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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주양 Oct 11. 2024

8. 너의 이름은 이경순(II)

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8     


구의역 7번 출구로 나가는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춘 채로 떨떠름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하게 나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신을 이경순이라고 밝히는 행색이 초라한 임산부가 나의 첫 동무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겨운 학교생활을 잠시 동안이나마 행복하게 해 줬고. 남은 1년 반을 전보다 더 외롭게 만들었던 친구. 경순이는 열두 살 그때처럼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조 맞는 거지?"     


사뿐사뿐 계단을 오르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녀. 아랫배를 양손으로 감싸며 해맑게 웃는 경순이를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코앞까지 다가와 손부터 덥석 잡더니 마구 흔들기 시작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너풀거리면서도,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너 하나도 안 변했어. 인상 쓸 때 미간에 호랑이 주름 생기는 것도. 입술 앙 다물 때 깜찍 보조개 생기는 것도. 어릴 때랑 다 똑같어. 잘 지냈어? 부모님은 잘 계시고?"     


경순이는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바로 앞에 붙어 있는 그녀가 불편해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억지로 잡혔던 손도 풀어냈다. 경순이는 아주 잠깐 주저하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머금고 멀어진 거리만큼 다가서며 말했다.     


"나는 많이 변했지?"     


그러더니 낡은 천가방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거의 삼십 년 만에 만난 최초의 친구가 노숙자가 되었나? 낡은 가방에 들어갈 기세인 경순이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행색이 평범하지는 않다. 그냥 도망쳐버릴까? 잠시 고민했으나 생각처럼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자 봐! 나 경순이 맞지?"     


그녀는 가방 속에서 지퍼가 떨어진 감색 지갑을 꺼내 펼쳤다. 열두 살의 경순이와 내가 운동회날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지갑 한 면에 꽂혀있었다.     


"너는 분명히 현조가 맞아."     


경순이는 진지한 얼굴로 단언하듯 말했다.     


"나 이경순! 모르겠어?"     


그래 내 앞에 있는 네가 경순인 건 알겠어. 5학년 내내 너의 행방을 찾아 용산 바닥을 돌아다녔고. 6학년까지도 몹시 그리워했고. 커서도 가끔 꿈속에 출연하는 너였기에. 통통한 볼살은 사라지고 움푹 페인 눈두덩이와 모래알처럼 꺼끌 하게 나이가 들었어도 어떻게 내가 너를 모르겠니...


"현조야..."     


그렇지만 지금은 이경순이라는 어릴 때 친구를 가끔 꿈에서 보는 걸로도 충분하거든. 유년시절의 아련한 기억으로 박제되어 있는 것으로 만족하거든. 가끔 생각은 났지만, 보고 싶거나 안부를 주고받고 싶지는 않았어. 지나간 추억에게 내 시간을 할애하기에는 너무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야. 솔직히 이것저것 다 떠나서 여전히 가난한 너를 피하고만 싶어... 나는 하고픈 말들을 머릿속으로 끄적이며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다.     


"현조야 편지 못써서 미안해. 갑작스레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먼 친척이 나를 섬에 팔아버렸어. 소지품은 다 빼앗겼어. 할머니 지갑이랑 너랑 운동회 때 찍은 사진만 겨우 숨겼어. 네가 적어준 주소와 전화번호를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질 않았어. 사실 알았어도 만나지는 못했겠지만.. 육지로 가는 배가 한주에 한 대 들어올까 말까 한 섬이었어. 작부 집에서 열다섯 살까지 허드렛일 돕다가, 아줌마가 이젠 다 컸으니 화장하고 한복 입고서 손님 받으라 해서 도망쳤어. 원래 도망치기 힘든 섬이거든?"     


경순이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 자신의 과거를 불편한 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았다. 심각한 내용처럼 들리는데 마트에서 산 물건이 불량품이어서 기분이 좀 상했다는 투로 아주 가볍게 했다. 여전히 머리는 떡이 져있고. 시큼털털한 악취가 은은하게 풍겨서 저절로 구겨지는 인상을 애써 펴내느라 혼이 났다. 이따금 까르르 웃으며 손으로 입을 막을 때마다 손톱의 까만 떼가 거슬려 딴청을 부렸다.

     

"임신했어?"     


