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9편 <검은 판사, 악의 분노>
“으으으!”
유강인이 신음을 내뱉었다.
갑자기 가슴이 아픈 듯 왼손으로 가슴팍을 꽉 부여잡았다. 한 사람의 사무친 원한과 커다란 고통을 느낀 듯했다.
조막손 김태리는 손이 기형이었지만, 음악에 뜻이 있었다. 그건 간절한 꿈이었다. 그래서 파헬벨의 캐논을 자기식으로 해석해서 새로운 곡을 만들었다.
그 곡에는 그녀의 희망이 담겨 있었고 그 간절함으로 대단한 곡을 만들었다.
그녀는 음악의 천재였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인도 몰랐고 친구 김정선도 몰랐다.
유일하게 조막손을 도와줬던 김정선도 조막손이 그 악보를 썼다는 걸 부정했다.
그렇게 비극이 시작됐다. 간절했던 꿈과 희망이 무너져버렸고 천재성도 묻히고 말았다.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한 조막손은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이후 조막손의 모습은 불 보듯 뻔했다. 그 모습이 유강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좋아했던 음악과 담을 쌓고 외롭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거 같았다.
유튜브에서 J 앙상블의 캐논 변주곡이 연주되자, 분노에 치를 떨며 땅을 때렸을 거 같았다.
자기가 만든 음악이 오히려 그 음악을 훔친 자들을 빛나게 했다.
파렴치한 자들이 조막손의 곡을 마치 자기 것인 양 발표해 커다란 찬사를 받았다.
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아름다우면서도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J 앙상블의 캐논 변주곡 속에서 분노의 씨앗이 활활 타올랐다.
그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조막손이 다시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번에는 살인 교향곡이었다. 피빛 연주였다.
천재성을 숨길 수 없었다.
유강인이 급히 말했다.
“J 앙상블은 지금 어디에 있죠?”
“오늘 공연이 있어요. 공연장에서 마지막 연습을 하고 있을 거예요.”
“어느 공연장이죠?”
“서울 예술의 궁전입니다. 1층 뮤지엄에서 저녁 7시 반부터 공연할 예정이에요.”
“알겠습니다. 김정선씨는 현재 어디에 있죠?”
“저는 지금 집에 있어요.”
“그럼,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집에 꼭 붙어있으세요. 곧 경찰이 집에 도착해 경호할 겁니다.”
“네에? 저를 경호한다고요? 경찰이 왜 저를 경호하죠?”
유강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답했다.
“김정선씨, 제 말을 잘 들으세요. 현재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무친 원한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원한과 관련된 자들은 그 누구든지 간에 위험할 수 있습니다.
범인은 그 잘못의 경중을 따지지 않습니다. 김정선씨는 싸움을 말렸지만, 그 악보를 조막손이 썼다는 걸 부정했습니다.
그리고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악보를 J 앙상블의 곡인 양 연주했습니다. 부정한 자들과 동조했습니다. 그래서 위험할 수 있어요.”
“네에? 뭐라고요?”
김정선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가 급히 말했다.
“그때 조막손이 그 악보를 썼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었어요.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복잡하고 좋아 보였어요. 그래서 태리가 썼다는 말을 애써 부정했어요.
그런데 한참 뒤에 깨달았어요. 조막손이 그 악보를 썼다는 걸 깨달았어요.
미희가 그 곡으로 연주하자며 제안했을 때, 데모 영상을 같이 보여줬어요. 그 곡으로 연주한 영상이었어요.
그때 뭔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어요. 태리가 그 곡을 쓰기 전 교실에서 흥얼거리던 멜로디가 있었어요.
태리가 무척 신이 났어요. 그래서 태리에게 물어봤어요. 뭐가 그리 신이 났냐고 물어봤어요.
태리는 답을 하지 않고 빙긋 웃기만 했어요. 그 멜로디가 … 악보에 그대로 있었어요.”
유강인이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했다.
“그걸 알았다면 그때라도 출처를 밝혔어야죠!”
김정선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게 맞는데 … 그 사실을 밝혔어야 했는데, 욕심 때문에 그걸 숨기고 말았어요.
태리가 어디에 사는지 몰랐고 전화번호도 몰라서 연락할 수가 없었어요.”
김정선의 말은 궁색한 변명에 불과했다.
유강인이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뭐라고요?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합니까?”
유강인이 화를 참지 못했다. 김정선의 말은 뻔뻔함 그 자체였다. 이는 다른 사람의 곡을 강탈한 것과 같았다.
김정선이 쩔쩔매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탐정님.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출처를 밝히면 안 될까요? 태리한테 사과하고 ….”
유강인이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버스는 한 참 전에 떠났습니다. 이제 와 손을 흔들든 조막손은 그 일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벌써 복수를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김정선이 울먹이며 말했다.
“이를 어째! 정말, 제가 어리석었어요. 유튜브에 올릴 때 태리가 썼다는 걸 밝혔어야 했는데 …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우리끼리 마음을 놓았어요.
다섯이 같이 있어서 … 안심했어요.”
“한 사람이 죄를 저지르면 그 죄책감을 고스란히 받지만, 여럿이 죄를 저지르면 그 죄책감을 나누기 때문에 안심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을 속이는 짓에 불과합니다. 죄책감을 5분의 1로 나누는 거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5배로 증폭됩니다.
결국, 남은 삶을 두려움 속에 벌벌 떨며 살 수밖에 없고 자신 스스로 철창 없는 감옥 안에 들어갑니다.
김정선씨, 이제 와 후회한 들 소용없습니다. 일단 집에 꼭 붙어있으세요. 경찰이 집을 지킬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정말 미친 짓을 했어요. 이를 어째 정말!”
