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8편 <검은 자서전과 악의 비밀>
유강인이 고혜정 팀장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조수 둘과 백정현 형사가 그 뒤를 따랐다.
직원들이 이 모습을 보고 수군거렸다.
“저분이 말로만 듣던 유강인 탐정님이야?”
“맞아요. 유강인 탐정님이에요.”
“유강인 탐정님이 우리 사무실에 오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회사에 방화 위험이 있다고 들었어요.”
“뭐? 방, 방화라고?”
방화라는 말에 직원들이 깜짝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팀장이 창가 자리로 걸어갔다. 비어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이동희 대리 자립니다.”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창가 자리 책상을 살폈다.
겉보기에 평범한 책상이었다.
모니터와 컴퓨터 본체, 키보드, 마우스, 서류 묶음, 책장, 책, 티슈 각 등이 있었다. 모두 잘 정돈됐다.
유강인이 고혜정 팀장에게 말했다.
“컴퓨터를 켜세요.”
“알겠습니다.”
고팀장이 오른손을 들었다. 검지로 컴퓨터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유강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컴퓨터 부팅을 기다렸다. 그런데 먹통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부팅이 되지 않았다. 결국, 에러 사인이 나왔다.
“응?”
에러 사인을 보고 유강인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아차! 했다. 컴퓨터에다 무슨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놈들이 선수를 친 거 같았다.
유강인이 크게 외쳤다.
“고팀장님, 컴퓨터를 어서 열어보세요!”
“네에? 컴퓨터를 열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고혜정 팀장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강인이 서둘러 말했다.
“케이스요! 컴퓨터 케이스를 어서 여세요.”
“아, 케이스요.”
“네! 어서요!”
“알겠습니다. 케이스를 열겠습니다.”
고팀장이 컴퓨터 전원을 끄고 컴퓨터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가 열리자, 유강인이 급히 안을 살폈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컴퓨터 구조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다. 마더보드, 보조 기억 장치(SSD, 하드), CPU, 램, 전원 장치, 팬 등이 있기 마련이었다.
케이스 안을 살피던 유강인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실망한 목소리였다.
“이런 … 기억 장치가 없잖아.”
“네에? 그럴 리가?”
유강인이 말을 듣고 고혜정 팀장이 깜짝 놀랐다. 그녀가 급히 케이스 안을 살폈다. 유강인의 말대로 보조 기억 장치 SSD와 하드가 없었다.
그래서 에러가 발생한 거였다.
유강인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놈들이 출판사 쪽으로도 움직인 게 분명했다.
SSD나 하드에 저장된 자서전 원고 파일을 빼돌리려고 기억 장치를 통째로 훔친 거 같았다.
컴퓨터 파일은 삭제해도 포렌식으로 되살릴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SSD와 하드를 통째로 빼돌린 게 확실했다.
현재 자서전 담당자와 원고가 있는 SSD와 하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상황이 점점 심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강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놈들이 한발 빨리 움직였다. 버스가 떠난 뒤였다. 손을 흔들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
유강인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가능성은 자서전 담당자 이동희 대리가 놈들과 한패인 경우였다.
출판사 직원, 이대리가 사실은 놈들이 보낸 스파이였고 그래서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고 증거를 은닉, 인멸한 경우였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이대리가 협박을 받아서 놈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경우였다. 가족이 인질로 잡히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후자라면 큰일이었다. 이동희 대리의 생명과 그 가족이 위험할 수 있었다.
유강인이 급히 고팀장에게 말했다.
“이동희 대리는 언제 입사했죠?”
“이동희 대리는 … 입사한 지 6개월 정도 됐습니다. 다른 회사에 있다가 우리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이동희 대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뭐, 말이 없는 조용한 사람입니다. 일을 참 잘해서 대표님한테 인정받았습니다.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그래서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인 백두성 회장님 자서전을 맡았습니다.”
“백두성 회장님 자서전은 언제부터 기획했죠?”
“올해 초니까 8개월 정도 됐습니다. 백회장님이 자서전을 다시 내고 싶다고 연락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중단됐습니다. 백회장님이 정리할 게 있다고 하셔서 잠시 중단했는데, 한 달 전에 연락이 다시 왔습니다. 백회장님이 정리가 끝났다고 이제 자서전을 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동희 대리는 자서전이 기획된 후에 입사한 거군요.”
“네, 그렇죠.”
유강인이 생각했다.
‘시기적으로 이동희 대리는 자서전이 기획된 후에 들어왔어. 이대리가 놈들과 한패라면 … 가능성은 한가지야.
놈들이 자서전을 출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대리를 출판사로 보낸 거야.’
유강인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여러 가능성을 고려했다. 그러다 고개를 흔들었다. 현재로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의 인물, 이동희 대리는 스파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이대리가 아니라 다른 자가 스파이일 수도 있었다.
한 가지만 확실했다.
미라클 북스 출판사에 악이 기운이 스며든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유강인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건이 잘 풀리다가 콱 막히는 느낌이었다.
생각을 마친 유강인이 고혜정 팀장에게 말했다.
“이동희 대리에게 자서전 프로젝트를 맡긴 사람이 누구죠?”
“그야, 대표님이 맡기셨죠.”
“혹 대표님께 이동희 대리를 추천한 사람이 있나요?”
“추천이라기보다는 워낙 일을 잘해서 이동희 대리가 적임자였습니다. 입사 후 여러 프로젝트를 성공했습니다. 회사에 큰 이익에 안겨줬습니다.
