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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모 Dec 16. 2024

군고구마는 가라



하마터면 며칠 전에 군고구마를 살 뻔했다. 고소한 냄새와는 별개로 전혀 장사가 되지 않을 것이 빤히 보이는,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골목에 숨어 두꺼운 털옷를 입은 채 무덤덤한 표정으로 군고구마를 태우고 있는 이를 보았을 때 하마터면 정말이지 군고구마를 살 뻔도 했다. 진화를 멈춘 채 명사처럼 굳어진 군고구마 전용 털모자까지 똑같이 쓰고 있는 한 남자를 보면서 아득한 기억이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떠올라 하마터면 아저씨 그 군고구마 몇 개씩 팔아요? 하고 물어볼 뻔했다. 군고구마와 깡통 리어카와 털모자.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지만 그러면서도 저 아저씨 참으로 어지간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어느 누가 사방에 인적 없는 스산한 골목길 안쪽까지 동동거리며 걸어 나무껍질 갈라지듯 속살을 내보이는 그 뜨거움을 품에 안고 돌아가겠나 싶어서 잠시 옛 생각이 났다. 옛날 얘기다. 그게 그러니까 아마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정말 오래된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다. 이제 자수를 하자면 나는 생각만 해도 추워 보이는 전직 군고구마 장수였다. 억세고 시퍼런 겨울바람이 북극 얼음마녀의 집을 들락거리던 겨울의 어느 날 미련 없이 군고구마 리어카를 처분했던 후로는 무엇이 그리도 알차게 옹이처럼 박혀 있는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겨울의 별미인 군고구마를 먹지 않고 있다. 군고구마 속에는 더불어 어정쩡하게 익어버린 미숙하기만 했던 청춘의 심로가 하나 섞여있으니.     


처음부터 군고구마 장사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전설 같은 궁상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친구 K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의 나에게는 근 십여 년을 함께 뒹굴고 까불던 삼김(三金)의 친구들이 있었다. 군고구마 동업자인 지금 말하려는 K와 치사빤쓰 얍삽 대마왕이던 K와 그리고 요즘 애기들 콧물 묻은 돈으로 먹고사는 보습학원 사장 아니 원장 K가 있었다. 오늘 말하려는 군고구마 K는 당시의 별로였던 학업 성적과는 매치가 안되지만 지금은 거룩하신 목사님이 되었다. 그 무렵에 평범한 교회 오빠였던 나는 이후로도 교회 밖에서 꾸준하고 평범하게 나이를 먹어왔지만, 군고구마 K는 안양 근처에서 지금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수많은 양떼들을 위해 애타게 기도하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있다고 한다. 그 기도들 중에 나를 위한 것도 있을까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크게 믿어지지는 않지만, 근엄하고 거룩하게 세계 평화와 길 잃은 양들을 위해 기도한다니 어쩔 수 없이 믿어야지 싶기도 하다. 땟국이 잔뜩 묻어있는 내게는 거리를 나서봐도 당최 순한 양들은 보이지 않고 양아치만 더러 보이지만, 아무튼.


학력고사를 마치고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별반 할 일이 없었던 고등학교 3학년의 동장군 출정식 근처였다. 그 친구 K네 집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은 꾸준하게 계속 형편이 좋지 않던 시절이었고, 날마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빈둥거리기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참신하고 의젓하고 생산적인 사건을 벌이고자 궁리하던 차에 기껏 생각한 것이 바로 밤에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는 찹쌀떡 장사였다. 잘만 되면 궁핍하던 집구석에, 무엇보다 각자의 어머니에게 도움이 될 거란 막연한 기대로 그런 생각을 해낸 것이다. K와 나는 같은 교회에 다녔었고 그때 우리 별명이 그 연탄 딥따 깬다는 홍제동 부지깽이였다. 매일 붙어 다니면서 공부는 안 하고 사고만 친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처음 마음을 다잡고는 둘이서 주머니를 홀랑 털어 거금 육천 원으로 사업자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당시 독립문이 서있던 공원 인근의 서대문 재래시장 골목이었다. 거기 시장 떡집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하고는 열 개가 들어 있는 찹쌀떡 한 판을 삼백 원씩에 거래하기로 했고 우리는 그날 밤 바로 사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고 폼을 잡으니 도무지 생각보다 너무 낯설고 민망해서 동네방네 소리를 지르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둘이서 외진 아파트 입구에 한 시간 여를 기웃거리다 하는 수 없이 가위바위보를 하고 지는 놈이 찹쌀떠억 소리를 지르기로 했다. 물론 이기는 사람은 수줍은 레옹처럼 가방을 메고 조용히 따라가는 것으로 정했다.