나의 첫마디였다. 다소 차갑고 딱딱한 질문에 당황한 경순이는 송아지 같은 눈을 껌뻑이며 까맣고 큰 눈동자를 정신없이 굴렸다. 이내 망설이는 몸짓을 하더니, 발끝을 바닥에 톡톡 치면서 살짝 어깨를 흔들며 답했다.     


"응 초기야.."     


경순이의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순이의 배를 응시했다.     


"너는 임신한 거 아니지?"     


경순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자리 비켜달라고 해서, 사실은 네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어."     


경순이는 내 눈치를 살피며 변명하듯 말했다. 나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올렸다 내리면서 반쯤 몸을 돌렸다.


"그래.. 그럼 나는 집에 가봐야 해서."     


아주 담백한 작별을 고하고는 야멸차게 등을 돌렸다. 그때 경순이가 다급한 음성으로 나를 불러 세웠다.     


"현조야, 잠시만 같이 있자. 평생을 널 그리워했어. 밤마다 기도했어. 죽기 전에 꼭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를 외면하지 않으면 굉장히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정강이까지 내려온 얇은 원피스 밑으로 드러난 앙상하게 마른 다리가 동정심을 자극했다. 하아.. 이 한숨은 경순이 앞에서 대놓고 쉬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백번은 넘게 탄식하듯 숨을 뱉었던 것 같다.     


"밥 먹었니.."     


나는 계단을 오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제야 초조하게 뒤를 따르던 경순이가 환하게 웃었다. 물어보나 마나 며칠은 굶고 다닌 꼬락서니다. 섬에서 도망친 후로 계속 떠돌아다니는 건가? 하아.. 배꼽 밑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솟구쳐 나왔지만, 애써 누르며 상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역사에서 빠져나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순댓국집으로 고민도 없이 들어갔다.     


"순댓국 먹을 줄 알지?"     


경순이는 메뉴판에 눈을 고정한 채로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밥만 사 먹이고 돈 몇 푼 쥐어주고 바로 바이바이 해야지!'


한적한 식당 한 구석 자리로 걸어가면서 속엣말을 했다. 순댓국 두 그릇을 주문하고 물 컵을 가져온 사이에, 경순이는 항아리에 든 깍두기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었다. 벌건 국물이 옷에 뚝뚝 떨어지는데도 상관없이 사람 손만 한, 무김치 하나를 뚝딱한 경순이는 건네는 물을 숨도 쉬지 않고 들이켰다.     


"신랑을 한강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식탁에 빈 컵을 내려놓는 경순이가 헤벌쭉 웃었다. 앞니에 박혀있는 굵은 고춧가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손에 쥔 물 컵을 가슴 쪽으로 바짝 당겨 경순이로부터 되도록이면 멀찌감치 떨어졌다.     


"뚝섬에서 만나기로 한 거야? 그러려면 지하철 다시 타야 할 건데."     


내 물음에 경순이는 굵은 상커플이 사라질 만큼 크게 눈을 떴다. 마치 뚝섬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설마 하며, 미심쩍은 표정으로 넌지시 물었다.     


"한강이 한 군데가 아닌데. 어느 동네에서 보기로 한 거야?"


"한강이 그냥 한강이 아닌 거야? 신랑이 한강에서 보자고 했는데.."


"뭐?"     


등짝에 소름이 돋아 흘러내릴 만큼 믿기지도 예상치도 않는 대답이었다.     


"너 어디서 오는 길이야?"


"그냥 여기저기.. 섬에서 나오고는 충주에 있었고. 그다음에는 대구. 다음에는 부산. 남편은 속초에서 만났어. 첫눈에 반했다고나 할까? 내가 횟집에서 일했거든. 장사 끝날 때까지 그이가 기다리고 있던 거야. 그날로 뭐.. 사랑에 빠진 거지.. 그 열매가 바로 우리 아기야."     


경순은 물어보지도 않은 말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볼록한 배를 어루만졌다. 무언가 더 주절주절 늘어놓으려다가 순댓국이 나오자 뚝배기에 코를 박고 흡입하기 시작했다. 며칠을 굶은 거냐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길고 장황할 듯하여 간뒀다.


"현조야 나 이름 바꿨어! 이경순 아니고, 이은조야."


"개명했어?"     


뜨거운 수저를 입에 넣으며 잔뜩 얼굴을 찡그린 경순이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심은하 언니의 은! 문현조의 조! 그래서 은조! 내가 좋아하는 여자 둘!"     


