들에게 선의를 베풀어봤자, 인신공격에 문자테러만 당할 뿐이다. 어쨌든 문 사장 사건은 경순이의 도움으로 해결되었고. 다음은 나의 작은 헌책방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부모님의 만류에도 부득부득 고집을 부려 만든 나의 요새. 가끔 희귀한 절판 본을 종이 값만 받고 얻을 수 있는 보물섬. 엄마는 늘 말한다.
“헌책방으로 밥은 먹고 살겠니?”
“어찌 인간이 밥으로만 살리오.”
괴변 같은 진리를 떠들어대며 쥐도 새도 모르게 오픈한 헌책방의 첫 달 매상은 십만 원이었다. 천 원짜리 시집 다섯 권, 소설 몇 권, 공무원 서적 몇 권. 그나마도 베스트셀러 소설 두 묶음을 가져온 여대생에게 책값을 돌려주며 도로 사들였으니, 결국 마이너스 팔만 원 되시겠다. 이러니 내가 양파, 마늘을 하루 종일 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언젠가 난로 앞에서 고구마를 구워먹으면서 경순이가 물었다.
“왜 하필 헌책방이 하고 싶었어?”
책이 좋고 그나마 싫증 내지 않고 꾸준히 하던 것이 글 쓰는 거라, 들어간 문예창작과. 그러나 대학은 딱히 재밌지가 않았다. 비싼 등록금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인 것 같았다. 한학기도 채 못 마치고 자퇴를 했다.
사실 그건 핑계고, 날고뛰는 문학도들 사이에서 마치 유치원생이 된 것 같은 자괴감이 들어 중도 포기했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하여간, 대학을 중퇴한 나는 학습지 회사에서 2개월, 보험회사 4개월, 콜 센터에서 6개월, 통신사 안내데스크에서 1년. 화장품 클레임부서에서 2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부모님의 도움으로 사회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헌책방을 열게 된 것이다.
돌아보면 참, 숨 막히는 세상이었다. 특히 생리통 때문에 월례행사처럼 회사를 빠지는 직장인은 점점 무리로부터 도태되기 마련이었다. 아픈 것을 이해받는 건 딱 학생신분까지였다. 사회인은 아픈 것도 무능력이라 비판 받는다. 불성실한 인간으로 낙인찍힌다. 빠르고 정확한 세상은 건강한 신체를 자기 관리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반박할 여지가 없다. 나 같아도 한 달에 한 번씩 아프다고 골골대는 직원은 원치 않는다. 회사와 세상을 향해 서운한 마음이 든다거나 탓을 해본 적은 없다. 아프고 병든 내 자궁을 원망했을 뿐. 어떨 때는 부모님도 나의 월경통을 질려했는데, 회사는 더 했겠지.
그래서인지 나는 세상에서 똑바로 서 있기가 참 힘들었다. 한 달에 한 번일지라도, 그 폭풍을 견디고 나면 내 주변은 온통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생리통이라는 태풍이 휩쓸고 간 잔해 속에서 아무리 수습을 해보려 애를 써 봐도, 파도에 밀려오는 쓰레기는 끝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땡땡 거리에 있는 뿌리서점으로 몸을 숨겼다. 출입문부터 그득하게 쌓여있는 책들이 화분에 심겨있는 꽃들처럼 길을 내어주었다. 책 길을 지나 지하로 뻗어있는 계단을 내려가면 종이 냄새 섞인 시원한 공기가 나를 감쌌다.
- 그간 고생 많았어. 책 품에 안겨 편히 쉬렴.
수천 권의 헌책들이 토닥토닥 위로를 전하며 쪼그라든 가슴을 어루만져 줬다. 그렇게 원 없이 헌책에 파묻혀 꽁꽁 숨어 있다 보면, 어깨가 좀 펴지는 것 같았다.
- 또 여기 숨어 있어? 밥은 먹었어?
늘 나를 찾아낸 건 헌책방의 주인이었다.
- 왜 밥을 안 먹고 다녀? 자장면 시킬 건데 먹을 테야?
동경했다. 따스하고 아늑한 헌책방을, 그 안에 인자하고 여유 있는 뿌리서점 사장님을. 언젠가는 나도 헌책으로 꽃길을 만들어서 책 더미에 숨어있는 이에게 달콤한 커피를 건네줘야지. 밥 먹었냐고,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고 그런 예쁜 말도 건네줘야지.
