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시유 Oct 08. 2024

빨리빨리를 외치던 여행자

 여행을 가면, 여행의 목적이 다음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 전부인 것 마냥 늘 '빨리빨리'를 외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면 SNS에 올릴 사진 몇 장만 빠르게 찍고는 또다시 나의 신경은 온통 다음 장소에만 쏠려있었다.


서두르고 조급해하는 이 태도는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빨리빨리' 졸업해서 대학생이 되어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나니 '빨리빨리' 해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늘어만 갔고 항상 '빨리빨리' 승진하고 '빨리빨리' 성공하고 '빨리빨리' 집을 사고 '빨리빨리' 남들이 보기에 번듯한 삶을 꾸려려야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었다. 


 그 시절의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질주를 했다. 그렇게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인생의 내리막으로 가는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카르마로 모든 것이 초토화가 된 뒤 깨닫게 되었다.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던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낯설고 두려워졌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이곳을 벗어나고자 했다. 무한경쟁의 블랙홀에서 벗어나 자연이든 아쉬람(인도의 정신적인 수행의 장소)이든 어디가 되든 좋으니 다만 사람이 북적이지 않는 조용한 곳에 가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었다.


진실을 고백하자면 사실 인도는 내 고집을 꺾기 싫어서 선택한 탈출구였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러 떠난다는 것은 쳇바퀴 같은 삶과 답답한 조직생활에서 은근슬쩍 빠져나가기 위한 꽤 괜찮은 명분처럼 보였다. 비틀즈와 스티브 잡스도 머물렀다는 명상의 성지 북인도 리시케시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기에 매우 매력적인 장소였다. 나도 저곳에 가면 비틀즈와 스티브 잡스처럼 마음의 평화도 찾고 무한한 창조의 영감도 얻을 수 있을꺼라며 스스로 내린 결정을 합리화했다.


 리시케시까지 가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루트는 한국에서 델리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고 델리에서 기차나 버스를 타고 북인도까지 가서 거기서부터는 릭샤(인도의 삼륜 오토바이 택시)로 갈아타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빨리빨리를 외치던 여행자가 저렇게 느리고 긴 루트를 선택할리 만무했다.


 결국 검색의 검색을 거듭한 끝에 1시간이라도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루트를 선택했다. 한국에서 뭄바이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고 뭄바이에서 국내선을 갈아타 리시케시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이 있는 데라둔까지 가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비행기표를 모두 결제하고 나니 이미 히말라야 설산아래로 흐르는 갠지스강 앞에서 소변을 누는것과 같은 짜릿한 쾌감이 몰려왔다.


어서 빨리 히말라야에 둘러싸인 신성한 갠지스 강에 뛰어들어 자연과 나와 신이 하나됨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인천공항에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에서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래서 밥은 인천공항 라운지에서 먹기로 하고 샤인머스캣 몇 개만 씻어서 과일통에 챙겨 담고 바로 집을 나섰다.


공항에 도착하니 체크인 카운터에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나중에 뉴스를 보니 그날 하루동안에만 8만 명이 출국했다고 한다. 느릿느릿 차도를 건너가는 인도의 소들만큼이나 더디게 줄어드는 긴 줄에서 한 참을 기다리다 보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다행히 집에서 챙겨 온 샤인머스캣이 있었고 난 차례를 기다리며 샤인머스캣으로 허기진 배를 살살 달래주었다. 


체크인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어서자 이번에 공항 검색대라는 또 다른 거대한 장벽이 나타났다. 겨우겨우 공항 검색대라는 장벽을 넘어서자 또 다시 입국심사라는 또 다른 장벽이 나타났고 입국심사라는 장벽까지 넘고 나자 좀 전에 먹은 샤인머스캣이 다 소화된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래는 공항라운지에서 여유 있게 식사를 하고 미리 챙겨 온 명상 서적도 읽다가 비행기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보니 책은커녕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평소보다 큰 보폭으로 팔을 앞뒤로 세차게 흔들며 라운지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라운지 앞에 도착한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예전에 아이폰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이른 아침부터 애플 스토어 앞에 긴 줄을 서서 아이폰을 사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뉴스를 통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저 곳의 비빔밥이 맛있어서 인천공항에 가면 항상 마티나 라운지를 이용하곤 했었다. 가뜩이나 장기로 떠나는 여행이라 한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가장 좋아하는 한식인 비빔밥으로 하고 싶었다. 손으로 한 명 한 명 짚어가며 몇 명이 줄에 섰는지 세보려 했으나 세다가 중간에 포기해버렸다. 다행히 인천공항엔 마티나 라운지가 두군데 있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동쪽 끝이니 반대편 서쪽의 마티나 라운지를 가면 되겠다 싶어 서쪽을 향해 뛰었다.


