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감사합니다. 마에다 선생님.”
“맞아요. 마에다 선생님 덕분에 에리카와 요시코를 구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우와 명호, 에리카, 요시코가 고개를 숙였다. 마에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럼, 여기에서 헤어지죠.”
마에다가 웃으며 신우에게 말했다. 신우가 고개를 끄떡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가실 때가 있나요?”
“갈 때가 있습니다. 수원에 친구가 있습니다.”
“일본군이 마에다 선생님도 쫓고 있습니다.”
“하하하! 잘 알고 있습니다. 뭐 어떻게 되겠지요. 그것보다 신우씨와 명호씨가 더 걱정입니다.
다나카와 야마모토를 치겠다니 … 그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둘은 헌병대 총사령관과 수석 부관입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제 사명입니다.”
신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군요. 건투를 빕니다.”
마에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신우는 삼엄한 경계를 뚫고 3층 별채에 갇혀있는 에리카와 요시코를 구했다. 그라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여러분 모두 행운을 빕니다.”
마에다가 말을 마치자, 에리카가 앞으로 나왔다. 목숨을 걸고 자기를 구해준 은사에게 허리를 90도로 굽혀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에리카양, 희망을 잃지 말아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어요.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렵더라고 … 자신에게 떳떳하면 그걸로 족합니다.”
마에다도 허리를 90도로 굽혀서 제자 에리카에게 작별 인사했다.
그렇게 마에다가 떠났다.
저 멀리에 보이는 마에다를 보며 신우가 생각했다.
‘저분은 평범한 일본인이 아니야. 에리카가 왜 은사로 여기는지 알 거 같아. 그런데 어디에서 본 거 같아. 어디에서 봤지?’
신우는 마에다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건 마에다도 마찬가지였다. 둘을 22년 전 운석이 만든 구덩이에서 인연이 있었다.
다나카가 신우를 쏴 죽이려 할 때 마에다가 그를 막아섰다. 둘은 그때 깊은 인연을 맺었다. 22년 후 다시 만나, 힘을 합쳐서 에리카를 구했다.
마에다가 떠나자, 명호가 말했다.
“거처를 옮겨야 할 거 같아. 여기로 일본군이 올 수 있어.”
“그래, 그게 좋겠다. 어서 떠나자.”
신우, 명호, 에리카, 요시코가 짐을 챙겨서 집에서 나왔다. 일단 급한 대로 여인숙에서 묵기로 했다.
여인숙은 서대문 쪽 산성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 있었다. 한적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짐을 풀었다.
“신우야, 지금은 괜찮아?”
명호가 신우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신우가 고개를 끄떡이고 답했다.
“지금은 괜찮아.”
신우는 에리카를 구하고 도망치다가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가슴에서 일어난 검은 빛이 몸을 감쌌다.
“으윽!”
신우가 커다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에서 뒹굴었다. 그는 에리카와 요시코를 구할 때 많은 힘을 썼다. 그게 원인이었다.
“신우씨!”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죠?”
에리카와 요시코가 깜짝 놀랐다. 갑자기 고통에 몸부림치는 신우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신우를 기다리던 명호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바닥에 쓰러진 신우를 업고 내달렸다. 그래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신우가 말을 이었다. 침울한 목소리였다.
“명호야. 힘만 썼다 하면 아프니 큰일이다. 그래도 복수는 …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해야 해.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질 수는 없어.”
신우가 말을 마치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이를 갈았다. 두 눈이 붉게 충혈되기 시작됐다.
다나카는 신우의 원수이자, 에리카의 원수였다. 둘의 부모를 모두 죽게 했다.
신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반드시 이 무도한 자를 처단해서 부모님의 영혼을 달래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나카와 야마모토를 처단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땅한 방법이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 주위에는 중무장한 병사들이 항상 붙어 있었다. 별채에서 큰일이 난 후에는 관저의 경계도 한층 삼엄해졌다.
신우는 시간이 없었다. 몸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복수는커녕,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에 허우적대다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에리카는 신우를 걱정하며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좋은 의사를 찾는 게 급선무에요.”