- 녹차? 커피?
- 커피요.
특히나 사장님의 다방커피 맛은 예술이었다. 커피하나, 크림 하나, 설탕 둘. 레시피를 알아냈음에도 뿌리서점 사장님의 커피 맛을 흉내 낼 순 없었다. 여하튼, 헌옷을 건네며 굴욕을 안겨준 5학년 담임 탓에 레몬사탕조차 입에 대지 않았고, 동네 언니가 한 번 입고 물려준 옷도 헌거라며, 단호히 거절하며 살았다. 헌 것은 곁에 두는 것조차 싫었던 박현조 인생에, 오직 책만은 헐고 찢어져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일깨워준 뿌리서점은 내게 로망이 되었다. 그러니 손님 하나 없어도, 재정이 쪼들려도, 내가 헌책방을 놓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나의 헌책방만큼 이슈인 이경순에 대한 히스토리를 빼놓으면 섭섭하겠지? 그녀의 배는 제법 임신한테가 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임산부답지 않게 팔팔 날아다니는 그녀로 인해 이층 살림집은 늘 반짝반짝 윤이 나고, 책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이뿐 아니라, 아침잠이 많은 나를 대신해 가게 문을 열어주는 그녀는 시계보다 정확하게 일어나 오픈을 한다. 또한, 기가 막히게 책을 팔려는 사람을 찾아내 집까지 찾아가 귀한 전집이라던 지, 절판된 만화책이라던 지, 신작 소설과 한 장도 풀지 않은 문제집을 싼값에 사오는 경영능력까지 있었다. 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그녀가 책방을 봐주기 시작하면서 나의 고요한 보물섬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어머 언니! 좀 있다가 부동산으로 가려고 했는데! 오늘 밀면 만들 건데, 먹으러 올래?”
“밀면? 그걸 집에서 만들어? 너무 맛있겠다. 정육점 언니랑, 예영 엄마도 부를까?”
서부 이촌동 자영업자 동아리라도 만들 요량인지 이경순은 사장부터 아르바이트생까지 연령과 직책 성별 구분 없이 아울러 친목질이다. 그 꼴을 보고 기가 차서 허 여사에게 고하니, 허 여사 왈.
“파리만 날리는 가게보다는 사람 북적이는 것이 훨씬 낫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데, 엄마 팔은 얼마나 유연한지, 180도 밖으로 꺾어진다. 모두들 이경순을 친애한다. 경순의 흠을 잡는 나만 나쁜 년이 되어 버린다. 대표적으로 이경순에 대한 불만을 하나만 꼽으라면, 너무 나댄다. 정말 꼴을 봐 줄 수 가 없다. 나만의 도피성인 헌책방을 오염시키는 것도. 천애 고아 주제에 배는 불러가지고, 행복 바이러스를 뿜어대는 것도. 모든 것이 꼴배기가 싫다. 더군다나, 내가 싫어하는 확성기 삼총사와 이경순이 몰려다니면서, 꼴 보기가 더 싫어졌다.
“경순씨가 현조대신 책방 운영해봐! 망한 책방 살려봐!”
망할 여편내들, 허 여사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신경 거슬리게 하는 데는 뭐가 있다.
“어머! 현조야 너 진짜 시집 안가니?”
부동산 양 언니, 지도 시집 안 갔다. 내일 모레 오십이다.
“어머! 현조야! 책방 한다더니, 양파만 까고 앉았니?”
부업거리 던져주는 반찬가게 예영 엄마, 제 딸은 백수다.
“어머! 현조야! 혼자 살 거면, 살이라도 빼야지, 너 어째 살이 점점 오른다?”
정육점 윤기엄마, 지는 백 키로다.
정말이지 징글징글한 확성기 삼총사, 동네에서 일어나는 모든 말에 발을 만드는 소문의 통로들이다. 이제는 경순이까지 합세해서 사 총사가 되었다.
‘이경순 당장 내쫓아?’
고민하는데, 베개 밑에 박아 둔,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문 사장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저만치 내동댕이쳐진 휴대폰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뒤집어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휴대폰을 집어 들자, 액정화면 위로 이경순이 요란하게 반짝이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아! 왜! 깜짝 놀랬자나! 그 여잔 줄 알고!”
“현조 무슨 일 있어?”
“아 왜! 전화했냐고!”
“북엇국이랑 콩나물 밥 해놨는데, 먹었어?”