책을 깔끔하게 잘 만들었고 마케팅 전략이 훌륭해서 대박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동희 대리만한 적임자가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유강인이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황상 이동희 대리는 회사에서 입지가 탄탄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범죄와 관련됐다는 점이 이상했다. 회사에 스파이로 침투했다기보다는 협박을 받았을 거 같았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유강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밖을 내다봤다. 경찰차 경광등이 번쩍였다. 그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출판사는 자서전을 담당한 곳이야. 현재 자서전 담당자와 SSD, 하드가 사라졌어.
중요한 사람과 물건이 사라졌지만, 뭔가가 남아있을 수 있어. 여기는 자서전 원고가 있었던 곳이야. 뭐라도 찾아야 해. 반드시!’
유강인이 꼼짝하지 않고 생각에 잠기자, 백정현 형사가 움직였다. 컴퓨터 본체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백형사가 책상 서랍을 주시했다. 책상에 작은 서랍 세 개가 있었다.
이에 첫 번째 서랍 손잡이를 잡고 잡아당겼다. 서랍이 열리지 않았다. 튼튼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자물쇠를 확인한 백정현 형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랍을 열어야 하는데 ….”
백형사가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 직원들을 바라봤다.
사무실 직원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유강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형사가 직원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책상 서랍을 열어야 합니다. 열 방법이 없나요? 없으면 강제로 열어야 합니다.”
백정현 형사의 말에 직원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직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사건을 수사하는 유강인과 형사가 이동희 대리 컴퓨터와 책상을 주목했다.
그들이 곧 깨달았다. 이대리한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직원들이 움츠리기 시작했다.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은 거 같았다. 다시 일하려는 듯 자리에 앉아서 모니터를 쳐다봤다.
불편한 침묵이 사무실에 흐를 때
그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
한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20대 남자 직원이었다. 뭔가를 아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 직원이 입을 열자, 유강인이 그를 주시했다.
직원이 말했다.
“아침에 이대리님이 출근했는데 … 뭔가를 급히 버렸습니다. 매우 서둘렀어요. 그래서 그게 인상이 남았습니다. 이후 밖으로 나갔습니다. 오늘 외근이라며 ….”
백정현 형사가 급히 말했다.
“이대리가 뭔가를 버렸다고요?”
“네. 이대리님이 종이 뭉치를 버렸습니다. 복사지 묶음이었습니다. 딱 보기에 원고를 출력한 프린트물 같았습니다. 교정 교열하려고 원고를 출력한 프린트물일 겁니다.”
“원고를 출력한 프린트물이라고요? 그걸 어디에 버렸죠?”
“아마 … 재활용 통에 버렸을 겁니다. 복도에 재활용 통이 있어요. 아침마다 미화원이 재활용 종이를 수거합니다.”
“재활용 통!”
백정현 형사가 급히 외쳤다. 그 소리에 유강인의 두 눈이 반짝였다. 유강인이 서둘러 말했다.
“어서 갑시다. 재활용 통에 뭘 버렸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네,”
유강인과 백정현 형사, 조수 둘이 급히 사무실에서 나갔다. 고혜정 팀장도 뒤따라 나왔다.
고팀장이 유강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가슴이 떨리는 지 두 손을 가슴에 댔다.
기다란 복도 한가운데 커다란 통이 있었다. 1m 높이 원통형 통이었다. 바로 재활용 통이었다.
“저기다!”
유강인이 재활용 통을 발견하고 급히 외쳤다. 그리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급한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재활용 통은 종이를 담는 커다란 통이었다. 출판사라 버리는 종이가 많았다. 통에 종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유강인이 재활용 통 앞에 걸음을 멈췄다. 그 뒤에 조수 둘과 백정현 형사가 서 있었다.
유강인이 급히 말했다.
“어서 이동희 대리가 버린 종이 뭉치를 찾아요! 자서전 원고일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거 잘됐네요. 잘하면 원고를 확보할 수 있겠어요.”
황정수가 말을 마치고 소매를 걷었다. 큰 통 안으로 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종이 뭉치를 꺼내서 일일이 살피기 시작했다.
백정현 형사가 재활용 통을 살피다가 말했다.
“통을 엎어서 종이를 쏟는 게 낫겠습니다. 그게 빨라요.”
“그게 낫겠네요.”
황수지가 맞장구쳤다.
백형사가 재활용 통을 번쩍 들었다. 종이가 많아 상당한 무게였지만, 백형사는 힘이 센 장사였다. 이 정도 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통을 거꾸로 들자, 안에 있던 종이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종이가 수북하게 바닥에 쌓였다.
백정현 형사가 조수 둘이 수북하게 쌓인 종이 속에서 자서전 원고를 찾기 시작했다.
손과 눈이 재빨리 움직였다.
유강인의 눈빛이 번쩍였다. 여기에서 단서를 찾아야 했다. 놈들이 증거를 없애려고 원고를 버렸지만, 미화원이 종이를 수거하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종이 수거는 내일 아침이었다.
시각이 시시각각 흘러갔다.
“어!”
황정수가 종이 뭉치를 잡고 크게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 유강인이 서둘러 종이 뭉치를 살폈다.
황정수가 맨 앞장을 보고 말했다.
“백두성 자서전 1권 원고에요. 백두성 자서전, 찬란한 빛과 어둠의 기록 1권이라고 적혀 있어요.”
뒤이어 황수지가 외쳤다.
“여기에 2권하고 3권 원고도 있어요.”
유강인이 손뼉을 짝 쳤다. 드디어 자서전 원고를 확보했다.
확보한 원고는 출간한 책이 아니었다. 컴퓨터 한글 파일도 아니었다. 출간 전 원고를 교정 교열을 하려고 출력한 프린트물이었다.
조수 둘이 커다란 종이 뭉치를 세 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는 A3 크기였다. 한 장에 두 페이지씩 프린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