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끝난 것 같은 비통한 순간에도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워낙 어린아이가 떠나다 보니 장례식장 측도 조심스레 진행사항을 물어보았지만, 장례식장에서 오가는 대화들은 슬픔과 대비되어 어쩐지 어처구니가 없게 느껴졌다. 퉁퉁 부은 눈으로도 국, 안주, 꽃, 상복 등 딸을 보내기 위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했다. “돼지고기는 대(大) 자로 하시겠어요?”라는 질문에서는 삶의 비루함이 느껴져 실소가 나왔다.
남편은 오죽했을까. 사고사라 장례식 중에도 경찰서와 장례식장을 오가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울지도 못하고 내내 긴장을 하며 보내던 그는,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야 밀려오는 감정에 힘겨워했다. 남편이 무너질까 두려웠다.
“정신과 가서 약을 좀 타자.”
아이의 투병 생활을 지켜보며 깨달은 것은 무조건 잠을 잘 자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자야 했다. 불안감과 우울감도 낮춰야 했다. 사실 의사 선생님께 아이의 부고를 전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정신과는 예약 없이는 진료가 어려웠지만, 당장 진료를 볼 수 있는 곳으로는 아이가 다니던 병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사정을 말하면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예상대로 병원에 전화를 하니 바로 예약을 잡아 주었다. 남편과 나, 큰아이까지 세 식구가 된 가족은 아이의 주치의를 만나러 갔다.
나무 정신건강 의학과
매주 금요일이면 학교 외출증을 끊고 진료를 받던 병원을, 이제 아이 없이 보호자들만 들어갔다. 학군지의 병원인 만큼 대기실은 오늘도 교복 입은 학생들로 붐볐다. 이 병원을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딸 또래의 청춘들이 병들어 있는지 목격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라는 인식도 가지게 되었다. 딸의 이름 대신 'XXX 보호자님'이라 불리는 소리가 낯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이했다. 늘 아이와 함께였던 진료실에서, 우리는 눈물로 그렁그렁해진 채 아이 없이 마주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정신과 의사들도 환자들을 잃는 경험을 하지만 저는 첫 경험이라, 소식 듣고 잠을 못 잤습니다. 더 잘 지켜봤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저를 탓하셔도 괜찮습니다.”
책임을 가리는 자리에서 의사들이 솔직하지 않고 책임 회피를 한다고 생각했던 건 내 편견이었을까. 대뜸 이어진 선생님의 솔직한 사과를 듣고 적잖이 놀랐다. 6개월간 봐온 선생님은 늘 당당하고 명확한 차도녀 같은 모습이었고, 때로는 딸에게 얼음처럼 차가운 팩폭을 날려 아이의 멘탈이 와르르 무너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사과를 들으러 간 것은 아니었다. 우리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선생님께 아이의 부고를 알리고 이 충격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듣고 싶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많이 힘들 때 도움받을 비상약을 처방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만큼이나 자책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궁금한 게 없었던 건 아니다. 아이의 정확한 병명이 무엇인지, 우울증인지 양극성 장애 2형인지 경계성 성격장애는 맞는지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또, 마지막에 그동안 안 쓰던 항우울제를 왜 처방하셨는지도 묻고 싶었다. 만 19세 미만의 청소년 환자에게 항우울제를 투여하면 자살 충동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부작용이었다. 그 위험성 때문에 그동안 안 쓰던 항우울제가 아이가 너무 가라앉아 보였던 건지 마지막에 처방됐다. 그때는 그 처방이 마음에 걸려도 이유가 있겠지 하며 넘겼다. 이제서야 물어보고 싶지만 충동이 아닌 약 때문에 딸이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질문을 삼켰다. 6개월 동안 맞는 약을 찾지 못했는데 마지막 한 알 때문에 소위 말하는 '극단적 선택'을 했을 리는 없으니까.
선생님은 그 처방을 자책하는 걸까. 아니면 아이가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입원이나 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걸까. 약물이나 입원 같은 다른 방법을 쓰지 못한 것에 아쉬움은 있었지만, 원망은 없었다. 엄마인 나도 아이를 지키지 못했는데, 누구를 탓할 수 있겠나. 종합병원이 약도 다양하고 임상이 더 풍부하다는 지인의 조언을 듣고 종합병원 정신의학과 진료를 4개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진료가 다음 주였는데, 딸은 마치 그 시간을 피하듯, 더 이상 병원은 싫다는 듯이 가버렸다.
"아니에요, 선생님. 다 운명이겠지요. 선생님 덕분에 그동안 버틸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진심이었다. 원래 의사와 환자 사이에 생겨야 할 라포가 선생님과 나 사이에 형성되어 버린 것 같다. 그게 내 판단을 흐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료 날이면 아이를 돌보며 쌓였던 불안과 걱정을 선생님께 쏟아내며, 또 한 주를 견뎌낼 답을 얻었다. 선생님 역시 자신의 아팠던 유년기를 털어놓으며 딸의 생각을 돌려보려 애쓰셨다. 이전 병원에서 느끼지 못했던 진심과 신뢰를 이곳에서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아쉬운 것은 아이는 주치의의 말을 칼날같이 받아들이며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자살을 막기 위해 입원시키는 폐쇄병동에서도 자살은 일어나요. 환자가 삶의 의지 없이 죽음을 택하려 할 때는 막기가 어렵습니다. 아이가 그랬어요."
"어머니, 정말 애쓰셨어요. 어머니처럼 노력하는 분은 없습니다. 진심이에요. 힘드실 때 언제라도 오세요. 꼭 연락 주세요. 가족들이 잘 지내시는지 알려주세요. 제가 아이는 못 지켰지만, 가족은 지키고 싶습니다. 꼭 소식 전해주세요."
딸을 지키지 못한 엄마가 듣기엔 마음 아픈 위로였다. 내가 자책의 무덤에서 허우적거릴 걸 알고 건네는 위로임을 알지만, 딸을 살리려 한 내 노력과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선생님이 주시는 위로라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다. 심장이 찢기는 듯한 통증에 목이 메었다. 죽음이라는 결과가 모든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어도, 이 진료실에는 아이를 살리려는 보호자와 의사의 진심 어린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서로는 안다. 선생님이 우리 가족, 특히 나의 안녕을 진심으로 바라고 계심이 느껴졌다.
"잘 지내신다는 안부를 자주 전해 주세요."
선생님과 눈으로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으며 진료실을 나왔다. 아이가 마지막에 복용했던 항우울제와 수면제가 이번엔 부모의 우울을 잠재우기 위해 처방되어 내 손에 들려 있다. 아이를 멈추지 못한 약이 이제는 부모를 위해 필요하게 되었다. 인생은 이렇게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그토록 미웠던 약이 필요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