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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주양 Oct 09. 2024

7. 너의 이름은 이경순(I)

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7     


나 국민학교 때는..이라고 말하면, 그건 일제의 잔재라며 바른 명칭을 써라! 상식 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 그래서 나 초등학교 때는.. 정정해 말하면, 네가 무슨 초등학생이었냐? 국민학생이지! 왜 어린 척 해? 놀림을 받는다. 나는 국민학교 마지막 세대이다. 6학년 졸업을 할 무렵, 이젠 국민학교, 국민학생은 없다고 했다. 앞으로는 초등학교. 초등학생으로 부른다 했다. 한동안 내가 국민학생인지 초등학생인지 아리송했고. 좀 보태어 엄살 부려 표현하자면, 꾸역꾸역 쌓아놓은 6년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아찔함도 느꼈다. 나이까지 빠른 년생이라 물에 붕붕 뜬 기름처럼 겉도는 기분은 인생 전반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시대는 우리를 끼인 세대라고 불렀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함, 위에서 누르고 아래에서 밀어내는 천덕꾸러기 82년생. 그렇지만 좋은 것도 참 많았다. 뇌가 아주 말랑말랑할 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걸 지켜봤고. 라디오에 낭만과 팟캐스트에 편리함을 두루두루 섭렵했으며. 워크맨 시디플레이어 엠피쓰리까지 다 활용해 봤다. 가장 활기차고 신기했던 미지의 밀레니엄 2000년도를 제일 예쁜 나이로 원 없이 누려봤기 때문에. 그래서 나름 만족을 하며 살고 있다.     


딱 두 가지만 빼고! 첫 번째는 생리와 자궁! 나의 자궁 일명 자순이는 한 달에 한번 많이 슬퍼한다. 엉엉 쉬지 않고 울어댄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극심한 통증으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자순이도 나도 한 달에 한 번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울어댄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열두 살 5학년 때의 기억이다. 우리 집은 중학교 전에는 참 가난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불편하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외동딸에 대한 부모님의 남다른 사랑이 가난으로부터 보호해 줬기 때문이다. 설탕 장미꽃이 올려진 버터크림 케이크가 점점 사라지고 생크림케이크가 유행할 때, 엄마는 생과일이 올려진 우유 맛이 기가 막힌 비싼 케이크를 간식으로 사줬고. 학원도 남들 가는 것만큼 보내줬다. 고장 난 멜로디언에 호스를 연결해 불고 있는 내가 불쌍했던 아빠는 용산 전자상가에 데려가 건반을 사줬다.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어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말하는 건 다 들어줬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님이 피나는 노력을 해도 사람들은 특히 학교는 기가 막히게 가난을 찾아냈다.     


5학년 때 담임. 그 이름도 잊지 않는다. 서 맹 기! 저승사자. 마귀할멈. 구미호. 무서운 건 다 붙여 부르던 국민학교 담임 선생님. 아버지가 교수님인 문영준을 아주 예뻐했고. 치맛바람 엄마를 둔 장은혜를 총애했으며,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애들은 무시하고 구박하던 못된 인간말종. 수학이 들어간 요일은 정말 죽고 싶었다. 칠판 앞에 가득 쓰여 있던 난해하고 무서운 문제들. 유독 못하는 애들만 불러내서 풀게 했다. 그날도 분필로 녹색 칠판에 점점을 찍고 있는데, 별안간 날아든 주먹에 내 작은 몸은 앞문까지 날아갔다. 쓰러진 나를 일으켜 억지로 옷을 벗기려 했던 흉악한 여자. 벌벌 떨면서 바지춤을 붙잡고 눈물만 뚝뚝 흘렸던 그 처절한 기억. 그 여자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다음 주에 학교 운동장에서 벼룩시장을 한다니까, 옷이나 안 보는 책 같은 거 가져오도록! 우리 은혜랑 경은이는 집에서 못 입는 옷 좀 많이 가져오렴."           

    

다음날, 교탁 위에는 부자 아이들이 집에서 가져온 헌 옷들로 작은 동산이 만들어졌다.               


"이경순, 문현조 나와서 받아가!"               


