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어릴 때부터 지조 있는 공주파였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신데렐라를 빌려와서는 연체전화가 올 때까지 밤낮으로 보고 또 보다가 억지로 반납을 하고 나면 이틀이나 사흘쯤 후에 다시 그 신데렐라를 빌려오고 또 독촉전화를 받고서야 반납을 하러 가는 일들이 서른 번 정도를 넘게 되자 어느 날 가게 주인이 내게만 한쪽 눈을 찡긋하며 아이에게 테이프가 늘어난 것 같다고 그냥 주었을 정도로 공주님이나 공주님의 눈웃음 같은 동화들을 좋아했다. 다만 어느 날인가 미카엘 두독..감독의 아빠와 딸을 보여주었을 때에는 아름다운 다뉴브강의 선율에도 불구하고 왠지 슬퍼진다며 살짝 어두운 눈빛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그 후로는 한 번도 인어공주를 읽어주지 않았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읽어주던 밤, 아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 아빠, 아빠는 꿈이 뭐야?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내 순순히 대답했다. 아빠는 좋은 아빠가 꿈이야.
피, 시시하게 그게 뭐야. 훌륭한 사람 같은 걸 말해야지.
아빠는 좋은 아빠가 되는 게 정말 꿈이고 그건 절대로 시시한 게 아니야.
그건 진심이었다.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니라 더없이 값지고 먹먹한 일이었기에 쉽사리 이룰 수 없을 거란 생각도 들었지만 먼 훗날 아이가 자라난 후에 아니 어쩌면 내가 생을 마감할 때쯤 직접 들어야만 완성되는 무엇보다 간절한 일이었다. 아이가 진학을 고민할 때는 상상보다 더 큰 꿈을 꾸라고 그래야 깨져도 조각이 크다는 개똥철학을 읊으며 여러 번 어깨를 다독였고, 대학을 졸업할 무렵 처음 지원을 한 회사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울먹이던 날에도 아빠는 더 많은 실패를 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조금 쉰다 생각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에 과감히 도전해 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때 해줄 수 있는 것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눈치를 살피는 일이었고 여느 아빠들처럼 아직 아빠가 있으니까 하는 마음이 컸었다. 디자인을 전공했던 딸아이가 목동의 한 백화점에 입사를 하고 축하파티를 하고 대여섯 달 정도 지났을 무렵의 어느 날 상냥한 전화를 걸어왔다. 퇴근하면 목동점으로 와달라는 은근히 기분 좋은 상기된 목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마쳤다. 마침 저녁약속이 있었지만 그건 매일 있는 일이고 또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퇴근시간의 연장 같은 술판에 불과했기 때문에 곧바로 미안한 척하는 양해와 내일의 한턱을 약속하고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마음이 분주했다. 일전에 딸아이를 아빠가 있는 장충동 족발집으로 불러 수십 년 전통의 고기맛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때 엄지척과 손가락 하트를 몇 번이나 해주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목동에 가면 뭔가 근사한 식탁이 준비되어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와 함께 혹시나 하는 삐까번쩍한 그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체면도 잊은 채 공터의 잡초 자라듯 키를 쑥쑥 키웠다.
