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작은 스탠드를 샀다. 주홍색 불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조명이 참 마음에 든다. 이경순과의 동거 이후 달라진 것이 많은데, 스탠드를 산 것도 변화 중에 하나라면 하나일 수 있겠다. 부모님의 청평 전원생활로 인해 자동으로 독립을 하게 된 후로 작은 습관이 생겼는데. 그건 밤에 티브이를 틀어놓고 잔다는 것이다. 열한 시의 책방 문을 닫고 집으로 올라와 티브이부터 켜는 것이 하루를 마감하는 나의 루틴이었다. 대충 씻고 나와서 티브이가 놓인 마루에 이부자리를 준비한다. 이 채널 저 채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리모컨 버튼을 돌리다가 마음에 드는 채널이 나오면 화면을 고정하고 그제야 이불 위에 드러눕는다.
그렇게 생각 없이 화면을 들여다보면 어느덧 까무룩 잠이 든다. 꿈속 장면인지 드라마 대사들인지 모를 것들과 씨름을 벌이다가, 동이 틀 무렵 부스스 일어나 뜨겁게 달아오른 바보상자를 끈다. 그리고 다시 잠을 청한다. 제일 달콤한 시간은 이때다. 허나, 자려고 너무 집중해서도 집착해서도 안된다. 부담돼서 역으로 정신이 또렷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배영 하듯 힘을 빼고 찬찬히 무의식에 정신을 맡겨야 달디단 꿀잠을 누릴 수 있다.
지금은 이경순과 살게 되면서 티브이는 끄고 잠은 내 방에서 잔다. 고요한 밤을 즐기면서 뒤척이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 된다. 경순이의 방은 부엌 옆에 작은 골방이다. 안방을 쓰라 해도 창문도 없는 골방을 고집하는 청승맞은 이경순. 얼마 없는 짐을 풀더니 낙원이 따로 없다며 저래 황소고집을 부린다. 어쨌든 소음 없는 한적한 밤의 고요를 알게 되면서 어린 시절 끼고 살던 라디오가 그리워졌고. 스탠드 아래에서 책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어제 옥탑방에서 라디오를 찾았고 전자랜드에서 작은 스탠드를 샀다.
'책방에도 라디오를 틀어봐?"
경순이한테 물어봐야겠다. 경순이는 산부인과 검진날이라 병원에 갔다. 요즘 가을이 할머니랑 단짝이 되어서 밤낮없이 붙어 다닌다. 오늘 병원도 같이 갔다. 뭐 아들내외와 손녀가 없는 땅에서 마음 붙일 곳 생긴 가을할머니도 좋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아 경순이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만, 왠지 모르게 거슬린다. 책방에 둘이 앉아 두런두런 화기애애 담소를 나누다가도 내가 오면 슬쩍 자리를 뜨는 가을이 할머니도 신경 쓰이고. 내 공간에서 왜 저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슬며시 부아가 치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여하튼 이경순과 살면서 좋은 것 반, 싫은 것 반이다.
"뭐가 이렇게 많어.."
카운터 밑에 쇼핑백을 발로 툭 차면서 꿍얼거렸다. 아침에 가을이 할머니가 이경순에게 선물한 것들이다. 임산부 영양제, 튼살크림, 손녀가 쓰던 신생아 용품들이 종이봉투가 찢어질 만큼 가득 들었다. 가을이 할머니가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이경순의 꼬락서니가 참 거슬린다. 또한 가만 듣고 있다 보면, 같이 사는 오랜 친구라는 네 년은 퉁박만 주는데. 만난 지 얼마 안 된 가을이 할머니는 이렇게 정성이라며, 왠지 나를 자극하는 것 같아. 짜증이 난다.
서현에게 이런 애로사항을 늘어놓으면, 내 푸념을 듣던 서현이 아주 깔끔하게 직언을 날린다. 그건 질투라고. 그 질투가 누구를 향한 건지 잘 살펴보라 조언을 하는데, 서현이 맞는 말을 하는 건 알지만, 괜스레 서운해져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전화를 끊는다. 요즘은 모든 게 다 섭섭하고 짜증이 난다. 아.. 사춘기 때도 감정이 미친년 널뛰듯 이렇진 않았었는데.. 새벽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뜨거운 불에 안면을 가격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이서현과 이경순은 한 치도 모를 것이다. 외롭고 고독하고 아프고 우울하다. 대포주사 부작용으로 오는 폐경증상을 전했음에도 둘 밖에 없는 이 씨 친구들은 정말 무신경하고 이기적이다. 이런 것들도 못마땅하고. 점점 예민해지는 나도 싫고.
