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 눈시울 붉히는 날들이 지나가면 그 추억에 미소가 번지는 날 들이 올 겁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치매 할아버지’로 추락한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이 장남을 잃고 한 말이다. 바이든은 최연소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기쁨도 다 누리기전에 한 살 된 딸과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부통령 시절, 그 사고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두 아들 중 장남 보마저 뇌종양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아들의 장례식이 끝난 지 불과 2주 후, 바이든은 자신의 상실과 비통함을 억누른 채 사우스 캐럴라이나 총격사건의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를 위로하기 위해 연단에 서야 했다. 그가 그토록 뜨거운 용광로와도 같은 상실의 아픔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궁금해, 그가 출연한 PBS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상실로 비통함에 빠진 이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시겠습니?”
그는 정치인이 아닌, 자식을 잃은 초로의 아버지로서 조용히 답했다.
“반드시 추억하며 미소 짓는 날이 올 거예요, 반드시. 그건 틀림없어요. 다만 목표를 갖고 싸워나가야 됩니다. 저는 아들이 저를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라며 살아냈습니다.”
혹자는 너무 애쓰지 말고 시간에 맡기라고 나를 위로했다. 하지 가만히 있는다고 저절로 딸이 이해되고 덜 괴로운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이 들지 않았다. 자살유가족 자조모임에 나가 2년, 5년, 아니 10년이 지나도 마지막 사고 당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엄마들의 절규 목격했다. 딸을 잃은 슬픔은 내가 생을 다하는 날까지 함께 할 감정이다. 그러나 폭풍처럼 몰아치는 이 고통 언제쯤 잠잠해질까. 고통에도 태풍의 눈 같은 무풍지대가 있다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자살유가족이란 낯설지만 익숙해져야 할 단어를 검색했다. 자살유가족의 자살률이 일반인보다 22.5% 높다고 한다. 가족이 자살한 뒤, 남은 가족이 스스로 생을 포기하기까지의 평균 기간은 25.4개월. 모르는 게 나았을까. 얼마나 녹녹지 않은 생존이 될지 알게 되었다.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진정되지 않는 생각들이 날뛴다.
“더 이상 슬픈 일은 안 일어났으면 좋겠어.”
그의 두려움은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박힌 비극의 그림자였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영역이 되었고, 불안은 언제나 비극을 예고하는 듯했다. 불행 앞에서 '왜 나야?'는 오만한 물음이다.
“ 슬픈 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슬픔과 괴로움은 다른 거 같아."
슬픔과 괴로움을 분리할 수 있을까? 상실로 느끼는 고통은 불가피한 반응이라 해도 내 마음에서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불안이 생산해 내는 괴로움은 막고 싶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의 공장은 바로 내 마음이었다. 두려움은 또다시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내 상상이었다. 내 마음과 생각이 만들어내는 공포감을 잠재우고 어떻게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겨내야 하는지 답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딸 본인도 모르겠다는 그 우울의 본질을 알아내야 했다.
죽음, 슬픔, 애도, 그리고 자살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가족 모두 심리상담을 시작했다. 나는 치유글쓰기 상담도 더했다. 마음공부도 이어갔다. 긍정확언, 감사일기도 써 내려갔다. 아무것도 안 하고 추억에 미소 지을 날이 오기만 앉아서 기다리진 않겠다는 마음으로. 두려움은 아무것도 모를 때 가장 큰 법, 물러섬 없이 나는 딸의 죽음의 의미에 다가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