심은하... 은하 언니가 아름답고도 무섭게 나왔던 추억의 드라마, 납량특집 드라마 M. 마지막 은하언니가 죽을 때는 정말 경순이와 얼싸안고 통곡을 했었지.. 경순이와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손을 맞잡고 보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웃음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경순이는 달고나를 만들어먹다가 국자를 다 태워먹었던 일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비장의 무기! 수학문제 못 푼다고 나를 때리고 옷을 벗긴 서맹기를 혼내준답시고, 서맹기 차 옆에 오줌을 눈 경순이의 복수혈전. 어린 시절 시시콜콜한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경순이가 입을 벌릴 때마다 나의 두텁고 견고한 성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현조 아직도 반숙계란 올려진 흰밥에 청국장 비벼 먹는 거 좋아해?"


"응!"     


"계란 입힌 분홍소시지도?'


"없어 못 먹지!"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경순에 마수에 서서히 걸려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경순이의 전략이 아니었다 싶다. 나는 연달아 경순이가 날리는 추억공격으로 가랑비 옷깃 젖는 촉촉이 스며들었다. 그간 나를 괴롭힌 자궁과 생리통. 수술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이 쌀 한 톨만큼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현조 어디 아파?"     


어디 아파? 아파? 그 한마디에 내 방어벽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경순이가 TMI(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정보{too much information})라며 속으로 비웃은 게 오 분 전이었는데, 나는 경순이보다 더 길게. 아주 많이. 나의 슬픔과 그간에 고통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경순이는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내 말이.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경청하며 잠자코 있었다. 나의 고백에 방해가 될까 싶어 숨마저 아주 고요하게 내쉬면서 말이다. 나의 첫 친구 경순이는 여전히 착하고 순했다.     


나는 그런 경순이를 도저히 길바닥에 버려둘 수 없었다. 어른에 차가운 심장과 사무적인 말투를 아무리 흉내 내봐도. 나는 여전히 길을 잃고 우는 일곱 살이고. 단짝이 필요한 외로운 열두 살이었다. 병든 자궁을 아무렇지 않게 떼어버리는 것도. 추운 거리를 얇은 헌 옷으로 떠도는 경순이를 외면하는 것도. 나에게는 너무 어렵고 슬프고 사무치게 아픈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지친 자궁에게 생리를 멈추어 잠시 휴식을 주었고. 천애 고아에 어쩌면 사기꾼일지도 모르는 신랑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경순이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럼 정체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을 집에 데려왔다고? 노숙자에다가 미혼모가 될지도 모르고! 신랑이라는 사람도 신랑이 아닌 거잖아? 하룻밤 불장난으로 아이가 생긴 거고! 친부 되는 사람이랑 연락도 안 되는 거고!"


서현이 뜨악하며 손에 든 마늘을 플라스틱 대야에 집어던졌다.    


"사진 보면 경순이가 맞으니까.. 그리고 볼수록 어릴 때 얼굴이 나오더라고."     


새파랗게 질린 서현이 머리가 아픈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에휴 모르겠다! 나는 이만 가련다!"     


서현은 마늘향이 벤 손가락 끝을 코에 대며 킁킁거리더니, 빈손을 탁탁 털고 일어났다. 잠시 창밖을 응시하더니 입술을 한쪽 끝으로 올리다가 몸을 돌렸다. 잠시 후, 건어물저장고로 쓰던 창고에서 주홍색 불빛이 흘러나왔고. 서현이 옷을 입는 듯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조야! 창고에 향초 피워놨으니까. 한 시간 있다가 꺼! 아직 마른 생선냄새가 배어있네."     


"거의 삼십 년 가까이 황태에 통북어에 미역 다시마 또 뭐냐 말린 가자미에 오징어에, 건어물 방이었는데. 하루아침에 그 냄새가 빠지겠어?"     


"그러니까. 하루에 한 시간씩은 향초 좀 켜두라고!"     


"옙썰! 감사합니다! 언니! 소인이 남자복은 없어도 부모복 친구복은 있습니다!"     


"확실해?"     


서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늘게 만든 눈으로 까칠하게 물었다.     


"네! 확실합니다!"     