'아우씨, 무릎은 또 왜 이렇게 아픈 거야'
무릎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파스도 소용이 없고, 내 사정을 이해하는 이도 없는 것 같다. 더워죽을 것 같다가 또 갑자기 오한이 온다. 숨이 턱 막히다가 또 괜찮아진다. 육신이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맞는 말 같다. 이래저래 힘들지만, 이경순에게 화풀이하는 건 그만둬야 한다는 것도 누구보다잘 알고 있다. 경순이는 부단히 애를 쓰고 있으며 백이면 백 내게 다 맞추면서 우리 엄마보다 더 잘해주고 있으니까. 계산적이긴 하지만 경순이와의 동거로 실보다는 득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문현조! 못되게 굴지말자!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고!'
눈을 감고 양팔을 위아래로 천천히 날갯짓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때, 책방의 문이 짤랑거리며 열렸다. 나는 퍼뜩 눈을 뜨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데스크에서 나왔다. 속으로 가을이 할머니랑 같이 들어오면 잘해줘야지, 다짐하면서 문 앞으로 다가섰다.
"에잉 내가 무슨 돈으로 사냐? 가을이 할머니가 며느리 주려고 샀는데. 며느리가 자기 스타일 아니라고 거절했데. 집에 두면 쓰레기 된다고 했다는 거야. 아니 무슨 그런 싹퉁바가지가 다 있냐? 요즘 며느리들은 다 그런가 봐? 들어보니까 되레 가을이 할머니가 시집살이하셨더라고."
"그거야, 며느리 입장에서도 들어봐야 하지 않나?"
나는 팔짱을 끼며 새초롬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이경순은 아랑곳없이 가을이 할머니 역성을 들면서 열변을 토한다. 앞으로 잘해주려 마음먹었던 게 솜사탕처럼 작아진다.
"가을이 할머니가 우리 아기 태어나면, 가을이 쓰던 보행기랑 유모차랑 다 주신대. 정말 저렇게 인품 좋으신 분은 처음이야. 그리고 병원에서 가을이 할머니한테 보호자분 되시냐면서 친정어머니냐는 거야? 그랬더니 가을이 할머니가 그렇다고 하셨다? 병원 나와서 국수 먹는데, 사장님이 모녀가 똑 닮았다더라?"
"야! 이경순!"
별안간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는 나를 이경순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본다.
"그만 좀 해! 만날 가을이 할머니 가을이 할머니!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야!"
분노는 발휘할수록 불꽃에 마른 장작불을 더하는 것처럼 거세진다.
"지 마음대로 내 공간 다 바꿔버리고! 네가 뭔데?"
처음은 내 의지였고, 나중은 나도 모르게 쏟아진 것들이다.
"나는 싫다고! 불청객은 너랑 뱃속에 있는 걸로 족하다고!"
아.. 마지막 말은 하지 말걸. 후회해 봤자,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지 못하고. 깨진 병을 이어 붙일 수는 없다. 나는 괜스레 더 씩씩대면서 얼어붙은 경순이를 쏘아보았다. 일분정도 정적이 흘렀는데, 이상한 나라 폴의 세계관처럼 모든 것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이럴 때 삐삐가 나타나 요술봉을 휘둘러 4차원의 문을 열어주거나, 출입문의 종소리가 울려 퍼져 손님이라도 들어와 줬으면 좋겠는데.겸연쩍은 얼굴만 삐딱하게 돌리고 한쪽 다리를 올렸다 내리면서 머리카락 한 줌 잡아 비비 꼬았다. 이번에 날린 펀치는 좀 더러웠던 것 같다. 경순이는 녹다운이 된 건지 가드조차 올리지 않는다.
'10,9,8,7,6'
얼빠진 경순이가 뭐라도 날리기를 바라며 속으로 카운트를 세었다. 강펀치로 반격을 해도 이번에는 내가 깨갱 해줘야지. 빨리 뭐라도 하란 말이야 이경순!
'54321'
대대대댕! 승리의 종이 울렸고. 경순이는 출입문을 열고 퇴장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내가 이겼다. 닫힌 출입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경순이는 늘상 내가 반칙으로 이겨먹어도. 웃어넘기거나, 못 들은 척하거나. 꼬리를 내리며 전전긍긍 내 밑으로 들어왔지 이렇게 당당하게 감정을 표출한 적이 없었다.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쫓아갈까? 고민하다가 이내 메스꺼운 생각하나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하아! 가을이 할머니 생겼다 이거지?"