그렇게 서편 마티니 라운지에 도착한 나는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길게 줄이 늘어서 있는 건 동쪽이나 서쪽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시간을 보니 탑승마감시간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전히 난 라운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고 내가 탑승해야 하는 게이트와 가장 가까웠던 라운지인 스카이허브 라운지를 향해 숨을 헐떡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카이 허브 라운지에 도착한 나는 그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줄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인천공항에서 하루동안에만 8만 명이 출국했으니 어디를 가도 인산인해였던 건 당연했었다. 차라리 맨 처음 갔던 마티나 라운지에서 기다렸으면 이미 라운지에서 식사를 끝내고 지금쯤 명상 서적을 읽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나의 경솔함이 몹시 후회되었다.


더 빨리 라운지에 입장하기 위해 성급한 마음에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갔다가 다시 게이트 근처로 이동하며 뛰어다니느라 모든 시간을 다 날려버렸다. 게다가 줄 서는 것을 피하려고 동분서주했으나 결국엔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꼴이니 이 얼마나 바보같은 일인가!


 입은 바짝바짝 타들어갔고 머리에선 현기증이 났다. 한 참을 기다린 끝에 내 차례가 되어 입장하는데 그 순간 이러다간 정말 비행기를 놓칠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이 또다시 불쑥 올라왔다. 결국 난 라운지에 들어가자마자 음식이 놓여있던 곳에서 붕어빵 네 마리만 집어 들고 도로 나와 탑승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라운지 음식은 외부로 반출이 안되지만 붕어빵 정도는 탑승구로 뛰어가면서 먹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승객을 호출하는 방송을 들은 난 도저히 붕어빵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일단 젖 먹던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내가 멀리 뛰기 하듯이 비행기에 앞 발을 내딛으며 들어가자 비행기 문이 꽝하고 닫혔다. 빨리빨리를 외치던 여행자는 비행기에 가장 마지막으로 탑승한 꼴찌승객이 되어버렸다. 


 헉헉 거리는 숨을 진정시키며 손에 들고 있었던 붕어빵 네 마리를 아까 샤인머스캣을 담아왔던 과일통에다가 넣었다. 비행기를 놓칠까 너무 긴장했던 탓에 위가 쪼그라들었는지 배고픔이 싹 달아났다. 붕어빵이고 기내식이고 뭐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아졌다.


비행기가 안전 궤도에 접어들고, 비상등이 꺼지자 나는 가방에 있던 명상 서적을 꺼내었다. 원래는 라운지에서 여유 있게 식사를 마치고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붕어빵 네 마리



 우리 인간의 삶의 연료는 삶에 대한 욕망이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인간은 그 욕망을 갖고자 하는 순간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겪는다. '마음의 휴식', '편안함', '포만감', '영적 성장'이라는 욕망을 추구하면서 그것의 정반대인 '조급함', '성급함', '불안함', '무지'로 인한 고통을 겪는다. 마음의 휴식이란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조급함이란 결핍으로 고통을 받는다.


비행기가 뭄바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화장실에 갔다. 볼일을 다 본 뒤 물을 내리기 전에 인천공항에서부터 들고 다닌 붕어빵 네 마리도 변기통에 넣어버렸다. 오늘 하루 종일 무의미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게 만들고 결국 라운지에서의 휴식대신 얻은 것이 저 붕어빵 네 마리라는 사실에 괜히 붕어빵이 미워졌기 때문이다. 꼴보기 싫은 저 붕어빵이 변기 속으로 내가 가진 조급함과 함께 내려갔으면 했다.


그런데! 인도 공항 변기의 수압이 한국처럼 강하지가 않다. 변기레버를 내리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줄 알았던 붕어빵 네 마리가 그 자리에 여전히 둥둥 떠있었다.


