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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지영 Oct 09. 2024

아직 버릴 때가 아니면 간직해도 괜찮아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오니 딸의 방은 이미 텅텅 비어있었다. 열일곱 아이가 남긴 유품은 그 짧은 생만큼 단출하긴 하나 수험서와 책이 상당했다. 딸의 책들을 그동안 자주 갔던 아파트 내 도서관에 기증하려 했었다. 그런데 방하나가 말끔히 비워져 쩌렁쩌렁 목소리가 울린다. 엄마다. 일흔이 넘은 노모는 새끼 잃은 딸이 어떻게 살까 싶어 장례식 내내 버리고 또 버렸음에 분명했다.    


“그 무거운 책들을 어떻게 혼자 치웠어?”     


허리 수술을 한 엄마가 그 짐덩어리들을 혼자 치웠다는 걱정과 딸의 채취가 묻은 물건이 내 손을 거치지 않고 버려졌다는 서운함이 뒤섞여 억양이 높아졌다.


“사람도 버리고 사는데 그깟 거 뭔 대수라고.”     


엄마는 망자의 물건을 사용하지 않고 불태우던 시대에 살았던 옛날 사람이다. '죽음 후의 5단계' 이론으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책 '상실수업'에서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할 때 유품을 정리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유품을 정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아직은 버릴 때가 아니라고 여겨지는 유품들은 간직해도 되며, 기부라는 선행은 사랑한 이의 선한 기운을 영원히 남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서양의 정서는 확실히 집안에 망자의 물건을 두는 것은 불길하다는 한국의 고정관념과는 다르다. 법륜스님도 '물건은 물건 일 뿐이다'라고 하셨더라.


그래도 엄마의 마음을 이해한다. 내 자식 눈에 눈물 날까 뭐라도 해야 하는 애끓는 모정이란 그런 것이니까. 내가 엄마가 되어보지 않았더라면 화가 나고 서운할 일일 테지만, 엄마가 되어보니 그 심정을 모를 수가 없다. 이로써 '딸의 물건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하는 숙제는 한방에 해결되었다. 그런데 고인의 물건을 쓰지 않는 문화에서 자란 엄마와 달리 MZ인 아들은 딸이 사용한 필기구며 다이어리를 챙기고 있었다.

   

“간직하고 싶어서요.”     


그 말이 ‘기억하고 싶어서요’라고 들렸다. 아들과 비슷하게 딸의 친구도 유품을 간직했다. 딸은 자기가 떠날 날을 미리 계획하고 있었다. 자기가 쓰던 소니 헤드셋을 ‘나보다 더 많이 쓰고 좋아했잖아’라는 편지와 함께 제일 좋아하는 친구에게 주었다. 딸이 물건을 자신한테 주는 것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친구는 거절했고 딸이 상처를 받았다는 걸 나중에 아이 휴대폰을 보고 알았다. 그 친구가 장례식장에 왔을 때, 내가 딸을 대신해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너한테 헤드폰을 꼭 주고 싶어 했는데 너는 어때? 네가 마음 가는 데로 하면 돼. 부담 갖지 마.”


“제가 가져도 돼요? 그럼 저 간직하고 싶어요.”     


아들과 같은 대답이었다. 고마웠다. 망자의 물건이라 꺼림칙 해 하지 않고 해맑은 미소로 간직하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도 ‘기억하고 싶어요’라고 들렸다.


나는 딸이 가장 마지막까지 주야장천 사용했던 만년필, 아이패드와 에어팟을 간직했다. 아이가 자신의 아픔을 기록하던 만년필과 아이패드는 내가 비탄의 늪을 빠져나오기 위해 긍정확언을 쓰고, 치유글을 쓰도록 하는 도구가 되었다. 딸이 엄마에게 용기 내서 글을 쓰라고 남긴 선물 같았다. 또 라이즈 오빠들의 후드티를 입기로 했다. 딸은 세뱃돈으로 후드티를 사놓고 입지를 못했다. 부들부들 따뜻한 그 옷이 난히 추위를 타는 나를 위한 것인가 싶다. 겨울이 오면 딸의 첫사랑, 반려견 해리를 산책시킬 때 입기 위해 남겨두었다.

    

딸의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도 정리했다. 인스타그램을 삭제할 때는 고민이 많았다. 딸은 인스타그램의 계정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잊혀지는 걸 슬퍼했다. 주계정에는 'remember me'라는 노래를 직접 부른 영상이 있었는데 영상과 노래가 사무치게 아름다웠다.


'이렇게 기억되고 싶은데 어떻게 떠났니, 아가'


 그러면서도 아프고 아픈 마음은 비공계 계정에 일기처럼 쓰며 헤드폰을 준 친구와 자신만 볼 수 있게 했다. 기억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숨기고 싶은 아픔도 있는 딸의 공간을 삭제하면, 하늘에 있는 아이가 노발대발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 아무도 찾지 않는 유령계정이 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또 내 아이만 삭제된 채 변함없이 굴러가는 세상에서,  제갈길 가며 잘 사는 친구들의 삶을 엿보는 치명적인 실수를 할까 두려웠다.  어여쁜 청춘들을 보며 부러움에 눈물 흘리고 아파할 내 모습이 불 보듯 뻔했다. 다른 친구들 입장에서도 죽은 친구의 계정이 보고 갔다고 뜨면 얼마나 놀랄 일인가. 그렇게 여러 이유로 삭제를 하게 됐지만 여전히 딸의 바람을 거스른 거 같아 미안하다.


딸의 죽음 후, 한 달은 사진을 보기가 힘들었다. 사진 속 환하게 웃는 모습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사무치는 그리움에 딸을 기억나게 하는 것들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딸의 휴대폰과 SNS를 정리하면서 그 예쁜 모습들을 다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지금은 보기 힘들어도 나중에 보고 싶을 때 남아있지 않으면 그 또한 후회할 일이다. 그래서 딸의 사진을 인스타그램 비공계 계정을 만들어 아카이브 삼아 올렸다. 가족들만 공유하려 했는데 어떻게 알고 딸의 절친들이 줄줄이 팔로우를 해서 들어왔다. 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비밀 모임이 결성된 기분이 들며 연대감 마저 느꼈다. 친구들은 나에게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주기도 해서 한 달 만에 게시물이 400개가 넘었다. 사진을 올리면서 우리 가족들이 나눴던, 딸이 친구들과 누렸던 행복했던 순간을 복기할 수 있었다. 사진을 뚫고 나오는 딸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나를  감싸는 것 같다.


여전히 남편과 아들은 사진을 볼 때 아려하지만, 나는 아이의 삶에 고통보다 행복이 많았다는 것, 누구보다 빛나는 아이였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많은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던 날이 더 많았다는 것을 재확인하며 위안을 얻었다. 비록 큰 고통을 주고 떠났지만 딸 역시 자신의 마지막 순간보다 행복했던 순간을 추억하길 바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딸의 유품정리사가 되어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기며 딸을 잃은 상실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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