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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특정다수의 결혼식

제 2장. 남자

by 파고 Sep 09. 2024

   

  제 2장. 남자


  

 아까부터 속이 울렁거린다. 자꾸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나는 데다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눈앞도 부옇다. 아침을 먹지 말았어야 했나, 점점 더 조여오는 벨트 때문에 배가 불편해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어진다. 집중할 수가 없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다시 떠봐도 여기저기 하얗게 눈이 부시고 온통 환한 조명으로 가득해 앞을 제대로 보기조차 힘들다.


 “신랑님, 어떠세요? 너무 예쁘죠? 신부님 어깨선이 워낙 여성스러워서, 이 디자인이 딱이에요. 이 드레스가 지금 저희 샾 베스트라 항상 예약 풀인데, 마침 타이밍도 진짜 좋으셨어요-. 이걸로 하시려면 빨리 결정하셔야 돼요. 금방 대기로 밀려날 수 있거든요.”

 땀의 양이 점점 더 늘어난다. 나한테 결정하라는 건가? 저 말들의 신빙성이 좀 의심스럽지만, 진짜든 아니든 지금 이 상황에서는 말조심하는 게 상책인 듯하다. 그건 방금 신부님이라 불린 내 여친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너무 하얀 드레스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이 벌겋게 불타오르는 중이다. 자꾸 나랑 눈도 안 마주치는 게,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수줍은 연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수줍어서 저러는 거라면 깜짝 놀랄 일이고. 뭐라도 수줍어할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냥 본인이 제 입으로 좋다 싫다 말을 하면 좋을 텐데, 왜 내가 입을 것도 아닌데 다들 내 입을 쳐다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옷을 입은 사람은 얼굴만 불타오르고, 옷을 입힌 사람과 그 나머지 여자들이 모두 내 입만 쳐다보고 있으니 점점 더 화장실에 가고 싶어진다. 고민이 깊어진다. 이번이 다섯 번째였으니, 지금쯤이면 넋이 빠진 표정으로 유레카! 를 외쳐도 괜찮은 걸까? 사실, 저 드레스 실장은 세 번째쯤부터 이미 나를 무능하고 답답한 인간으로 보고 있었음을 잘 안다. 결정도 못 하는 소심한 인간, 외모 비하까지 연결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내 자존감을 위해 거기까지만 상상하도록 한다.

그래, 다섯 번째면 꽤 적정선이다. 웨딩드레스샾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미리 다 검색해보고 왔으니 망정이지, 사전정보가 없었다면 첫 번째에서 눈치 없이 오버했다가 평생 욕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와아…. 여태까지 입어본 것 중에, 이 드레스가 제일 예쁘네요.”

 어, 이게 아니었나. 여친 얼굴이 이제는 활활 불타오른다. 아차.. 드레스가 아니라 입은 사람이.. 예쁘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렇죠? 너무 잘 고르셨어요-. 신랑님 안목이 대단하신데요?”

  제가.. 그랬나요.

 “그래, 이게 제일 옷이 귀티난다, 비싸 보이고.”

 장모님까지.. 옷 얘기만 하시면 어쩝니까, 지금.

 “신부님-. 진짜 잘 고르신 거예요. 식 일주일 전에 정확히 피팅 다시 진행될 거니까, 오늘은 일단 대략적인 사이즈만 보시고….” 물 만난 고기처럼 끝없이 말이 이어진다.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여자들은. 훗날 지구에 위기가 닥쳐도 끝에 살아남는 건 분명 여자일 거다.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은, 이것저것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지금 이 순간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세상은 남자들이 큰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그냥 크게 말하는 것뿐인 것 같다. 우리 집만 해도 그랬다. 덩치도 목소리도 다 컸던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목청은 잘도 높였지만 정작 최종 결정이나 그에 대한 실행력은 덩치도 목소리도 훨씬 작은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아버지는 평생 본인이 우리 집을 혼자 책임진 집안의 기둥 뭐 그런 거로 굳게 믿고 돌아가셨지만, 나나 내 동생이나 친척들이나 옆집 세탁소 아주머니까지도 다 안다. 우리 집안이 누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누가 진짜 기둥이었는지. 

