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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시간

반복된 분주함에 낯선 여유 찾기

by 삼삼

스스로 약속한 골든 타임을 놓쳐 버린 심정. 마감은 아니지만 하루를 넘겨 버렸다는 자책은 마음속에 계속 맴돌고 있다. 매주 정해진 요일에 스스로 족쇄를 채운 듯 자유롭지 못한 강박에 짓눌린 마음. 여러 가지를 동시에 손댐에 있어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이상적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었던 건 아닌지.


여름인 듯 아닌 듯 이른 아침 햇살, 어둑한 밤하늘에 벗이 된지 얼마 안되었는데 태양은 일찍 고개를 내밀었다. 창밖의 초록함은 어느새 회색빛 콘크리트를 뒤덮는 웅장함에 파란과 친밀감을 과시한다. 강렬한 태양은 하늘의 본래 모습을 삼키며 하얀 잔재를 내뿜는다. 분주히 움직이는 새들의 지저귐이 바쁜 하루의 휴식을 알린다.

몇 주간의 변화로 중심을 잃고 파편의 시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버렸다. 단 한가지를 잡아 내기 위해 굳건했던 익숙함의 뿌리를 통째로 뽑아냈다. 과감한 결단은 혼란의 후폭풍으로 대책 없이 뽑아낸 흉터의 잔해를 남긴다. 그 자리에 새로운 뿌리를 심는다는 건 고유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경고의 메시지와 같다. 외부의 모든 것은 나와 독립적이다. 가만히 멈춰서 있다고 외부의 움직임은 각자의 길로 나아갈 뿐이다. 뿌리라 함은 사실 뿌리가 아닌 스스로 빼내고 싶었던 부정의 찌꺼기가 아닐까.


모든 과정을 무력화시킨다. 창밖의 나무조차 변화를 받아들이며 태양과 구름에 합을 맞추는데 결핍의 욕구가 화려한 독사과를 배달하여 이상의 자유라는 환각을 전달한다. 이미 진행 중인 것들은 그저 헛발질하는 어리석음이라 한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이 죄악이라 어서 나만의 장벽을 단단하게 쌓아 올리라는 신호를 보낸다. 외부의 어떤 것도 내적 침투를 계획하지 않고 실행조차 하지 않는데 어디서 환청이 들려온다.

네모 난 공간에 갇혀 사면이 하얀 어떤 오감도 느낄 수 없다. 아무도 없는 공간, 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에 어디론가 나아갈 수는 길은 없다. 장애물, 함정조차 없는데 어디 선가 나를 공격해오는 공포가 짓누른다. 왜 이곳에 도달했는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에 갇혀 버렸는지 모른다. 제 발로 찾아 왔나 누군가에게 끌려 왔나 전혀 알 수 없다. 환청이다.

스스로 만들어 낸 네모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이다. 어느 순간 무한의 크기로 나를 감싸는 강박으로 참을 수 없는 혼란, 정리되지 않은 하루의 파편을 서둘러 묶어 두려는, 모난 직각에 긁히며 강제적 중심을 찾아내려다 감당하지 못할 크기로 성장해 버린다.

거대한 공간에 무엇이 들어갈 수 있나. 막막함에 다시 크기를 줄이려 한다면 네모는 경고의 메시지로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강박의 압축기로 나를 짓누른다. 스스로 만들어 낸 장애물, 함정이다.


그럼에도 자연은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외부와의 조화를 이뤄낸다. 감당하기 어렵다 말고 자신의 위치에서 고유의 뿌리를 뻗어낸다. 시간의 흐름은 태양과 달에 맡기며 자신의 임무에 몰두한다. 족쇄를 채우지 않는 자발적 움직임으로 오랜 시간 자연스러운 조화로움을 보인다. 자신의 고유함을 유지하며 독립된 정체성이 바뀌지 않는다.

자책이라 함은 스스로 채우지 못한 욕구의 발버둥이다. 화려함에 매료되어 반복된 과정의 지루함이 무의식 속에서 마음의 성급함을 만들어 낸 것. 네모의 크기를 키우는 건 오감의 감각을 닫는 진정한 어리석음이다. 24시간의 시간은 함께 아우르며 독립된 정체성을 가다듬는 흐름이다. 회색빛에 가려진 푸르름을 다시 찾아 나설 때. 반복의 분주함으로 여유의 여백이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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