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말
어렸을 때, "나는 절대 저런 말 안 해야지!"라고 다짐했던 말들이 있다. 그것은 “요즘 애들은 말이야~”, “그냥 건강이 최고야”같은 말들이다. 그때는 그런 말을 하면 왠지 나이 들어 보이고, 잔소리꾼 같고, 심지어 꼰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말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 내가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구나…”라는 자각과 함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전엔 어른들이 이런 말을 하면 속으로 “또 잔소리 시작이네…”라고 생각하곤 했다. “요즘 애들은 참 버릇이 없어!”, “우리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 때는 다르고, 지금은 지금이지!’라고 반박하고 싶었고, 내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절대 저런 말 안 해야지 다짐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말을 하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스마트폰만 바라보며 걷는 아이들을 보면서 염려되는 마음이 들면서도 “요즘 애들은 세상이 편해져서 그런가?”라는 혼잣말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학창 시절 공부하느라 바빴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세상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우리는 학교 끝나면 친구들하고 숙제도 하고, 밖에서 뛰어놀기도 했는데… 요즘 애들은 스마트폰이 친구네?”같은 생각이 든다.
이 생각을 하면서도, 어릴 때 나 역시 비슷한 말을 듣고 “어른들은 왜 맨날 우리 세대와 비교하는 걸까?”라고 투덜거렸던 기억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세대가 달라지면 생활방식도 당연히 바뀔 수밖에 없는 건데, 나도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비교했던 것이다. 역시 중년이 되면 “요즘 애들은…”이라는 말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보다라며 합리화를 해 본다.
예전엔 “밥 먹을 때 TV 좀 그만 봐!”, “새벽까지 깨 있으면 몸 망가져!”, “건강이 최고야!” 같은 부모님의 말들이 잔소리로만 들렸다. 특히 “건강이 최고다”라는 말에 그때는 ‘건강은 당연한 거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말이 얼마나 절절한 의미인지 안다.
어느 날 지인과 대화 중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이제는 건강이 최고더라. 돈이 많아도 건강하지 않으면 다 소용없어."
순간, ‘어라? 이거 우리 엄마가 맨날 하던 말인데?’라는 생각에 그때 일상이 떠올랐다. 20대, 30대 때는 밤새워 놀아도 다음 날 멀쩡했는데, 이제는 늦게까지 깨어 있으면 몸이 바로 반응한다. 피곤한 날이면 건강이 최고라던 잊혔던 부모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어릴 때는 왜 몰랐을까?
젊었을 때는 ‘이건 옳고, 저건 틀렸어!’라며 확실한 기준이 있었다. 그래서 ‘좋은 게 좋다’는 말이 참 싫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생각이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타협이 필요할 때도 있고, 사람마다 입장이 다를 수도 있으며, 인생은 흑백논리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점점 실감하게 되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너무 유하게 사는 것 같아 답답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였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요즘 청년들은 세상을 빠르게 이해하는 것 같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답이 하나가 아니다’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흑백논리보다는 유연한 사고로 문제를 바라본다. 예전에는 나이를 먹어야만 터득할 수 있었던 삶의 지혜를, 이들은 책과 영상, 정보 공유를 통해 미리 체득하는 듯하다. 물론 경험에서 오는 깊이는 다를 수 있지만,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때로는 그 유연함이 지나쳐 보일 때도 있지만, 결국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정답이 없다는 걸 일찍 깨닫는 점이 신기하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이가 들면서 “요즘 애들은~”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고 해서 세대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을 하는 순간,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걸 실감한다. 예전에는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서 했던 말들이 이제는 삶의 깊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고, 흉내 내고 싶었던 ‘어른스러움’이 이제는 몸에 배어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런 말들을 할수록 나이를 먹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단순히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예전에는 몰랐던 부모님의 마음과 지나온 순간들의 의미가 깊이 다가온다.
이 순간, 어쩌면 ‘나도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라며 자각할 줄 아는 이것이야말로 성숙기의 통찰과 여유가 아닐까? 젊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삶의 지혜를 이제는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 그 자체가 성숙기가 주는 멋진 선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