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으로 가는 길
2017년 8월의 어느 여름 날, 나는 평범한 아침을 맞이했다. 태수 아저씨는 빨간 버스 9003번의 운전기사로, 출발지인 판교에서 서울역까지의 길을 매일 똑같이 다니고 있었다. 아저씨는 종종 그 노선에 지루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가끔은 그 길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 상상 속에서 그는 자유를 찾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버스의 두 번째 탑승자였다. 매일 아침 나는 아저씨의 옆자리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거나 나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아저씨는 마흔이 될 때까지 사법고시를 준비했지만 계속 떨어졌고,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버스를 운전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내가 아저씨에게 그동안의 삶이 아깝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포기할 수 없었지. 늦은 나이에 공부를 계속 했던 이유는 가족에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가족들 몰래 밤에 공부를 했지.”
그 말이 나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아저씨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것을 마치 라디오처럼 들으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아마 주변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은 소중했기에 그저 나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버스에는 다른 사람들도 타고 있었다. 한남동에서 매일 다른 색깔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타는 송이언니는 아이돌을 꿈꾸며 8년 동안 연습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여행도 갈 수 없고,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한다고 말했다. 언니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하루하루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살아. 연습실에서 나가면 친구들이랑 소소하게 놀고 싶어도, 나는 그럴 수 없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가야만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내 몸매를 생각해야 해서 마음껏 먹지도 못해.” 그 말을 듣고 나는, 내가 자유로워 보인다고 착각했던 내 꿈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정열삼촌은 또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이었다. 서른 다섯이 될 때까지 한 회사에 스무 번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결국 그 끈기 덕분에 디자인팀 신입사원으로 채용됐다. 그는 그 이야기를 할 때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끈기와 노력 덕분에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삼촌은 나에게도 말했다. “끈기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노력만큼 중요한 게 마음가짐이야. 나는 그동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 삼촌의 말은 내가 꿈을 쫓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다.
그리고 남산 1호터널을 지나 명동 카톨릭병원 정류장에서 타는 형구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잘 다려진 정장을 입고 등장하셨고, 그 품위 있는 모습은 그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유쾌한 농담을 던져주며 다가오면, 나도 자연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건, 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거야. 늘 돈만 좇고, 그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인 줄 알았지. 하지만 이제 보니, 내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일해왔는지 모르겠어.”
그와 함께 버스를 타는 수자 아줌마는 매일 버스 맨 뒷자리 창가 쪽에 앉아 불편한 표정으로 지나가곤 했다. 그녀는 항상 화가 나 있는 듯 보였고,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은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면서 제일 힘든 건, 가슴 속에 쌓인 분노를 누군가와 나누지 못하는 거야. 사람들은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안 된다면서, 그냥 참고 살아야 한다고 하더라고. 내가 그렇게 살면서 더 고통스럽고, 결국 아무에게도 나의 감정을 말하지 못한 채 버티는 거야.”
나는 그 말이 너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녀가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그저 표면적인 감정이 아니라 내면에 억눌린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수 아저씨가 운전하는 버스에서 평범한 하루가 아니게 되었다. 형구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수경아, 너가 말한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도 되니?” 나는 그 질문이 나를 향한 진지한 물음이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꺼내놓았다.
“저는 4대째 판사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외동이라서 저의 선택은 없었고, 저의 꿈은 항상 판사가 되어야만 했어요. 공부하는 것, 책을 읽는 것, 그것은 모두 판사가 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어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은 모두 불필요한 지출이었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런 삶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어요. 그래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버스를 타는 것이었지요.”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부모님의 말씀이 중요하지만,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 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렇게 우리는 버스 안에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했다.
그때, 수자 아줌마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다. “이렇게 살면서 좋았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겠어? 기사 아저씨, 서울역 말고 다른 데로 갈 수 있어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아저씨는 웃으며, “좋아요, 한번 다른 길로 가볼까요?“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크게 웃으셨고, 수자 아줌마는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였다. 송이언니는 창문을 열며 기분이 좋아 보였고, 정열삼촌은 회사에 전화를 걸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며 병가를 냈다. 아저씨는 상상만 하던 노선 이탈을 실제로 실행해본 것에 대해 짜릿하다고 말했다. 그 순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사연을 안고, 같은 목적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우리가 향하는 목적지는 형구 할아버지의 고향 부산 해운대였다.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했다. “자유로워지자.” 그 말은 우리 모두에게 유언처럼 남았다. 그날, 우리는 모두 자유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났고, 그날의 기억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