신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치료를 받는다고 나아질 몸이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신우의 말에 에리카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안타까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신우는 죽음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동안 무수한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전혀 없었다. 가슴에 박힌 돌덩어리를 빼낼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했다.
‘내 피맺힌 원한을 어떻게든 풀어야 해. 그래야 죽을 때 눈을 감을 수 있어.’
답답했다. 신우는 답답한 심정을 달래고 싶었다. 명호와 함께 여인숙에서 나왔다.
요시코한테 에리카를 맡기고 술 한잔하러 근처 대폿집을 찾았다.
“자, 한잔하자고.”
“괜찮겠어?”
“아픈 건 … 술과 상관없어.”
“하긴 그렇지.”
둘이 서로 술잔을 권했다. 두부김치를 안주로 삼아 속을 달랬다.
신우가 술잔을 깨끗이 비우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에리카가 내 옆에 있으니.’
에리카를 생각하자, 신우의 눈빛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다나카는 에리카의 어머니를 탐한 파렴치한 자였다. 그런 자가 에리카마저 탐하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신우는 팔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주 삼아서 술잔을 계속해서 비웠다.
술병이 거의 다 비워졌을 때, 출입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들어왔다. 키가 작은 남자였다. 술집을 쭉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신우를 오른손 검지로 가리키며 크게 말했다.
“거기 당신! 당신이 이신우라는 사람이오?”
“뭐라고?”
신우가 깜짝 놀랐다. 모르는 사람이 자기를 알아봤다. 먹던 두부를 떨어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음 맞는 모양이군!”
신우를 지목한 사람이 고개를 끄떡이며 밖으로 나갔다.
“저 사람은 뭐야? 어떻게 너를 알지.”
명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내가 나가서 상황을 보고 올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신우가 출입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명호가 불안한 듯 한쪽 다리를 떨었다.
술집 밖에 대여섯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마석이었다.
“앗! 너, 너는 마석! … 어떻게 여기를 알고?”
신우가 마석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문이 막히고 몸이 굳었다.
마석이 씽긋 웃었다. 이윽고 껄껄 웃더니 입을 열었다.
“하하하! 이신우, 여기에 숨어있었구나. 내가 널 못 찾을 줄 알았냐? 그날, 아버지를 불러낸 그 왈패 놈을 찾는 건 식은 죽 먹기였어.
그 녀석한테 돈을 듬뿍 주니 술술 불더군. 네가 어디에 사는지 대충 알아냈지.”
“뭐라고?”
소년이 사실을 불었다는 말에 신우가 아차! 했다. 셋이 촌장을 찾으러 다닐 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그때 사는 곳을 대충 알려준 기억이 났다.
“역시 … 돈을 좋아하는 놈이군.”
신우가 소년을 생각했다. 돈다발을 들고 좋아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한 집을 찾았는데 막상 가보니 주인이 떠났다고 하더군. 그런다고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냐?
너희들이 움직이는 걸 본 사람들이 있었어. 허름한 여인숙으로 갔다고 하더군. 하하하!”
신우가 이를 악물었다. 두 번이나 자신을 밀고한 밀고의 명수, 마석이 은신처를 알아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마석이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이 친구! 몸이 근질근질하지 않냐? 한번 몸을 좀 풀어보지 그래.”
“무슨 헛소리야! 마석 이놈!”
신우가 화를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자! 그럼 어디 한번 신우의 실력을 볼까?”
마석이 말을 마치고 주위를 빙 둘러봤다. 옆에 힘깨나 쓸 거 같은 장정들이 서 있었다. 그가 손을 들었다.
마석의 명이 떨어지자, 장정들이 천천히 신우를 에워 샀다.
“신우가 왜 오지 않지?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술집 안에 있던 명호가 조바심을 참지 못했다. 결국, 젓가락을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정들이 에워싸자, 신우가 분기탱천해서 마석을 노려봤다. 그가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마석이 답했다.
“말 그대로 네 실력을 보려고 … 순사들을 날려버리고, 날 때려눕히던 그 실력을 보고 싶어서.”