배은망덕한 년! 은혜도 모르는 무식한 년! 근본 없이 천한 년! 나는 입에 담지도 못할 막말을 쏟아내며 비좁은 헌책방을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녔다. 데스크 위에 종이컵과 커피세트를 집어던지고 난로 위에 남은 계란과 고구마를 내던졌다. 참담한 배신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화산처럼 터질 것 같았다. 간신히 화를 누르고 데스크 앞에 앉았는데, 주룩주룩 눈물이 솟구치면서 암담한 공포가 밀려왔다. 슬픈 카타르시스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으아앙 큰소리로 울어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발을 버둥거리면서 카운터 위에 있는 건 죄다 집어던졌다.
"다 싫어.....다 꺼지라 해...."
콧물 한 사발 크응, 우렁차게 풀고 있을 때였다. 종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조용히 출입문이 열렸다. 나는 급하게 울음을 막고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열린 문틈을 응시했다. 이경순이 무채색의 얼굴로 책방 안으로 들어왔다. 천천히 발을 내딛어 손에 들고 온 것을 캠핑용 접이 식탁에 올려놓더니 난로 위에 검은 재를 쓸어 모아 버리고. 마른 수건으로 식은 난로를 털어냈다.
"현조야 김밥 먹자, 오이 많이 넣고. 참기름 듬뿍 발랐어. 어제부터 집김밥 먹고 싶댔지? 어묵탕도 끓여 먹자. 춥다 빨리 와."
나는 데스크 앞에 앉은 채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부루퉁한 입술을 삐죽 내밀고 테이블 아래 두 손을 꼼지락 거렸다.
"현조가 추어탕 못 먹는 줄 몰랐어."
순하고 물러터진 이경순, 이제는 든든한 뒷백도 생겼겠다. 혼자 사는 가을이 할머니한테 가도 됐을걸. 그럴 줄 알았는데. 나는 모기만 한 음성으로 중얼대듯 못난 입을 열었다.
"가을이 할머니는..."
"잘 말했어. 신경 쓰지 말고 와. 배고프잖아. 또 끼니 놓쳐서 밤새 속 쓰리다 하지 말고. 내가 그쪽으로 갈까?"
뭘 잘했다고. 요지부동 고집을 부리는 나에게 경순이는 또 넉넉한 마음을 내준다. 경순이가 무거운 몸으로 캠핑용 식탁을 낑낑대며 옮기는 것을 슬쩍 올려보았다. 일어나서 사과를 하던지, 식탁 옮기는 걸 도와주던지. 아니면 난로 앞으로 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임에도. 임산부석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적반하장 몰염치했던 그날처럼 배짱을 부리고 있다.
"현조야.. 요즘 내가 푼수 짓을 했지? 미안해. 너 대포주사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알면서. 배려 없이 마냥 좋아하고, 내 기분에만 취해가지고.. 나는 정말 나쁜 친구야!"
경순이는 내 손에 젓가락을 쥐어주며 말했다.
"오랜만에 할머니 사랑을 받아서. 마치 할머니가 살아난 것 같아서 좀 들떠있었어.. 나 열두 살 여름방학 때 할머니랑 남해 갔었잖아. 친척이 한 달만 덕장에서 생선 말리는 거 도와주면 돈 많이 준다 했거든. 버스를 몇 시간 타고 갔는데. 남해는 참 예뻤어. 하늘이 엄청 머리에 붙어있더라? 너무 좋았어. 일하러 온 게 아니고 여행 온 것 같았어. 나 할머니랑 소풍 한번 가본 적이 없거든. 친척아줌마가 잠 잘 곳으로 창고를 내어 주었어도 마냥 신이 났어. 창고 안에 평상에서 할머니랑 잤거든?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베개 옆에 쥐가 노려보고 있던 적도 있다? 할머니가 그때 참 미안해했어. 일주일 지나서 할머니가 그냥 집에 갈까 경순아.. 하는데. 나는 조금만 더 일해서 돈 받아서 서울 가요. 현조 선물 사서 가요, 했어. 그냥 그때 가자고 할 때 서울로 갈걸 그랬어. 할머니가 일하다가 떨어져서 다쳤는데 병원 가기에는 눈치가 보였어. 친척어른들도 귀찮아했고. 아줌마가 준 파스만 할머니 등에 붙여줬어. 덥고 바람도 안 들어오고 쥐가 노려보는 그 창고에서 할머니가 죽었어."
경순 이는 울지도 않고 아주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할머니 장례도 치르지 않고. 어디다 묻었는지 말도 안 해주고. 할머니가 눈을 감은 5일 뒤에, 어린 경순이 손을 잡아끌어 허름한 배에 태웠다고 한다.
"몇 시간 바다만 보면서 도착한 곳은 작은 섬이었는데. 배에서 내리자마자 선착장에 서 있던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여자가 오라고 손짓을 했어.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엄마도 저렇게 고울까?"
