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수능날, FULL Marathon
나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나의 상태를 보면 준비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시험 당일 아침,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떨리는 마음이 가득했다면, 준비가 부족했던 경우였다. 반면에, 시험을 얼른 치르고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쳤던 때였다
모든 준비를 끝냈을 때는 눈을 감으면 시험 내용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얀 종이를 받으면 알고 있는 내용을 망설임 없이 쏟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모르는 문제가 나오더라도,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눈을 감았을 때 그동안의 노력이 떠오르는 순간, 마음은 담담해지고 차분해진다. 운동도 이와 비슷한 순간이 많았다. 한때 나는 설악산을 오르는 일을 내 목표로 아껴두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난이도의 산이라 불리는 그곳에 오르기 위해, 23개 국립공원 중 10개 이상의 산을 미리 올랐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암릉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체력의 한계도 극복했다. 그렇게 경험이 쌓이다 보니 설악산 등반을 앞두고도 긴장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나에게 설악산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이미 준비가 끝났으니, 오르는 일만 남았을 뿐이었다.
예상대로, 설악산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올랐던 다른 산들이 더 힘들게 느껴질 정도였다. 매달 한두 개의 산을 오르며 쌓은 경험 덕분이었다. 아마 인생의 모든 시험도 이와 같지 않을까. 출발선에 서는 순간 이미 결과는 정해진다. 준비의 과정이 결과를 정직하게 말해주는 것처럼.
마라톤을 준비하다 보면 완주 경험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대회 2주 전부터는 어떤 노력을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마라톤은 단거리 경주와는 다르다. 그 긴 거리만큼이나 꾸준하고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한 경기다. 여름 내내 쌓아온 내 노력이 답을 줄 것이다.
올해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달리기에 몰두했다. 매달 200km 이상을 달리며 부족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30km 이후의 12.195km는 여전히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출발선 앞에 서 있었다.
수능날처럼 느껴지는 JTBC 마라톤이 드디어 다가왔다. 대회를 앞두고 받은 배번호를 통해 배정된 조와 마라톤 코스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출발해 양화대교와 마포대교, 광화문을 지나 잠실대교를 건너면 올림픽공원에서 피니시라인을 만나는 코스였다.
대회 날 새벽같이 집을 나섰고, 환승하기 위해 지하철을 갈아타며 깜짝 놀랐다. 환승역에 이미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서울로 출퇴근하지 않는 나로서는 출근길의 지하철을 잘 모르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부터 줄을 서야 할 정도라니 생소한 풍경이었다.
지하철 안에서는 떠밀려 타느라 팔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답답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집결지는 집결지대로 놀라웠다. JTBC 마라톤이 한국 3대 마라톤 중 하나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막상 대회를 준비하며 느낀 규모는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대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짐을 맡기고 몸을 풀며 주변을 둘러보니, 달리기로 유명한 얼굴들이 곳곳에 보였다. 영상 속에서 항상 여유로워 보이던 그들도 오늘만큼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이 날은 나만의 수능이 아니라, 모든 러너들에게도 '수능' 같은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름 이른 시간에 집결지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앞에서는 A조부터 차례로 달리기 시작했다. 곧 내 순서가 올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출발선을 넘어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자, 예상치 못한 감정이 나를 덮쳤다.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쏟아부은 모든 노력과 마주하는 순간이었으니까. 때로는 왜 내가 이런 힘든 도전을 시작했을까 후회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에는 ‘그래, 이렇게 언제 또 달려보겠어.’라는 마음으로 나를 다독였다. 그 어떤 핑계가 생겨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저 꾸준히 달린 끝에, 이 출발선에 설 수 있었다.
출발. 페이스를 알려줄 시계를 누르고 출발선을 밟았다. 태양은 그 어떤 대회보다도 강렬하게 떠올랐고, 끝없이 펼쳐진 러너들의 물결 속에서 나도 한 걸음씩 내디뎠다. 초반 호흡을 다잡으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3km를 지나고 있었다.
훈련 때 왼쪽 발목의 불편함이 종종 신경 쓰였는데, 오늘은 그 통증이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기분 탓이겠지’ 하고 애써 무시하며 달리고 있을 즈음, 신발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 신발 밑창 홈 사이에 돌멩이가 낀 것 같았다.