장정들이 신우를 향해 점점 다가왔다.
그때 명호가 술집 밖으로 나왔다.
“아니? 이게 대체?”
명호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마석이 명호를 보고 말했다.
“명호도 안에 있었구나. 명호는 그냥 가만히 있어. … 어차피 너는 짐에 불과하니까. 난 힘만 세고 머리 나쁜 신우한테만 볼 일이 있어.”
마석이 코웃음 치면서 신우에게 도발했다. 손바닥을 비비더니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손뼉을 짝 쳤다. 신우를 공격하라는 신호였다.
“야아!”
신우를 둘러싼 장정들이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것들이!”
신우가 몸을 재빨리 숙였다. 장정들 사이 빈틈을 찾았다. 그 빈틈을 굴러서 포위망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번개처럼 몸을 솟구쳐 장정들의 면상을 차례로 갈겨버렸다.
“악!”
“으악!”
강철 주먹에 장정들이 하나둘씩 나가떨어져 버렸다.
신우는 최대한 힘을 적게 사용했다. 또다시 아플까 봐 힘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
“하하하! 됐다. 이제, 그만! 이만하면 됐다. 이 정도면 훌륭해. 아주 날래고 힘이 세군. 성난 호랑이 같아.”
마석이 만족한 듯 웃으며 다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쓰러졌던 장정들이 하나둘씩 몸을 털고 일어나더니 내빼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명호가 마석에게 크게 소리쳤다. 딱 봐도 장난질이었다.
“명호는 여전하군. 까칠한 성격은 여전해. 하하하!”
마석이 여유롭게 웃으며 신우와 명호에게 다가갔다.
신우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마석은 그의 원수였다. 마석 때문에 덕대와 누렁이가 비참하게 죽었고 기철은 20년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헤매다가 폐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우가 마석을 외면하고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난 … 네 아버지의 뜻대로 너를 용서했다. 너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어서 썩 물러가라!”
“그건 아니지. 우리 사이가 칼로 두부 자르듯이 싹둑 잘릴 사이가 아니잖아.”
마석이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둘의 말을 듣던 명호가 분을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마석! 어떻게 우리를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더는 속지 않는다. 또 순사를 불렀겠지. 순사는 어디에 있는 거야?”
“순사라고?”
마석이 뜻밖의 말이라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명호가 마석에게 달려와 그의 멱살을 꽉 잡고 숨통을 조였다.
마석이 급히 말했다.
“명호! 생각 좀 해봐. 순사가 있다면 벌써 왔겠지. 왜 나 혼자 있겠냐?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헌병대 중대 병력도 여기에 데려왔을 거다.”
마석이 말을 마치고 명호가 잡은 멱살을 확 풀었다. 명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아까 그놈들은 대체 뭐야? 그놈을 왜 끌고 온 거야?”
“신우의 실력을 한 번 더 보려고 데리고 온 것뿐이야. 예상대로 신우한테는 한주먹거리도 안 됐지.”
순간 신우가 생각했다. 마석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순사나 헌병대가 있었다면 벌써 포위하고도 남았다. 그가 말했다.
“나를 찾아온 용무가 뭐냐?”
“그건 … 너를 도와주기 서지.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려고, 흐흐흐!”
마석이 웃으며 말했다.
“뭐, 뭐라고? 헛소리하지 마라. 네놈이 우리를 돕는다고? 그건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지는 소리야.”
명호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신우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마석이 가슴 속에서 끓어 오르는 분노를 토해내며 울부짖었다.
“다나카, 그자가 너희들만의 원수인지 아냐? 나 역시 그자와 철천지원수다.
다나카 그자 때문에 고향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은 거야! 우리 아버지 때문이 아니야. 우리 아버지도 그자의 농간에 빠져서 그 책임을 다 떠안은 것에 불과해.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끔찍한 악몽에서 시달렸어.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살았어. 겨우 잊을 만했는데, 신우 네가 나타나서 … 그동안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고 말았어.
마치 물거품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