아이를 만난 곳은 백화점의 식당가였는데 이끄는 대로 꽃등심 전문이라 쓰인 한정식집으로 들어가면서는 역시나 그렇군, 혼자 흐뭇했다. 막 불판에 고기를 올리려는데 갑자기 딸아이를 찾는 회사 전화가 왔고 뭔가 일이 꼬였는지 다급한 표정으로 아빠 먼저 먹고 있으라며 사무실로 뛰어갔다. 체면상 기다리던 차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며 먼저 꼭 식사를 하고 있으라는 전화가 다시 온 후에야 나는 약간의 한숨을 쉬며 고기를 치이익 굽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몇 층 아래에서 지금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르며 일을 수습하고 있을지 눈에 선해서 품질 좋은 꽃등심도 그날따라 별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에 처음 발을 디뎠던 내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그룹연수를 마치고 계열사에 배치를 받고 다시 별도의 보충수업 같은 교육을 받으면서 졸병들의 제식훈련처럼 정해진대로 생각하고 만들고 친절하게 웃으며 파는 법을 배웠다. 모든 것이 손에 익지 않았던 어리바리한 날들, 실수도 많았고 난감하고 당황스러워 이마에 진땀이 났던 옛일들, 너 자신을 너무 믿지 말라고 훈계를 하는 선배 앞에서 죄인처럼 내 생각이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숙연한 표정을 지어야 했던 젊은 날들이 밀려오고 밀려갔다. 앞으로도 아이는 세상과 인생의 냉막한 이면에 놀라기를 반복할 것이고 때로는 넋을 잃거나 울 때도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당장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저런 막연한 생각들을 하며 모래가 씹히는 듯한 고기를 반쯤 구웠을 즈음에야 아이는 돌아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눈은 조금 울었던 모습으로. 이때는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단지 배고프지 하며 꽃등심을 불판에 왕창 올려놓고 그저 웃었다. 술잔을 건배도 하며 고기 맛있네 몇 번인가 너스레를 떨기도 했던 것 같다.
딸아이는 아주 나중에야 말을 했다. 아빠가 집에 오자마자 저녁도 못 먹고 다시 회사에 불려 간 일, 어떤 날엔 일이 생겼노라 전화를 하곤 며칠이나 집에 못 들어가고 또 어떤 날엔 모두가 잠이 든 새벽시간에 전화를 받고 부스스 일어나 좀비처럼 심야택시를 타고 출근했던 일들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돼서 그게 그렇게 미안하고 속상하다고. 그때도 나는 아빠는 다 그런 거야 하며 그저 조용히 웃었다. 몇 년 전에 추억의 가수를 소환하는 슈가맨이란 방송에서 40년 만에 다시 아빠의 말씀이란 노래를 듣다가 별안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주르륵 울어버린 일이 있다. 식구들은 흔히 있는 일이라 모두가 조금쯤 울컥하다가도 이내 눈물이 쏙 들어간 듯 내 얼굴만 빤히 보기만 했던, 나도 아직 어렸을 적에 아빠의 아빠 대신 어른 같은 아저씨의 목소리로 다정한 위로를 건네주던 그 노래.
아빠, 언제 어른이 되나요. 나는 정말 꿈이 커요. 빨리 어른이 돼야지.
그래 아가 아주 큰 꿈을 가져라. 안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암 되고 말고, 넌 지금 막 시작하는 거니까. 아빠가 가는 만큼 넌 오는 거야. 그리고 기억해 다오, 너를 사랑하는 이 아빠를.
아이들은 어릴 때 부모들에게 매일 지칠 만큼 따발총 같은 질문들을 한다. 조금씩 자라면서 매일 그리고 자주는 간혹이나 이따금씩이 되고 그러다가 결국엔 아무런 질문도 없는 날이 찾아오게 된다. 지금이라면 깨져도 조각이 큰 것을 위해 큰 꿈을 가지라는 말도 도전을 포기하지 말라며 은근히 등을 밀어 가지도 않았을 텐데. 혼자 힘으로 막 달리기 시작하는 너의 자전거를 뒤에서 슬며시 놓는 것처럼 이제 아빠가 할 일은 마친 것도 같구나.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도 흘리겠지만 그렇더라도 힘에 겹고 무서울 때면 언제나 네 편인 아빠를 기억해 주기를.
나는 아이를 믿는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더 큰 일을 하리라 믿는 것이 아니라 아프기도 하면서 조금씩 천천히 진짜 어른이 되어가리란 것을 믿는다. 내가 가진 단 하나의 꿈은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좋은 아빠이고 또 언제까지나 네 옆에 있기를 바라지만, 나는 언제까지 네 옆에 있을 수 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Oo4KXZVAps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