“입 맛 없어.”
“대포주사, 부작용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럴수록 밥 먹고 한강 걸으면서 햇볕 좀 쬐면 어떨까 싶은데.”
“귀찮아.”
“그러지마. 어머니 걱정하신다. 너 좀 챙겨달라고 신신당부 하셨어. 그리고 나 산부인과 4시까지 가니까. 3시에는 내려와야 해. 그리고 손님이 윤동주 시집을 찾는데, 여기 여러 권 있는데. 표지만 다르지 내용은 같은 거야?”
“당연한 걸 왜 물어?”
“나 무식한 거 알면서.”
수화기 너머 경순이가 멋쩍게 웃는다.
“밥 먹고 내려갈게. 우리 동주오빠가 얼마나 멋진 분인지 한수 가르쳐주마.”
“끼아아~~ 좋아!”
탄성을 지르며 좋아하는 경순이의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땡땡 거리 헌책방에서 숨어있을 때마다 나를 찾아낸 사장님처럼, 경순이가 나를 찾아낸 걸까? 그럼 나는 이젠 그만 숨고 나가야 하나? 왠지 더 이상 폭풍 가운데 혼자 있는 것만 같은 쓸쓸함 같은 건, 파도에 쓸려가 깊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떠밀려온 수많은 쓰레기들을 조용히 치워주는 누군가가 경순이 일 것만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왠지 귀찮으면서도 좋은 감정들이 어지러운 생각 속에 혼돈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싫지 않은 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몸을 막고 있는 두꺼운 겨울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시 한 구절 읊조린다.
“나의 봄도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흐르려나.”
*
경순이가 만들어 놓은 콩나물밥에 양념간장을 넣어 쓱쓱 비벼먹고는 일층으로 내려갔다. 어김없이 책방은 동네 아줌마들의 장터다. 무표정하게 들어가, 책방 앞이 지저분하다며 투덜거렸다.
“경순 씨! 창고상가도 공실이겠다. 장사 해봐! 자기 샌드위치 먹고는 다른데서 못 먹겠어. 밀 면도 예술이고. 경순 씨는 못하는 게 뭐야?”
이촌동 확성기 2짱, 정육점 사장이 호들갑을 떤다. 속으로 일 잘하는 이경순은 윤동주 시인도 모르는 천하의 무식쟁이라오! 소리를 쳤다.
“얘 현조야! 또 이상한 세입자 들이면, 고생한다! 그냥, 경순씨 줘!”
확성기 3짱, 부동산 양 언니가 내 옆으로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나는 경순이 쪽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저런, 깜찍한 것 같으니라고. 눈치를 살피며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양 언니가 내게 한 말을 분명 들었을 텐데. 설마, 내 가게가 탐났던 거니? 데스크 안에서 능청을 부리는 경순이를 아니꼽게 쏘아보며 물었다.
“야! 이경순 장사 하고 싶어?”
“정말? 나 진짜 잘해볼게, 현조야!”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덥석 무는 이경순이다. 저것 보게? 예의상 거절이라는 걸 한번은 해야 하는데. 양심은 어디 밥 말아 드셨나? 뭔가 당한 느낌이다. 가게를 공실로 만드는 한이 있어도 이경순에게 넘기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는 오랜 철학이 있는데, 지인과는 일적으로 엮이지 말자는 것이다. 친구는 사적으로만 대해야지, 공과 사가 섞여 버리면 곤란한 일이 생겨버림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현조야, 창고자리가 열 평정도 되나?”
확성기 1짱, 예영 엄마가 주걱턱에 손가락을 괴고 탐정처럼 묻는다. 대답도 않고 마뜩찮게 서 있는데, 동네 아줌씨들은 아랑곳없이 경순이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려 작당모의를 시작한다.
“경순 씨, 뭐가 제일 자신 있어?”
“경순 씨, 밀면 진짜 맛있더라.”
“경순 씨, 초기 자본이 없으면, 재료값이 많이 들지 않는 장사를 해야 해.”