처음이 어려웠고 나중에는 재미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남들은 다 찹싸알떠억, 외친 후에 연이어 메밀무욱,을 바리톤처럼 찰지게 뽑는데 우리는 팔 수 있는 게 한 가지뿐이라 일편단심 찹쌀떡만 외칠 뿐이었다. 장사는 정말 상상이하로 안 됐는데 하룻밤을 그리 쏘다니며 다리품을 팔았어도 고작 세 판을 팔았을 뿐이었다. 남은 것은 열 일곱 판. 다음날 우리는 학교에서 머리를 맞대고 경영혁신을 위한 비상전략회의를 했고 그다음부터는 그냥 눈 감고 잠을 자는 것처럼 쉬웠다. 성공의 필승 전략은 바로 교회 집사님들이 모여서 구역예배를 드리는 집과 시간을 입수하고는 마치 우연처럼 방문하고 공략하는 것이었다. 그전에도 우리가 가끔 이런저런 이유로 찾아가 밥을 축낸 적도 있고 친분이 있기도 해서인지 한 집에 가면 보통 네 판이나 다섯 판이 팔렸다. 세상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쯤 처량한 눈빛으로 찹쌀떡 장사를 하게 된 사정을 늘어놓으면 사랑이 많으신 아주머니들이 마지못해 한 판씩 사 주셨는데 한 판에 천 원 받고 팔았다. 수준 이하의 악질이었다. 한 판을 팔면 두 판을 거저 줘도 백 원이 남는 데 말이다. 미안한 마음이 생기려 하면 우리들은 결연한 눈빛으로 서로를 다그쳐가며 약해지는 의지를 되잡았다. 절대로 착해져서는 안 돼. 국물도 없었다. 다만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여 차려주는 더운밥도 내어놓은 간식도 맛나게 먹어 드렸을 뿐. 그렇게 우리는 단기간에 떼돈을 벌었다. 구역예배 오신 집사님들 등을 쳤던 것이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이제 목사님이 된 K는 체면도 있으니 빼놓더라도 평범하고 적당히 타락한 사람이 홀로라도 사과를 드리고 싶다.

     

