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이 꼬불꼬불한 이름이 가지고 있는 어떤 향수를 기억한다. 동치미나 청국장처럼 시원하지도 않고 구수하지도 않지만, 그보다는 생각만 해도 익숙하고 저렴한 분말수프의 화학조미료 냄새부터 확 번져오는 이름이지만 라면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서정을 잊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60년대 초반 동족의 배고픈 삶을 바라보던 한 기업인이 일본으로부터 굽신거리며 배워왔다던 라면 제조법, 이후로 시절이 흐르면서 낯설고 생소했던 라면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어 거듭나길 반복하며 어느덧 서민들의 가장 만만한 한 끼가 되었다. 비록 그것이 어쩌면 통 큰 장사꾼의 이해타산이나 심도 있는 주판셈법의 결과였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오늘 라면의 맛과 추억만을 생각한다.
라면은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양은냄비에 끓여 먹어야 제맛이다. 낮에 먹어도 좋고 몸매에 관대한 편이라면 밤에 먹어도 낭만이 있다. 냄비는 예전의 막거리 주전자가 그랬듯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연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주둥이나 옆구리 어디 몇 군데쯤 찌그러진 모양이 좋다. 여기저기 그슬리고 탄 자국이 남아있으면 더 좋고, 손잡이의 리벳 이음이 조금 헐거워져 냄비를 옮길 때 약간은 아슬아슬하게 살금살금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게 하면 더욱 좋다. 더운 한 끼를 그렇게 연애를 하듯 정성을 다해 조심스레 옮기는 와중에 느끼는 오늘치 더운 식량의 애틋함이 살가운 이유다. 익은 김치 하나만 있어도 잠시 세상 부러울 게 없어 좋지만 잘 익은 파김치라든지 총각김치 같은 것이 혹시 더 있다면 그 이상 좋을 수가 없다. 라면 하나로 조금 서운할 때 마침 여벌로 더운밥이 남아있으면 더욱 좋고 찬밥이어도 같은 이유로 매우 좋다. 분식집처럼 김밥과 곁들이면 배로 행복해질 것이고 빵과 같이 먹어도 이상하게 어울려서 좋다. 라면이 끓어갈 때 계란을 꺼내고 파를 송송 썰어두는 마음은 서둘러 포만감을 미리 상상하게도 하지만 그것들이 굳이 없더라도 라면봉지 안에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깔끔하고 얼얼한 감칠맛이 보장되어 좋기만 하다. 작은 식탁은 개다리소반이나 양은소반이면 더할 나위가 없다. 잘 익은 라면을 옮기면 나면 냄비 뚜껑을 잊어서는 안 된다. 냄비 뚜껑에 한두 젓가락을 옮기고 나서 호호 불어가며 한입씩 호로록거리는 혼자만의 만찬은 부잣집 잔칫상에 못지않을 때가 있으니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른 심정이다.
어린 시절 자장면 다음으로 가장 맛있었던 완전한 한 그릇. 그러나 자장면보다 가깝고 편리하고 뚝딱 만들어지던 마법 같은 식사. 부엌에서 김질 나게 냄새만 풍기며 끓어가고 있을 때 다리가 세 개인 양은밥상부터 펴고 참새처럼 둘러앉아 침이 고이는 입 안에 빈 젓가락만 넣은 채 조바심이 나게 했던 성찬의 이름. 당시 라면 한 봉지의 값이 그리 비싸지는 않았겠지만 없는 형편에 아버지 월급날쯤은 되어야 온전한 라면만 넣고 끓여 먹을 수 있었던, 전혀 딴 세상의 기묘한 감칠맛. 아는 맛이 무섭다는 걸 어린 입맛에게 처음 알게 해 준 그런 라면이 어릴 때는 자주 슬픈 맛을 내기도 했다. 그 옛날 어머니가 끓이던 라면에 항상 들어갔던 국수 다발을 생각한다. 아버지의 월급이 인천 항구에 배 들어오듯 하는 것도 아니라서 평소에는 라면이 먹고 싶어유 사나흘쯤 짠한 노래를 불러야 간신히 구경을 할 수가 있었는데, 그것도 물을 잔뜩 넣은 양은솥에 라면 하나를 넣고 국수 한 다발을 풀어 양을 늘리고 간장으로 색을 맞춘 다음 소금을 뿌려 싱거웠던 간을 억지로 잡은, 거기에 김치도 종종 썰어 들어간 덕분에 라면 수프 맛은 거의 느끼기도 어려웠던 정체불명의 국수라면은 아직도 아련한 유년의 기억이다. 동생들의 배짱 좋은 투정에 동참하고도 싶었지만 어머니를 헤아리느라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밀가루 냄새가 진동하던 푹 퍼진 국수라면을 먹으며 생각하기를, 두고 보자 어른이 되면 매일 삼시 세끼를 진짜 라면만 넣고 끓여서는 배 터지게 혼자만 먹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을 했다. 이제 집에서 라면을 끓이는 일이란 두 번 생각할 이유가 없는 일이 되었고 취향에 따라서는 별의별 호사스러운 재료까지 넣어 조리를 하지만 라면 맛의 본질이자 시발점, 그리운 허기는 쉽게 희석되지 않는다.