“경순 씨, 정육점이랑, 반찬가게, 부동산은 안 되는 거 알지?”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른다. 떠돌이 임산부와 뚱땡이 정육점과 수다쟁이 반찬가게, 자아도취 부동산이 한데 어울러 떠드는 꼴이라니. 큰일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이러다간 정말 끝장이다. 내 옆에서 장사하는 이경순이 그냥 눌러 앉는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악! 그건 아니올시다! 나는 그저 무지한 이경순에게 동주 오라버니, 시 한편 멋들어지게 읊어 주려 했는데, 감히 나의 헌책방을 능멸하고, 이용하고, 오염시키다니. 호르몬 불균형 때문인지 짜증은 더 솟구친다. 미쳐버릴 것만 같다. 이럴 땐 나비호흡법! 나비, 나비야, 어서 오련! 눈을 감고 천천히 손을 올렸다 내리며, 박자에 맞춰 호흡을 고른다.
“현조 뭐하니?”
“허 여사 딸은 가만 보면 특이하다니까?”
“가만 봐야 특이해? 그냥 봐도 특이하지?”
확성기 삼총사가 줄줄이 소시지 같은 수다로 공격하지만,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숫자를 세아 리면서 심호흡을 했다. 경순이는 백치를 가장한 전략가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 레몬 사탕으로 날 유혹한 것부터 25년 만에 나타나 공감해 주는 척 나를 꼬여서 우리 집에 기생한 것까지, 보통 아닌 년이 분명하다. 이걸 어쩌지? 세상에 믿을 년이 없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내 잘못이 크다.
사실 몇 주 전부터 경순이는 아침마다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맛있기는 더럽게 맛있다. 이경순은 내 찬사에 힘입어, 기어이 동네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다녔다. 마치 ‘샌드위치 팔면 어떨 것 같아요?’라고 물어보듯 말이다. 차라리 솔직하게 창고상가를 자신이 해보겠다고 말했다면, 이렇게 기분 나쁘진 않았을 건데. 이런 방식은 엉큼한 이경순의 속내가 훤히 보일뿐이다. 몇 주 전으로 기억을 더듬어보자. 그날도 경순이는 샌드위치와 크림수프를 보온병에 담아 가게로 내려왔었다. 나는 좋다고 샌드위치를 입에 처넣으면서 연거푸 엄지 척을 날렸고. 그런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이경순이 넌지시 물었지.
“현조, 양파랑 마늘 까는 거 힘들지 않아?”
나는 너무 힘들다고 한껏 엄살을 부렸고. 경순이는 옆 칸 상가가 빨리 나가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문 사장을 내보내면 진짜 괜찮은 세입자가 들어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월 50만원은 너무 싸니까. 조금 더 올려 받으라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야심 찬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때부터 이경순은 계획을 했던 거다. 문 사장을 내쫓고 지가 들어오기로. 또 한 가지! 저것이 책방을 봐주기 시작하면서, 원래 손님에게만 주던 믹스커피를 지나가는 사람마다 권하는 바람에, 책방은 마치 예전에 그녀가 일하던 싸구려 다방처럼 변해버렸다. 한 달에 서른 개 들이 믹스커피 한 상자가 이 주도 안 되어 동이 난다. 혹시 책방을 망하게 해서, 몽땅 자신이 차지하려는 속셈인걸까? 순댓국집에서 어린 날의 추억으로 내 방어벽을 무너뜨린 이경순, 이젠 나의 성을 장악하려 한다. 길고양이 같은 것 집에 들여 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를 끌어올렸다. 나비 호흡법은 길을 잘 못 들어 망상의 세계로 날 인도했고, 분노의 마을에 들어서려 할 때 경순이가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현조야?”
이글거리는 눈을 번쩍 떴고, 눈을 떴을 때 책방 안에는 경순이와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번부터 동네 언니들이 장사하면 참 잘할 것 같다는 거야. 왠지 할머니 닮아서, 장사하면 잘할 것 같기도 하거든. 알지? 우리 할머니 용문시장에서 늘 생선 일등으로 팔고 집에 들어갔던 거.”
그건 네 할머니 생선 바구니가 작았던 건 아닐까? 속으로 돌아가신 불쌍한 할머니에게까지 빈정을 날린다.
“언제까지 빌붙는 것도 미안하고, 뭐라도 보태주고 싶어. 대출이자 때문에 힘들어하잖아. 헌책방에서 그걸 다 메우기에는 아무리 계산을 해도, 무리가 있더라고.”
“네가 창고 상가에서 장사를 하면, 뭐가 달라져?”
“자신 있어. 정말이야. 현조야”
“보증금 낼 돈은 있어? 나 월세 선금 받는데?”
“그럼, 보증금 대신에 월세 200만원 줄게. 어때?”