서맹기는 할머니와 둘이 사는 이경순과 나를 교탁으로 불러 빛바랜 블라우스와 유행 지난 원피스를 들려주며 뿌듯하게 웃었다.               


"이경순이랑, 문현조는 은혜한테 고맙다고 해라! 반장한테는 못 쓰는 옷이지만, 니들한테는 귀한 새 옷 아니겠니?"               


지들이 가져온 헌 옷을 하나씩 들고 자리로 돌아가는 나와 경순이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무시하는 눈빛과 우월감에 가득 찬 장은혜의 도도한 얼굴. 그리고 지가 뭐라도 되는 듯 교탁 위에 옷을 뒤적거리던 서맹기의 교활한 입술. 지금도 악몽처럼 남아있다. 그날 저녁, 가방에 쑤셔 넣은 블라우스를 꺼내든 엄마가 이게 뭐냐고 물었다. 열두 살의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 선생님이 현조가 너무 예쁘다면서 주셨어!"     


순간, 고단한 노동자였던 엄마아빠 얼굴에 환한 태양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활짝 웃으며 내 머리를 내 뺨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던 거칠고 상한 그 손길 역시, 악몽 같은 기억 옆에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다. 부모님이 나의 말로 인해 울기보다는 웃기를 바랐다. 그게 설령 거짓말일지라도..     


"엄마! 아빠! 우리 선생님은 늘 책상 위에 레몬 사탕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놓아두거든요? 그 사탕은 아무나 먹는 게 아니에요! 선생님이 사랑하는 아이들만 먹을 수 있어요! 현조는 매일매일 그 사탕을 먹을 수 있어요!"     


그러면 아빠는 까만 흙이 박혀있는 손으로 내 볼을 감싸면서 말했다.     


"나의 태양! 문현조! 너는 어두운 밤하늘이 아니야. 낮의 해처럼 밝고 환한 내 딸."     


그래서 나는 절대로 달이 되지 않았다. 늘 낮에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려고 노력했다. 비록 한 달에 한번 너무 일찍 찾아온 여자의 고통으로 배를 잡고 아파해야 했지만, 아픈 날들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 밤이 지나고 나면 부모님을 향해 밝고 환하게 거짓말을 했다.     


"아빠! 현조는 학교 가는 게 참 좋아!"     


거짓말이다.     


"엄마! 선생님이 현조 예뻐해 줘! 어딜 가도 사랑받고 있어!"     


거짓말이다.     


"아빠! 현조는 친구가 엄청 많아!"     


이것도 거짓말.     


그러던 어느 날, 엄마아빠가 생일파티를 열어준다면서 친구들을 초대하라고 했다. 모든 게 들통 날 위기가 온 것이다. 나는 친구 하나 없는 왕따였다. 선생이 때리고 구박하는 아이와 친구가 되려는 애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1교시가 끝나고 책상에 얼굴을 묻고 다리만 덜덜 떨고 있을 때, 누군가 얇은 손가락 끝으로 내 손등을 톡톡톡 건드렸다. 부스스 일어나 얼굴을 들어보니, 나와 같이 서맹기에게 미움 받는 쌍두마차 구방덩어리. 여름에는 하복체육복, 겨울에는 동복체육복에 할머니들이 입는 보라색꽃무늬 패딩을 입고 다니는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 요즘은 서맹기가 준 헌 옷을 열심히 입고 다니는 이경순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경순이를 멀뚱하니 쳐다보았다.     


"이거.."     


경순이가 살포시 웃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에는 담임의 레몬사탕이 놓여있었다. 나는 눈만 껌뻑이며 사탕을 응시했다.     


"너 먹어.."

"왜..."     


"너도 안 받아 봤잖아."

"왜...."     


"저기 장은혜 자리에 떨어져 있었어. 내가 몰래 주웠어."     