한 달이 지나자 우리는 마치 우리가 잘나서 돈을 번 것처럼 없던 용기가 마구 샘솟고 자신감이 무럭무럭 담을 넘었다. 결국에는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염치없는 복권당첨의 꿈을 꾸듯 더 큰물에서 놀아보자며 업종변경을 심각하게 논의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그 큰물의 시작을 군고구마로 결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마침 젊은 사내아이들에게 군고구마 장사가 열풍처럼 번져가던 시기였기도 했기 때문이다. 신성처럼 나타날 제2의 이병철이나 정주영을 꿈꾸며 대장정에 나서는 기념으로 마지막 남은 찹쌀떡 한 판은 K와 내가 멋지게 먹어 치우기로 했는데 사이좋게 다섯 개씩 나누어 먹기로 하고 입을 쩍 벌려 하나를 통째로 넣는 순간부터 모래 같은 게 자꾸 씹히는 느낌이어서 삼키느라 엄청 고생을 했다. 다섯 개를 다 먹을 때쯤에는 입안이 다 허는 것만 같았다. 아, 이런 지상 최악의 찹쌀떡을 우리가 팔고 다녔다니 싶은 마음에 양심이 간지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권사님, 집사님들께는 다시 한번 송구하다. 그러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그건 우리를 위한 말이었다. 그렇게 파렴치하게 모은 돈 십오만 원을 선뜻 꺼내서 보기에도 사업이 한껏 번창할 것 같은 커다랗고 윤기가 나는 군고구마용 리어카를 세트로 구입했다. 물론 폼나는 새것으로.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호박고구마의 포르르한 맛을 구경도 못했기에 물고구마보다 더 맛났던 밤고구마 한 박스를 시장에서 오천 원에 구입한 후에 장작을 준비하고는 포부도 당당하게 벅찬 마음을 씩씩대며 거리로 나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자리를 선점하는 것임을 그 목사 아니 K와 나는 이미 알고 있었고 처음부터 보아둔 자리가 있었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그 친구 K가 미리 보아 두었다던 대박 터질 자리에는 해도 지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까만 가죽잠바를 입은 분위기 만점의 형들이 서넛이나 모여 불을 지피느라 아주 고생들을 하고 계셨다. 상황판단을 하고 있는 우리를 보고는 한 덩치가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봤다. 그 눈빛은 마치 너그들 시방 여그서 무신 고구마 장시를 할라고라? 하는 것 같았고 그때부터 거룩한 척했던 K가 말리기도 했지만 나는 끝내 그냥 돌아서기엔 억울해서 한 마디를 남겼다. 수고하시네요. 우리는 저쪽 안 보이는데서 하려고요. 그럼 많이 파셔요. 결국 후미진 곳으로 리어카를 바쁘게 옮겨 놓은 후에는 '기껏 봐두었던 명당이 저런 곳이냐' 따지던 나와 '쪽팔리게 그런 말은 뭐하러 하냐'던 거룩한 친구는 역시 말로 해선 안될 것 같다며 깔끔하게 서로 한 대씩 주고 받았다. 설마 지금도 길 잃은 양떼를 위해 기도를 하다가 답답하다고 주먹이 움찔거리지는 않으리라 믿지만, 그날은 어쨌든 자리를 찾기 위해 온 동네를 헤맨 것도 같다. 여기를 가도 이미 임자가 있었고 저기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링에 올라가기도 전에 몸 풀다 힘이 빠진 우리는 그날 정말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밤늦도록 고구마를 가장 맛있게 굽는 이치에 도달해 갔다. 첫날부터 엄청 팔리면 그것도 좀 그렇잖아 서로 키득대면서 부산스럽게 한 박스를 다 구워가며 마침내 기술자가 될 무렵이 되자 곧장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짐을 정리를 하던 중에 기적처럼 한 봉지를 팔았는데 우리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고마워서 두 봉지를 덤으로 싸주고 말았다. 그것도 싫다는데 억지로 떠 안기며.