나는 어이가 털리다 못해 기가 막히고 코까지 막힌 채로 경순이를 돌아보았다. 쟤는 어릴 때도 산수를 못하더니, 크고 나서도 셈 하나 제대로 못하는구나 싶어, 그저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야 이경순, 장사를 아예 모르는구나? 재료값에 인건비는 계산했어?”
“그건 걱정 마. 현조가 마늘 양파 까는 거 안쓰러웠는데, 책방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줄게. 나만 믿어.”
너를 믿어? 지나가는 개를 믿지. 저러다 얼마나 큰 뒤통수를 후려치려고?
“현조야, 내일부터 준비하려고. 공사도 좀 해야 하고.”
“돈은 있고? 나 공사비 못 준다.”
"아기 낳으면 쓰려고 모아 둔 돈 있어.”
모아 둔 돈이 있었어? 참내, 노숙자 코스프레하면서 생활비 한 푼 안 내놓더니. 모아 둔 돈이 있었어? 정말 이경순 저거 여시능구렁이었잖아?
“현조야! 우리 파이팅 하자! 돈 걱정 안하게 해줄게”
파이팅은 얼어 죽을. 월세 밀리기나 해봐. 당장 내쫓을 거니까.
*
이주 뒤, 이경순은 밀면 가게를 오픈했다. 출산하면 쓸 돈을 전부 투자해서, 제면기를 들였다고 한다. 일자형 테이블과 의자 냉장고와 주방용품은 중고 상에서 싸게 들였다고 한다. 밀면 가게는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처음엔 다른 가게가 순간이동이라도 한 줄 알았다.
“카페 같은걸 해야 책방이랑 어울리는데.”
칭찬 대신 이런 말로, 경순이 기를 죽이자,
“얘 헌책방이지, 무슨 책방이니? 현조 헌책방보다는 경순이네 밀면 가게가 훨씬 낫다. 동네가 다 훤해졌어.”
얄밉게 받아치는 부동산 양 언니를 흘겨보았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더 늘었다고, 쏘아붙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들어오세요, 따뜻한 밀면 한 그릇씩 말아 드릴게요.”
“우리가 첫 손님이야?”
경순이는 줄곧 밀 면은 부산에 토속음식이고, 밀면 집에서 애 아빠를 만났으며, 진짜 사랑했던 사람이 밀 면을 좋아해서 밀면 집에 취업을 했다는 자신의 역사를 끝없이 떠들어가며, 종종 집에서 밀 면을 만들어줬다. 날이 추우면 매콤한 다대기를 얹은 온면으로, 갱년기 증상으로 선풍기 앞에 죽치고 있으면, 밤새 우린 양지육수를 살짝 얼려 시원한 밀 면을 말아 주었다. 노란색 면발은 쫄면처럼 생겼는데 질기지 않고 부드럽게 쫄깃했다. 그런 면발에 담백하고 구수한 육수의 조합은 가히 예술이었다. 밀 면을 먹는 순간만은 경순에게 호의를 넘어 애교를 부렸더랬지, 그게 함정이고 미끼인줄도 모르고, 으이구, 등신 같은 박현조!
“밀 면은 냉이지! 나는 차가운 밀 면으로!”
“어머! 육수냄새가 구수한 것이, 기똥차겠어.”
“사장님네 양지가 좋아서요.”
여우같은 이경순 아부에, 정육점 사장이 신이 나서 엉덩이를 흔든다. 가게 무너지겠다.
“이사장 나만 믿어, 단골 팍팍 보내줄게.”
개업식 오는 거면 화분이나 하나씩 사 올 것이지. 확성기 삼총사 음료수 한 병을 안 들고 왔다.
“나는 안 먹어! 아침부터 밀가루 별루야.”
올라오는 군침을 삼키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책방으로 건너갔다. 문을 열려는데, 지들끼리 수군대는 소리가 여까지 들린다.
“아침 댓바람부터 식빵 한 봉지 다 먹으면서”
“쟤는 참 철이 안 들어.”
“지가 경순씨 덕을 얼마나 보는지 모르나봐?”
대충 그런 험담이다.
“동부도 아닌 서부 이촌동 구석에서 웬 밀 면이람, 월세나 내겠어?”