베이지색 케시미아 코트 허리춤에 달린 끈을 동여매는 서현을 향해 경례를 날리자, 허리를 뒤로 재끼며 까르르 웃던 서현이 "못 말려! 문현조.."     중얼중얼 출입문으로 느린 걸음을 옮겼다. 성당 앞에 차를 세워둔 서현을 배웅하고 돌아온 나는 반지르르 윤이 나는 깐 마늘과 양파를 소쿠리에 옮겨 담았다. 손가락 마디마디 쑤시고 욱신거렸다. 열어놓은 현관문 사이로 들어온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부르르 몸을 떨었고 급격히 체온은 떨어져서 콧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직 마늘 반접과 양파 한 망이 남았다. 큰일이다. 이럴 때 구조대원처럼 등장하는 이경순. 지금쯤 나타나야 하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데스크 위에 자명종시계를 확인했다.     


"현조야! 밥 먹고 와!"     


반가운 음성에 앉은뱅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 위에다 손을 얹고는, 등을 뒤로 재끼면서 으윽 앓는 소리를 내었다.     


"마무리는 내가 할게!"


"엄청 많이 남았는데?"


"밖에 있는 거랑, 이게 다 아니야?"


"엄청 많잖아! 지금 이거에 반하는데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렸어!"


"어제 두 시간 만에 양파 두 망! 마늘 두 접! 누가 했다?"


"이경순 네가 했다!"


"이은조라니까?"     


정색을 하며 내가 앉았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는 경순이가 언성을 높였다.   

  

"경순이나, 은조나,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     


내 말에 경순이는 도톰한 입술을 대빨 내밀면서 오른손에 과도 칼을 잡고 순식간에 양파에 껍질을 벗겨내는 동시에 마늘 밑동을 따서 아이스크림 봉투 벗기든 손쉽게 흠집 하나 없이 완성품을 만들었다. 나는 그 옆에서 탄성을 내지르고 서 있었다.      


"빨리 올라가서 밥 먹고 쉬어! 신김치에 참치랑 스팸 넣고 김치찌개 끓여놨어. 약불에 해놨으니까. 라면사리만 넣어서 3분 끓으면 먹어."


"또 계란프라이 얹은 고봉밥 퍼놨어?"     


경순이는 해사하게 웃으며 코를 찡긋거렸다. 얼마 전 한강멘션 아래 있는 식당이 폐업을 하면서 문 앞에 내놓은 그릇을 주워온 경순. 특히 뚜껑에 꽃무늬가 새겨진 스테인리스 밥공기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한다. 굳이 미리 밥을 퍼서 계란프라이를 얹어 뚜껑을 닫아놓는다. 공기에 꽉 찬 뜨거운 압력 때문에 뚜껑이 열리지 않아 밥상 앞에서 씨름을 하는 나를 보며 깔깔거린다. 내가 짜증을 부리며 끙끙거리면, 더 크게 웃는다.     


"아니 밥통에서 알아서 퍼먹는다니까?"


"밥은 반드시 누군가 퍼줘야 하는 거야!"     


경순이는 이상한 철학을 고집한다. 어릴 때 남의 집 살이를 할 때도 밥상 다 차려놓고 주인아줌마 밥까지 다 퍼놓고는 자기 밥을 퍼달라고 생떼를 부려서 주걱으로 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내일이 되면 다시 밥을 퍼 달랐단다.  


"왜 나한테는 밥 퍼달라고 안 해?"


"너랑 우리 할머니는 예외야!"


"아무리 봐도 이상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순이를 응시했다.     


"빨리 올라가서 밥 먹으라니까? 찌게 다 졸아들겠어!"


"밥만 먹고 내려올게!"


"그냥 티브이 보고 누워있으셩! 내가 문 닫고 올라갈 테니까!"


"고맙다! 이경순!"


"고맙기는 밥값은 해야지! 너 아니었으면 계속 한강다리 밑에서 노숙했을걸.. 내가 고맙지!"


"그 애아빠 되는 사람은 만날 방법 없어?"


"뭐 우리는 운명이니까, 처음 만난 것처럼 또 우연히 만나게 되겠지?"


"정말 넌 어릴 때부터 심각하게 긍정적이야! 고쳐!"     


나는 창고에 켜진 향초에 불을 끄면서 솜잠바를 품에 안고 경순이를 향해 핀잔을 날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듯 한 눈으로 순식간에 그물망에 든 양파를 반이나 해치운 경순이는 유리병에 반사된 햇살처럼 반짝거리며 웃었다. 모진 삶을 버텨낸 경순이는 한 점의 어둠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짠한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쓸데없이 밝고 넘치게 일을 잘하고. 온몸에 노동이 배어있는.. 자꾸만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녀와의 이상한 동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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