수없이 연습했어도 신발에 돌이 낀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처음 겪는 일에 당황스러웠다. 갓길이 보이자 급히 멈춰 신발을 확인했지만,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회 중이라는 긴장감에 심박수도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상태라 그런지 더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장애물과 함께 달리기로 마음먹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1km 정도 더 갔을 때, 배수구 근처에서 강하게 발돋움하자 돌멩이가 빠져나갔다. 그 순간 느낀 해방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이후로는 주위 풍경과 러너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독특한 의상을 입고 이벤트처럼 달리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오랜 준비 끝에 나온 듯 묵묵히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고 있었다. 시각장애인 러너, 은퇴를 훌쩍 넘긴 고령의 러너,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달리는 러너들까지.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와 함께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집중하며 달리다 보니 벌써 20km를 지나고 있었다
올해 내 목표는 욕심을 조금 부려 4시간 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지금 페이스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25km를 넘어가면서 점차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평년보다 높은 기온 탓인지 갈증도 더 자주 밀려왔고, 평소보다 느린 페이스로 뛰고 있음에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20km까지 함께 뛰던 사람들도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나만의 페이스로 달려야 할 때였다. 챙겨 온 에너지 젤을 언제 먹을지 계산하며 뛰는 동안, 다행히도 한 가지는 마음을 무겁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뛰어온 거리를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왔던 거리만큼 더 가야 한다”는 생각 대신 “5km만 더 가면 30km야”, “조금만 더 가면 35km야”라는 식으로 가까운 목표를 상상하며 뛰었다. 그렇게 하니 거리에 대한 부담감도 점점 줄어들었다.
때때로 옆에서 내 배번호에 적힌 이름을 보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건네는 응원의 말은 생각보다 큰 힘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아픈 부위에 파스를 뿌려주거나 힘찬 목소리로 격려하며 나를 뒤에서 밀어주었다. 그 고마운 응원에 나도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35km 지점이 눈앞에 보였다. 연습했던 30km를 넘어서 난생처음 경험하는 거리였다. 주변엔 점점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더운 날씨와 급수 부족으로 다리에 경련이 난 채 멈춰 앉아 있는 러너들도 보였다.
그리고 결혼반지도 무겁다며 벗어버리고 싶어 진다는 ‘그 한계 거리’에 다가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초반보다 페이스가 확연히 떨어져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생각한 대회 페이스는 연습했던 거리까지만 유효하다는 것을. 얼마나 정직한가?
다행히도 다리 경련은 오지 않았다. 아마도 부상을 입은 러너들을 보며 스스로 몸을 조심했던 탓일 것이다. 그러던 중 갑자기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너무 아끼며 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38km를 지나자마자 속력을 조금 더 내기로 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처럼, 내리막길에서 다리를 굴리는 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마지막 언덕을 오를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내리막길에서는 그 힘을 받아 42.195km 중 가장 빠른 페이스로 피니시 라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디데이를 붙이며 이 순간을 꿈꿨다. 피니시 라인에 도달하는 나의 모습. 풀코스 마라톤은 내 인생에서 없을 거야, 아니면 아주 멀고 먼 미래의 일이겠지. 그렇게 스스로에게 던졌던 말들은 나를 타고 흐르는 바람에 지워졌다. 내 마음속에는 이미 피니시 라인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을 건너는 순간, 그 선을 넘고 있었다.
4시간 11분 16초. 42.195km를 완주했다. 42.195km를 mile로 환산하면 26.2 mile, 1 mile은 천 걸음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나의 수많은 걸음들이 모여 26.2마일을 완성했다. 신기하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생각보다 42.195km는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거리를 아득하게 느끼게 했던 건, 결국 내 두려움이 쌓아 올린 벽이었을 것이다.
숨을 고르며 완주 메달이 목에 걸리자 비로소 ‘마라토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그들 속으로 들어가 짐을 찾았고, 이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연습 중에도 이렇게 주저앉고 싶었던 순간들이 많았다.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해도, 힘들고 지치는 날이 분명 있었다. 쏟아지는 비와 뜨거운 해를 피해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순간들, 더 자고 싶어 눈꺼풀이 무거웠던 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러닝화에 발을 밀어 넣었다.
풀코스 마라톤의 결과는 출발선에 설 때 이미 정해진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내가 매번 신발끈을 고쳐매던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42.195km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결과는 내가 출발선에 서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긴 여정을 마친 뒤, 결국 나도 여느 마라토너들과 똑같이 주위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게 된다.
인생에 한 번쯤은, 풀코스 마라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