김정선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유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어린 시절의 비행이 20여 년이 흐른 뒤 큰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비양심이 커다란 증오를 낳았다.
방심 속에서 커다란 태풍이 불었다.
과거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다.
조막손 김태리는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간절한 희망이 담긴 악보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가해자들은 20년 후 강탈한 악보로 승승장구했다. 세계적인 악단이 되어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 모습을 본 조막손 김태리가 복수를 다짐한 게 분명했다. 그래서 검은 판사가 되어 피의 복수를 시작한 거 같았다.
과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유강인이 급히 조수 둘을 찾았다.
“수지, 정수! 어서 음악의 궁전으로 가야 해.”
“지금이요?”
“그래, 시간이 없어. 죽은 이미희는 다섯 중 하나에 불과해. 나머지 넷이 위험할 수 있어.”
“일이 그렇게 커져요?”
“응!”
유강인이 정찬우 형사를 찾았다. 그가 급히 말했다.
“정형사, 강력범죄수사대도 음악의 궁전으로 가야 해. 어서 팀장님께 연락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궁전 관할 경찰서에도 연락해. 경찰 지원이 필요해.”
“알겠습니다.”
“어서 가자고.”
유강인이 탐정단 밴으로 달려갔다. 어서 빨리 음악의 궁전으로 달려가야 했다. 음악의 궁전은 서울 강남 반포구에 있었다.
*
유강인이 차 안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황정수는 김정선을 통해 J 앙상블 창립 멤버 연락처를 확보했다.
오늘 송년의 밤 공연에 참여하는 연주자는 총 여섯이었다. J 앙상블 멤버 넷과 객원 연주자 둘이었다.
J 앙상블은 다섯이 완전체였지만, 첼리스트 김정선이 손가락 부상으로 빠지면서 그 빈 자리를 객원 첼리스트로 채웠다. 그렇게 현악 5중주를 완성했다.
객원 피아니스트는 반주로 참여했다.
황정수는 연주에 참여하는 J 앙상블 창립 멤버 셋에게 계속 전화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공연을 앞두고 마지막 연습에 매진하느라 핸드폰을 꺼 놓거나 다른 곳에 둔 거 같았다. 아니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황정수가 유강인에게 말했다.
“셋한테 모두 연락했는데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객원 연주자는 아직 연락처를 모릅니다.”
“그래?”
유강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마지막 연습 중일 거 같은데.”
“시간상 그렇기는 하죠.”
“이미희가 나타나지 않자, 일단 그녀를 기다리며 연습할 거 같아. 공연 시작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어.”
“별일은 없겠죠?”
“아직은 괜찮을 거 같아.”
유강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가 말을 마치고 차창으로 밖을 내다봤다. 키 큰 가로수들이 거리에 보였다. 초겨울이라 가지가 앙상했다. 나뭇잎이 다 떨어져 헐벗어 보였다.
잠시 가로수들을 살피던 유강인이 갑자기 아차! 했다. 그가 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서울청 우동식 형사에게 전화했다. 우형사가 전화 받았다.
“선배님.”
“응, 대장.”
“용의자들 현재 위치를 말해주세요. 나은성, 연순호의 현재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한종수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나요? ”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한종수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해.”
우형사가 전화를 끊고 급히 컴퓨터를 살폈다.
컴퓨터에 나은성, 연순호 미행 일지가 있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3시 10분이었다.
미행 일지 상황보고는 오후 2시가 마지막이었다. 업데이트는 1시간마다 해야 했다. 아직 3시 상황이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서울청 강력범죄수사대는 유강인의 지시에 따라서 검은 판사로 의심되는 나은성, 연순호, 한종수의 행적을 뒤쫓고 있었다.
나은성은 송상하 부회장의 비서로 아버지를 잃은 딸이었다.
연순호는 부인과 아기, 장인을 잃은 남자였다.
한종수는 성형 수술 중 동생을 잃은 형이었다.
“3시가 넘었는데 왜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지?”
우동식 형사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핸드폰을 들었다. 나은성을 미행하는 후배 형사에게 전화 걸었다.
신호가 가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선배님.”
“김형사, 어떻게 된 거야. 3시가 지났는데 왜 업데이트를 하지 않았어?”
“그게, 나은성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뭐라고? 어디에서 놓쳤는데.”
“나은성이 거리를 걷다가 인도에 붙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놓쳤습니다.”
“그래? … 알았어. 어쩔 수 없지.”
우형사가 전화를 끊었다. 그가 급히 연순호를 미행하는 후배 형사에게 전화 걸었다.
“선배님.”
“그래, 박형사. 연순호는 잘 미행하고 있는 거야?”
“연순호가 1시 반쯤 식당에 들어갔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서 좀 전에 식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식당 안에 없었습니다. 직원 출입구로 몰래 빠져나간 거 같습니다. 현재 연순호를 찾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럼, 미행이 들킨 거야?”
“그런 거 같습니다.”
“이런!”
우동식 형사가 전화를 끊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미행이 전부 실패한 상황이었다. 그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유강인에게 전화 걸었다.
삐리릭!
유강인이 전화 받았다. 그가 급히 말했다.
“선배님, 어떻게 됐죠?”
우형사가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게, 둘 다 놓쳤어. 우리가 미행하는 걸 눈치챈 거 같아.”
“모두 놓쳤다고요?”
“응.”
“언제쯤 놓쳤죠?”
“세 시 전에 모두 놓친 거 같아.”
“둘이 짠 듯 움직인 거 같나요?”
“시간상 그런 거 같아.”
유강인이 이를 악물었다. 검은 판사들이 움직이는 게 분명했다.
말 그대로 비상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