목조건물로 되어 있는 간판도 없는 술집. 그곳에서 경순이는 생선을 굽고. 무말랭이로 마른반찬을 만들고. 알 탕과 매운탕을 끓이고. 파전과 빈대떡을 부쳤다. 가끔은 술도 따르고 가슴팍에 돈을 넣어주는 음흉한 아저씨들을 피해 뒷간에 숨어 있다가 주인여자에게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단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8월의 한여름, 대학생 무리가 섬으로 봉사를 왔는데. 의대에 다니는 남자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이마를 덮는 앞머리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심장이 찰랑거렸다고 한다.
"그 해 여름은 할머니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웃은 것 같아. 하루는 오빠에게 줄 녹두전을 몰래 담고 있는데, 주인아줌마가 부엌에서 나오라고 했어. 진달래색 한복을 입으라 하고, 얼굴에 분이랑 루주를 발라주면서. 다 컸으니까 손님을 받으랬어. 그러고 나면 머리 올려준댔어.."
그 길로 경순이는 도망을 쳤다. 아줌마가 뒷간을 간 사이에 한복을 입은 채로 할머니의 지갑과 나와 찍은 사진만 들고서는 의대에 다니는 남자에게로 갔다고.
"오빠 여행가방에 숨어서 섬을 빠져나왔어. 웃기지?"
경순이는 섬에서 나오고 의대 오빠와 충주 자취방에 살림을 차렸다는 말을 하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시장에서 밥그릇 수저 잠옷을 사는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면서, 그날들을 회상하듯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열여섯 살 생일에 선물처럼 아기가 찾아왔어. 오빠한테 방방 뛰면서 임신했다고 말했는데... 오빠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어."
경순이 첫 아이에 생부는 임신을 했다고 행복해하는 열여섯밖에 안된 그 아이의 뺨을 눈두덩을 가슴과 등짝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다고 한다.
"너무 아팠는데, 우리 아기만 가렸어."
경순이는 날아오는 주먹을 막지 않고 오직 배만 감쌌다고 한다.
"오빠를 너무 사랑했는데, 이젠 아기를 사랑해야 해서. 자취방에서 나왔어. 그런데 정말 웃긴 건 뭔 줄 알아? 나 그 와중에 밥은 먹고 나왔다? 실컷 나를 패고는 지쳐서 주저앉은 오빠한테 밥 퍼달라고 했어. 그때 오빠가 어이없이 노려보다가 내가 하도 떼를 부리니까 밥 한 공기 퍼주고는 애 지우라고 소리치고 나가버렸어. 그래서 나는 오빠를 미워하지 않고 떠날 수 있었어."
"경순아.. 그게 무슨 말이야.. 사지를 찢어 죽일 놈을 미워하지 않는다니... 밥을 퍼달라니.."
"내가 만난 어른들은 다 무서웠거든. 그런데 나는 그 어른들한테 늘 밥을 퍼달라고 했어. 그런 나를 모자란 애로 여겼지만. 그런데 나는 맞으면서도 달라붙어서, 내 밥 좀 퍼달라고 했어. 끝내 다들 밥을 퍼줬어.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았어."
"할머니가 일을 나갈 때 반찬은 냉장고에서 꺼내먹으라면서도. 꼭 밥은 퍼주는 거야. 쇠그릇에 이만큼 밥을 퍼서 뚜껑을 꽉 닫아서 아랫목에 묻었어. 그래서 나는 아무리 밉고 무서운 사람이어도 내 밥을 퍼주면 사랑하게 돼버려. 미움이 사라지면 행복해졌어."
"그래서 네가 그렇게 밥을 퍼 주는 거에 집착하는 거였구나. 나는? 나는 안 미워? 나는 안 무서워? 왜 나한테는 밥 퍼달라고 안 해?"
"너랑 우리 할머니는 내 밥 안 퍼줘도 괜찮아"
나는 따가워지려는 목 끝의 떨림을 밀어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마음을 퍼줬거든. 그것도 고봉만 하게"
나는 경순이에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경순이는 사랑이 사람이 된 건 아닐까 하는. 그래서 조금이라도 미움이 들어오면 못 견디는 거라고. 사랑을 원료로 살아가는 그녀가 사랑받고 싶어서가 아닌, 사랑하고 싶어서. 자신을 때리고 팔아버리고 영혼을 뭉개뜨리는 사람에게 밥을 퍼달라고 하는 걸까. 내가 먹을 밥을 퍼주세요.. 그러면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요. 제발 사랑하게 해 주세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그 사람들 밉지 않아?”
“아니.. 지나간 건 다 애틋해. 나쁜 것도 좋았던 것도. 다 내 거잖아. 그러니까 안 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