 물 위에 둥둥 떠있는 붕어빵을 보고 난 큰 혼란에 빠졌다. 왜냐하면 여기는 인도이기 때문이다. 붕어빵을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텐데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변기에 붕어들이 둥둥 떠있는 걸 본 인도인들이 질겁을 하고 FBI(미국의 연방 수사국)에 신고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신문에 붕어빵 테러사건이라고 기사가 나지 않으려면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나는 붕어 네 마리가 둥둥 떠있는 변기 앞에 서서 심한 갈등을 느꼈다. 도저히 저 더러운 변기물에 내 손을 집어넣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카르마의 법칙을 뼈저리게 느꼈다. 카르마란 내가 한 행동에 대한 결과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우주의 보이지 않는 질서이다. 줄 서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다른 곳으로 간 선택을 한 것도 나였고, 그래서 라운지에 들어가지 못해 붕어빵을 챙겨 나온 선택을 한 것도 나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동안 내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시간이 되었다.


 변기의 물이 다 찬 것을 확인하곤 있는 힘을 다해 변기 레버를 눌렀다. 그러자 붕어 네 마리중 두 마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의 희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느릿느릿한 인도의 소들럼 인도의 변기는 유독 물이 느리게 차올랐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정도 인내심이었다면 맨 처음 라운지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선택을 하지 않고 그곳에 서서 기다렸을 것이다. 아니지. 애초에 빨리빨리 성공해서 빨리빨리 집을 사고 빨리빨리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가득했던 그 도시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는 선택을 하지 않고 그냥 사회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며 압박감을 즐기며 오히려 도시 안에서 도를 닦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변기의 물이 또다시 찬 것을 확인하고 이번엔 영혼까지 끌어모아 있는 힘껏 변기 레바를 눌렀다. 내 시야에서 멀어지는 붕어들이 마치 '이제는 됐다. 깨달았으니. 가보아도 좋다.'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살짝 눈물이 날뻔했다. 그 사이에 산전수전을 함께 겪은 붕어들과 그 새 정이 들었었나 보다.


내가 화장실 칸에서 나오자 풍채가 어마어마하게 큰 인도 사람이 들어갔다. 그런데 인도인은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 칸에서 나왔고 바로 직전에 그 화장실칸을 사용했던 나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나는 깜짝 놀라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보았다. 변기를 본 나는 내가 저지른 일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완벽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끔찍한 상황이 발생해 있었다.


 물 위에 둥둥 떠있던 어린 붕어들을 변기 아래로 보내기 위해 여러 번 반복적으로 변기 레바를 누르는 사이 붕어들의 배가 조금씩 터져갔고 내가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레버를 내릴 때 결국 팥이 붕어 배 밖으로 나왔었나 보다. 붕어들은 내려갔지만 상대적으로 가벼웠던 팥이 부력 때문에 물 위로 뭉실 떠올라 있었다.


변기 물 위에 둥둥 떠있던 단팥은 모든 정황을 다 알고 있는 내가 보아도 영락없는 똥처럼 보였다.


그렇게 붕어의 남은 잔재들까지 처리를 끝내고 마침내 데라둔으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공항에서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라운지 사건과 뭄바이 공항의 붕어빵 사건을 겪고 다니 몰골이 몹시나 초췌해졌다. 


 비행기 안에서 조금이나마 쉬기 위해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는 '아.. 오래전 인도여행에선 자이푸르 공항에서 악몽 같은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지.. 그것도 오늘에 비하면 즐거운 하루였었네. 적어도 그때는 스위트룸에서라도 잤지.'라고 중얼거리며 스스륵 눈을 감았다.


그렇게 2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원래대로라면 2시간 10분이 소요되는 짧은 비행인데 어떻게 된 건지 내가 탄 비행기는 착륙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방송이 들려왔다.


"우리 항공편은 데라둔 공항의 모래폭풍으로 인해 데라둔 공항에 착륙 허가가 나지 않아 자이푸르 공항으로 긴급 회항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탄 비행기가 데라둔이 아닌 자이푸르로 간다니! 더 빨리 리시케시에 도착하기 위해 일부러 뭄바이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데라둔으로 가는 방법을 선택했던 건데!


그렇게 빨리빨리를 외치던 여행자는 기존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가장 전통적인 루트를 선택했던 사람들이 모두 리쉬케시라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 목적지와 500km 이상 떨어진 자이푸르 공항으로 혼자서 역행하고 말았다.


인생은 서두르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절대 아니다. 




▶︎ 작가의 다른 글 보러 가기: https://brunch.co.kr/@ce9f6fd49e9c44d/4



 https://brunch.co.kr/@ce9f6fd49e9c44d/6







                    

이전 04화 노 프라블럼의 나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