시장 한 귀퉁이에서 고무대야에 담긴 생선을 파는 등이 굽은 할머니의 손녀. 가난하고 공부 못하고 잘 감지 않은 머리가 항상 떡이 져있는 이경순. 하위 등급 안에도 미세한 등급은 또 나뉘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이경순보다는 몇 등급 위라는 발칙한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경순이가 내미는 그 레몬사탕이 너무나 갖고 싶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반지처럼 말이다. 머리로는 '마이 프레셔스' 음침하게 속닥이며 레몬사탕으로 손이 뻗어가고 있었지만, 현실의 문현조는 입도 벙긋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댔다. 곧 머쓱해진 경순이가 동그랗게 말린 내 품속으로 사탕을 던져놓고 돌아섰다.     


"저기!"     


나는 다급하게 경순이를 불러 세웠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돌아보는 이경순은 장은혜가 버린 치맛단이 뜯어져 올이 풀린 원피스를 입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 집 올래? 내 생일인데..."

"응! 갈래!"     


경순이는 일초 만에 대답을 했다. 경순이에 기차보다 빠른 답변에 내가 더 당황을 했다.    

 

"그래.. 그럼 방과 후에 교문 앞에서 만나자."     


경순이는 달맞이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제 자리로 가더니 공책을 북 찢어서 얼마 없는 색볼펜을 바꿔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갔다. 그렇게 경순이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왕따끼리 논다며 놀려댔고. 옷 잘 입고 예쁘장한 장은혜 무리들이 속닥거리며 경순이와 나를 보고 키득거려도. 우리는 더 이상 두렵거나 외롭지 않았다. 레몬사탕이 든 유리병을 언젠가는 깨트리자는 맹랑한 다짐을 하면서 서부이촌동 구석구석을 누비고 돌아다녔다.     


경순이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는 집을 나가서 친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으로 늘 비어있는 우리 집과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로 인해 집이 비는 경순이네를 번갈아가며 놀았다. 우리에게는 자유로운 아지트가 두 개나 되는 거였다.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만 받아봤던 나는 경순이가 차려주는 식탁이 참 신기했다. 고봉밥에 계란프라이를 얹어 내어 주는 경순이는 한참 언니 같았다. 한 번은 할머니가 소시지를 사줬다면서 그 귀한 반찬을 한 봉지 다 털어 케첩을 찹찹 뿌려 깨를 솔솔 뿌려서는 밥반찬으로 내왔다. 경순이는 무엇이든 양보하는 순하고 착한 아이였다. 나의 첫 친구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했다. 반 아이들에 조롱과 담임에 학대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다가오는 여름방학을 경순이와 함께 할 생각에 가슴에 토끼 방망이가 들은 것처럼 콩닥거렸다.     


"현조야! 방학 동안 할머니랑 남해를 내려 가있어야 해. 한 달만 일해주면 돈을 많이 준다고 했대. 꼭 편지할게! 알았지?"     


그러나 방학 내내 경순이의 편지는 오지 않았다. 조금 원망도 되었지만 할머니랑 돈을 많이 벌고 있나 보다 좋게 생각했다. 어린 나는 가난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방학 동안 경순이와 하고 싶던 많은 놀이들을 못한 게 아쉽지만. 어린 우리들에게 시간은 많았다. 한 달 만에 만날 나의 첫 친구, 경순이를 떠올리면 베실베실 웃음부터 나왔다. 고양이와 강아지가 표지에 그려진 노란 일기장에 [경순이와 현조의 교환일기]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고 서랍 속에 소중하게 넣으며 개학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어느덧,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날 아침. 일찍이 학교로 가서 경순이 자리에 편지와 캐러멜을 올려두며 나의 하나뿐인 동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종례시간이 되어도 경순이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무시무시한 서맹기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 경순이가 오늘 안 왔는데요.."     


땅바닥에 맞닿아 있는 내 정수리를 쏘아보던 서맹기가 안경을 콧등으로 걸치면서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걔네 할머니 죽어서. 고아원 갔다던데?"     


죽음이 무엇인지. 고아원은 또 무엇인지. 그때의 나는 몰랐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곧장 용문시장을 찾아가 할머니의 고무대야를 찾았다. 그러나 할머니와 경순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폐지만 가득 쌓여있었다. 그게 나의 첫 이별이었다.          


"나야 나! 경순이! 이경순!"     


나의 첫 친구.

나의 첫 이별.

지우고 싶은 시절의 산 증인.     


이경순이 삼십 년 만에 내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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