하긴, 진실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각자 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그만인 것을.


 아무튼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난 절대로 저렇게 혼자 자기기만에 빠져 인생의 덫에 걸려들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연골이 다 닳을 때까지 기계처럼 일하고, 무슨 일만 생기면 앞장서 해결하려 들고, 어딜 가나 우렁찬 목소리와 앞에 나서는 성격으로 힘든 일을 도맡으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그런 데서 이상한 인생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 자기 실속은 전혀 못 차리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혼자만의 책임감으로 무장해 평생 손해만 보고 살았던 바보가 되지는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남자다운 거, 희생하는 거, 참 좋아했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답게 살려고 애쓰지 말고, 나답게 살려고 노력하자, 라는 멋진 좌우명을 만들어 가슴에 품고 살았다. 나는 나답게, 적어도 아버지와는 다르게 살 거니까.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하고, 오직 나만을 위해 채워나가는, 남이 아니라 내가 가장 소중한 그런 삶이 될 것이다. 이기적이라고?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남한테 잘 보일 생각 자체가 없는데. 나한테만 잘하고, 나한테만 잘 보이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으로 사십 년 넘게 살았다.


 그런 내 기준에서 봤을 때, 결혼이라는 건 엄청난 손해이자 몹시 불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 우리 아버지가 평생을 바보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살았던 착각의 시작점이 바로, 그 결혼이 아니던가. 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나는 왜 지금 이곳에 앉아 화장실도 참아가며 설렁탕 육수에 견줄만한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것인가.


 저기 저 신부님을 만난 것부터가 실수였을까. 아니면 괜히 주변에서 조언이랍시고 떠드는 말들에 혼자 조바심내다가 사귄 지 2년 만에 프러포즈라는 걸 해버린 내가 등신인 걸까. 뭐가 그리 급했을까. 서른아홉에는 싱글이 괜찮고, 마흔둘에는 인생 망한 건가. 불과 2~3년 사이에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 버리기라도 했던 걸까. 모르겠다, 정말로. 그때 내가 왜 그랬던 건지.


 다만 확실한 한 가지는, 이놈의 머리숱이 한 몫 단단히 했다는 사실이다. 파릇한 이십대에도 여자들에게 인기라는 걸 얻어본 적이 없는, 아니 인기까지 갈 것도 없이 시선 한번 제대로 받아본 적도 없는 나는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머리숱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냥 줄어드는 게 아니라, 남들보다 몇 배속 빠르게 돌리는 것처럼 거의 광탈 수준으로. 그런데 그 광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난데없이 내 자존감을 잘근잘근 씹어먹더니 마침내 사십여 년을 나와 함께 한 대전제까지 건드리고 말았다. 뭔가 다 망했다는 기분, 뭐든 지금보다 나빠질 것만 같은 정체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두려웠다. 이러다 남들보다 나은 삶이 아니라, 남들 다 하는 것도 못 하고 늙어가며 못난 자괴감에 허우적댈까 봐 겁이 났다. 그런 상상의 장면들에는 늘 머리숱이 다 빠져 두피가 반짝이는 내 모습이 있었다. 내가 나만의 삶을 살 수 있는 자격, 당연히 나에게 있다고 믿었던 그것이 내 외모 가치가 하락하면서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다니. 얼마나 나약하고 허무한가, 내 삶의 줏대라는 것이.


 자꾸만 곱씹어봐야 우울해지는 오랜 내적 갈등과 혼란의 소용돌이, 그 결과물로 인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다. 이제는 달리 어쩔 수가 없다. 도인지 모인지 계속 따져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고, 있던 일이 없던 일로 되지도 않으니까. 절로 한숨이 푹, 새어나온다. 그 소리를 내 귀로 듣는데 문득, 마지막 생각의 끝이 슥, 나를 향해 돌아선다.


 그런데 그.. 나 자신을 위한 삶이라는 거,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는건데? 

 늘 뭔가 확실한 게 있는것처럼 떠들면서, 뭐라도 제대로 정하거나 생각해 본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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