나도 들리도록, 화답했다. 허 여사처럼 혀를 끌끌 차며 모진 말을 던진 지 불과 네 시간 만에 일이 벌어졌다. 도대체 어디서 몰려왔는지, 책방 앞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깜빡 졸다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놀라 창밖을 내다보니, 줄지어 선 행렬은 다름 아닌 밀면 가게를 향해 있었다.
다음날, 또 다음날, 또 그다음 날도 경순이네 밀면 집은 줄지은 손님들이 연이어 계속되었다. 앉을 자리가 모자라서 포장해 가는 사람들도 있고, 책방 앞에 있는 공원으로 들고 가서 나무벤치에 앉아 먹는 직장인들도 더러 있었다. 성당 앞 육교를 중심으로 좌측 전자상가 네거리와 우측 땡땡 거리와 육교 넘어 동부 이촌동까지, 경순이네 밀면 가게에 대한 소문이 급물살을 탔다. 서부 이촌동에서 용산 역으로 빠지는 길목에 오피스텔과 빌딩이 밀집되어 있는데. 그곳에 사무실이 그렇게 많이 있는 줄 몰랐다.
전자상가 쪽 직원들과, 용산 역 부근에 있는 대기업 사원들까지 찾아왔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왔을까? 소문에 발이 달렸다는 말이 맞는가보다.
며칠 뒤, 장사로 돈을 좀 모은 경순이는 [헌책방 옆, 밀면 가게] 라는 간판까지 달았다. 미술관 옆, 동물원도 아니고, 심은하 언니가 나온 영화 제목과 나의 헌책방을 팔아 자신의 가게 간판에 이용하다니.... 여하튼 이경순의 밀면 가게는 대성공이었다. 그에 비해 현조의 작은 책방은 여전히 한산하다. 아니 더 한산해진 것 같다. 밀면 가게 바로 옆이 책방인데, 줄서서 휴대폰만 보지 말고, 책 좀 보러 오지. 양식을 배에만 채우지 말고, 마음에도 채우란 말이다! 인간들아!
한 달 뒤, 경순이는 첫 달에 못 낸 월세 포함 500만 원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 돈으로 나는 몇 달 밀린 대출이자를 한 번에 갚았다. 이런 상황들이 마냥 좋기도, 마냥 싫기도 하다. 아직도 내 안에 인격 둘이 경순이를 받들어 모셔라! 경순이를 내쫓아라! 싸움을 한다. 지금도 이경순은 배부른 몸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나는 한각져서 좀이 쑤신다. 헌책방 앞에 줄을 서서 책을 사가는 손님들을 상상해본다. 흐음....... 별로 달갑지 않다. 너무 바쁜 건 나의 라이프스타일과 맞지 않는다. 어쩌면 먹이를 물어오는 아비 새와 집을 지키는 어미 새 중에 어미 새가 더 좋은 포지션일수 있다. 그럼 아비 새 자리는 경순에게 맡기고, 선선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삶이라는 생각이 들려던 참에, 또다시 얼굴에 숯불을 끼얹는 열감이 올라온다.
“우 씨! 이놈의 호르몬 부작용!”
대포주사를 맞으면 갱년기가 오고, 맞지 않으면 자궁이 괴물처럼 변해 온몸을 괴롭히니, 이것도 저것도 괴로울 뿐이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경순이네 식당을 쳐다보는데, 미묘하게 비참한 기분이 드는 건 뭐 때문일까? 그때, 확성기 삼총사가 뒤에 인간 몇 명 달고서 책방 앞을 지나간다.
“서울에 제대로 하는 밀면 집 있어? 줄서도 못 먹는다니까? 사장이 부산 출신이잖아, 유명한 밀면 집에서 주방장으로 있던 사람이야!”
저렇게 거짓말로 사람 끌어주고, 밀면 공짜로 먹는 염치불구 삼총사 같으니라구! 속으로 흉을 보는데, 부동산 양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우 쟤는 누굴 닮아서 저래 매정해? 친구가 고생을 하는데, 앉아서 불구경이야? 계집애 모질어!”
이젠 대놓고 험담이다. 하! 참내! 기가 막히는구만! 지들이 공짜로 먹은 밀 면을 가닥으로 세우면 지구 반 바퀴는 돌고, 책방에서 공짜로 먹은 커피 컵을 한 줄로 세우면 미국까지 가겠다!
“어이~ 아줌마들 그냥 지나들 가쇼~”
주먹 한방 날리고 책방에 문을 쾅 닫았다. 짤~랑, 종소리만 텅 빈 책방 안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