일전에 또 위풍당당한 음주의 불금을 보내고 속이 쓰린 다음날 아침에 한동안 먹지 않던 라면을 얼큰하게 끓이면 속이 좀 풀릴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는데, 이게 참 묘한 것이 생각이 안 났으면 모를까 한번 생각을 하니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기왕이면 푸짐하게 먹어볼 욕심에 준비한 것이 친한 셰프에게 레시피를 배워두었던 해물해장라면이었다. 분명히 라면인데 분말수프는 버리고 전복이며 새우며 꽃게 넓적다리까지 잔뜩 넣어 직접 배운 양념으로 맛을 낸 그것을 혼자 끓이고 천천히 맛을 본다. 확실히 얼큰하고 비릿한 짬뽕을 닮은 색 다른 맛이었는데 입안을 데지 않으려고 살살 불어 가면서 먹는 해물라면은 매워서인지 숙취 때문인지 땀도 꽤 흘렸던 것 같다. 아침 댓바람부터 입안에 얼얼해지는 속풀이를 하다가 뜬금없이 이상하게도 그 옛날의 국수라면이 생각나고 말았다. 며칠간 라면 노래를 하고 나서야 만날 수 있었던,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실망만 잔뜩 들어있던 어머니의 뜨거운 밀가루적 사랑. 어린 마음에 뭉쳐있던 것들을 미안한 표정으로 달래주던 따듯하고 이상하고 신비하기까지 했던 순한 속풀이 한입. 한 젓가락 떠먹을 때마다 입을 쩍 벌리고 아뜨를 해가면서도 다시 숟가락 젓가락을 부지런히 놀려 한입이라도 더 먹으려고 애를 쓰던 그리운 허기. 허름했지만 아득하고 쏙 들어간 어린 배가 이상하게 불러오던, 그것을 먹고 동네방네 늠름하게 뛰어다니고 나름 슬기롭게 자랄 수 있도록 힘을 주던 가난한 끼니를 기억하자 값비싼 재료가 듬뿍 들어간 고급진 라면의 빨간 맛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음식은 레시피가 아닌 그리운 기억을 넣어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라면도 진화를 했고 지금 컵라면이라 부르는 용기라면 또한 색다른 뜨거움을 만들어내는 알라딘의 램프 같다. 무언가 허전하고 출출할 때 시간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먼저 불러다 앉히는 신기한 깡통. 입맛대로 눈 맛대로 만들어져 뜨거운 물만 부으면 뚝딱 완성되는 하나의 식탁. 취기가 은근히 가시지 않은 귀갓길에서도 좋고, 늦은 밤 집에서 영화를 보다가 가벼운 허기가 들 때도 좋다. 봉지라면이 끓어가던 노란 양은냄비와 더불어 접시 대용으로 쓰던 냄비 뚜껑과 석유곤로 같은 회억들을 가지고 있다면 컵라면은 이제 머리를 직접 맞대고 입김을 나누는, 손만 내밀면 닿을 것 같은 우리 시대의 아니 아이들 시대까지 아우르는 취향 저격 같은 살가운 스킨십 같다. 더운물을 부은 용기로부터 두 손에 전이되는 온기는 마치 위로의 손길 같기도 하다. 뚜껑을 열기 전까지 나무젓가락 틈 사이로 열기를 가두고 뜸 들이며 바라보는 눈빛, 그 무언의 애피타이저 같은 시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긋한 면발과 절절한 국물에 숨어있는 뜨거움이 목을 타고 넘을 때의 아득함은, 또 익은 김치를 맛나게 먹다가 젓가락이 서로 움찔 부딪치는 즐거움을, 그 간결한 식탁이 주는 단정한 마음들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밀가루와 나트륨과 칼슘과 화학조미료가 뒤섞인 정체불명의 복합 화합물이 아니라 그 배합 뒤에 새로운 유기 작용을 이루며 숨어있는 그리움 같은 것들에의 기억과 포만감을 말이다. 시원한 김치 한 종지를 뚝딱 사라지게 만드는 적극적인 대시, 인스턴트의 위악적 한계를 뛰어넘는 작은 식도락이자 사랑처럼 설레고 보고 싶어 몸이 더워지는 라면에 숨은 신비한 마력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온 집안에 진동하던 그 푹 퍼진 밀가루적 사랑의 순한 국수라면 맛이 궁금하다면, 그리고 마침 속이 허하다면, 얼른 들어와 라면 한 그릇 먹고 갈래요?
요즘 제정신 못 차리는 사람들 때문에 밥맛도 떨어졌는데 기왕이면 불러다 한 사발 먹이고 싶다. 물론 겸상을 하자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먹고 나서 거짓말처럼 슬기롭거나 늠름해질 것을 기대하는 건 더욱 아니지만, 혹시 속이 허해 그런가 눈도 때꾼한게 측은해서 불어 터진 라면이라도 멕인 다음 내쫒아도 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