그날 팔다 남은 군고구마를  K와 나는 반씩 나누어 양손에 한 아름씩 들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식구들이 아주 좋아했다. 별미의 간식이니까. 너무 맛있다며 몇 봉지가 금방 없어졌는데 동생들은 내일 또 가져왔으면 좋겠다면서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예전에 아버지가 사들고 온 군고구마를 온 식구가 모여 앉아 먹다가 울음바다가 된 기억은 덕분에 잊을 수 있었다. 동생들의 순수한 염원에 하늘이 답이라도 했던 것일까.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랬다. 팔려고 구워 놓았던 군고구마를 할 수 없이 양손 가득히 들고 들어가는 일이 연일 이어졌다. 머피의 법칙은 그때도 있었으니 언제나 우리가 자리 잡는 길목엔 사람들이 다니지 않거나, 겨울인데 비가 좍좍 오거나, 결단코 하나도 춥지 않은 날들이 줄을 이었다. 운 좋게 좋은 길목을 잡으면 파출소 아저씨들이 안 다니던 순찰을 돌면서 잡상인은 가라며 호루라기만 작렬했다. 어느 날인가는 밤 열두 시가 다 되도록 여전히 개시도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같은 교회에 다니시는, 전에 찹쌀떡을 사주신 집사님 한 분이 지나가길래 눈물 나게 반가워서 속죄하는 기분으로 두 팔 가득 들려 보낸 적도 있었고, 어떤 날에는 백 원어치만 팔 수 없냐고 물어오던 할아버지에게는 그냥 있는 거 다 싸드린 적도 있었다. 물론 그 지경이 되기까지 K와 우리 집 식구들은 이미 군고구마의 '군'자도 듣기가 싫을 정도가 되었고 동생들마저 나중에는 냄새만 맡아도 죽겠다며 뺑덕어미처럼 쏘아봤다. 마침내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을 그때 알았다. 집에서도 못 먹으면 이 많은 군고구마들은 이제 어쩌란 말인가 싶은 마음에 친구와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찹쌀떡으로 번 돈 씨커멓게 구워 먹은 것은 둘째치고 군고구마 장사를 한다는 놈들이 꼬박꼬박 집에서 하루에 오천 원씩 타다가 시원하게 구워 버리고 있으니 체면도 체면이지만 더 망가지 전에 리어카라도 팔자는 현실적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거였다. 죄받은 거다. 그 모래 같은 찹쌀떡 오지게 팔아먹고 그렇게 봄이 오기도 전에 쫄딱 망해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끼니도 거른 채 장사를 접던 날에도 군고구마는 여전히 내 품에 들려있었고 동생들이 잠들어 있는 방안 구석에 앉아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고구마를 천천히 하나씩 입으로 가져갔다. 처음 마주하는 실패에는 괜찮았다. 굽다가 날려버린 돈도 상관없었다. 다만 어렸던 자의식이 그 오해 같은 것이 깨지는 것은 입안 가득 군고구마를 물고는 제법 목이 메어서 눈물이 났다. 작은 마음에도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아서 그 밤에 찔끔거리며 생각하기를 어쩌면 우리는 군고구마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준비가 됐다고 해서 다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며 어떤 것은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 말이다. K와 나, 우리에겐 현저히 위대한 아픔과 상처가 있다고 여기며 남들의 상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청춘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모양과 깊이의 상처를 싸매기 위해 겉도 속도 까맣게 타들어 간다는 사실을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기란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생각해 보면 군고구마를 팔던 그 몇 달의 태움을 통해 세상을 인정하고 용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를 용서하였고 어머니를 결박에서 풀어드리기로 했으며 동생들을 생각했다. 어디 못 배운 놈이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말을 하느냐 누군가 삿대질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상관없었다. 누구의 마음속에든 나이와 상관없이 응어리진 애증과 상처는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가 가진 띨띨한 고집 중 하나 바로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을 통해서만이 치유될 수 있고 회복될 수 있다는 근본 없는 믿음이다. 물론 교회적 측면에서는 어림반푼어치도 없겠지만. 그리고 그 겨울이 하나의 흉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말하고 싶다. 군고구마가 어떻게 오해와 아픔을 이기는 단맛을 가졌는지, 또 어떤 약효를 발휘했는지. 그리고 그때는 정말 어려서 몰랐다. 그 겨울 이후 내가 얼마나 더 큰 빙하와도 같은 한기 속을 건너가야 하는지, 또 어떤 맵고도 고약한 삶의 가시덤불 속을 무수히 걸어가야 는지 까마득히 몰랐다.


갑자기 이야기가 어스름 초저녁이 되었다. 뭐,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튼 나는 실패한 전직 군고구마 장수였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사 먹지 않는다는 쓸쓸하고 찬란한 도깨비적 궁상만이 남았다. 훌륭하신 목사님 K는 지금 잘 만나지지도 않고 연락도 쉽지 않다. 그 시절의 친구들과 몇 번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나오기까지는 영 짬이 안 나는지 얼굴을 본 지도 오래되었다. 나처럼 세상의 땟국에 매일 목욕을 하는 친구는 아마도 그 시절에 국한된 장단이 잘 맞던 부지깽이 한쪽이 아니었나도 싶고 가시가 박힐게 뻔한 아픈 면류관이나 세상의 속임수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을 때면 조금은 쓸쓸할 때도 있지만 분명히 내 생각보다는 더 이유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따금씩은 그런 생각과는 또 상관없이 보습학원에서 애들 코 묻은 돈 챙기는 또 다른 K원장과 소주를 일잔 나누며 K목사 흉을 보기도 한다. 오늘도 길 잃은 양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목사님 뒷담화 때문에 보습학원 K와 나는 죽더라도 다시 죽어라 두들겨 맞을지도 모르지만 흉이라도 보며 잠시 그 친구 생각을 하는 것이다. 군고구마를 먹지 않는 이유를 길게도 썼다. 그럼에도 하마터면 며칠 전에 그 까슬까슬한 것을 사 먹을 뻔도 했지만, 가끔은 탄내 달콤한 군고구마 냄새가 은근히 좋기도 하지만, 마음은 어쩐 일인지 아직 도리질이다. 어느 날인가는 나도 모르게 문득 뜨거운 무엇을 품에 안고 걸어가는 날이 있지 을까.


이제 새까맣게 타기만 했던 그 겨울의 군고구마는 가라.

빙하처럼 차가웠던 어리숙한 날들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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