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모양 Dec 24. 2024

토끼는 풀만 먹는 줄 알았지

시골이야기

 어릴 적 토끼가 풀만 먹는 줄 알았다. 그 순진한 믿음이, 내 어린 날들을 풀밭으로 이끌었다.     

 초등학생 무렵, 어딘가에서 본 토끼 한 마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매일 무릎에 앉히고 쓰다듬을 '내' 토끼가 필요했다. 아버지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토끼 키우고 싶어”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된다.” 그 한마디에 며칠을 시무룩하게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버지가 말했다. “뒷마당에 가봐라.” 그곳에는 정말 토끼가 있었다.      


 직접 지었음이 분명한데도 토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토끼를 위해 풀을 뜯으러 다녔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학교에 가기 전과 다녀온 후, 주말엔 풀밭에 데려가곤 했다. 처음엔 어떤 풀을 좋아하는지 몰라 동네에 있는 모든 종류의 풀을 뜯어갔고, 남아있는 풀이 취향을 말해주었다. 토끼가 좋아하는 민들레와 애기똥풀 같은 여리고 즙이 많은 풀을 한가득 가져가면, 깡충깡충 뛰어나와 콧잔등을 들썩이며 풀잎을 오물오물 먹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해낸 기분이 들었다.  

    

 봄과 여름엔 토끼가 좋아하는 풀이 많아 집 주변에서만 뜯어도 충분했지만, 가을에는 마을 한 바퀴를 돌아야 양이 찼고, 겨울에는 토끼가 별로 좋아하지 풀도 섞어야 했다. 추운 겨울, 얼어붙은 손끝으로 풀을 뜯으면서도, 토끼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떠올리며 행복했다. 그러나 토끼가 풀만 먹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건 대학에 와서였다.     


 친구가 길에 버려진 토끼를 데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토끼를 보러 가려는데 ‘풀을 뜯어가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친구가 마트에서 사료를 샀다고 했다. 그 순간, 멍해졌다. 토끼가 사료를 먹는다고? 매일 아침 풀밭을 헤매고, 얼어붙은 손으로 풀을 뜯으며 등교를 서둘러야 했었다. 아버지는 분명 사료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텐데, 나를 풀밭에 보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도대체 뭘까? 사료가 있었다면 토끼는 겨울에도 잘 먹고 살이 포동포동하게 올라서 덜 추웠을 텐데!      


 그때는 몰랐다. 직접 뜯어온 풀을 오물오물 먹던 토끼의 모습이 사실은 나에게 더 큰 행복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길을 지나다가 민들레와 애기똥풀이 눈에 들어오면 동네를 두 바퀴씩 돌던 날들이 떠오른다. 토끼의 이름과 모습은 희미해졌지만, 그 풀들은 여전히 나를 풀밭에서 토끼를 위해 풀을 뜯었던 시절로 데려간다. 기억 속에서 토끼는 여전히 풀을 오물오물 먹으며 내 곁에 행복하게 남아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