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우주에서 가장 많은 생명의 꽃을 피울 수 있는 대지가 펼쳐져 있는 지구는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생명의 빛을 뿜는 광 생명체이자,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대우주 연합이 인정한 우주대스타이다.
거대 광 생명체인 지구는 다양한 빛을 통해 우주의 여러 별 들과 소통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유일무이한 지구의 광신호를 감지한 우주의 다양한 생명체들이 지구를 방문했다. 지구의 몸인 대지에 발을 들인 그들은 지구의 활기찬 생명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지구 위에 뿌려진 생명의 빛보다 지구의 대지 속에 숨겨진 자원에 눈독을 들이는 세력도 있었다. 바로 우주의 약탈자로 이름난 철의 몸을 지닌 타칸이었다. 그들은 광물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종족으로 지구 위 여러 생명들을 죽이고 지구의 광물을 약탈했다. 자기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타칸을 떨쳐내기 위해 지구는 대지를 흔들고 대기 에너지를 교란시켰다.
타칸은 이런 지구의 저항에 잠시 물러나 있다가 지구의 대기와 지각 시스템에 손을 보기 시작했다. 지구는 품고 있는 생명들을 지키기 위해 타칸에 힘겹게 맞서 싸웠다.
이 지난한 싸움 속에 지구의 지각과 대기는 요동쳤고, 지구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던 품 안의 숱한 생명체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며 무려 5번의 생명 대멸종이 찾아왔다.
지구와의 오랜 싸움에 지친 타칸은 그제야 지구를 떠났다. 긴 시간 동안 자기 몸에서 태어난 생명들의 죽음과 탄생을 지켜보며 사투했던 지구도 지쳐버렸다. 대기와 땅엔 여전히 타칸이 설치해놓은 인위적 자연 조작 시스템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더는 자정작용으로 그것을 떨쳐내기 힘든 지구는 자신의 고유한 빛을 이용해 우주대연합이 있는 가론성에 구호 요청을 했다. 안 그래도 또다시 닥친 지구의 생명 대멸종에 안타까워하고 있던 가론성은 지구를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 새의 모습을 한 ‘해늘’이란 우주인을 지구로 보냈다.
해늘이 가장 먼저 착륙한 곳이 바로 한반도였다. 한반도에선 5번의 대멸종 끝에 새로 생긴 생명체인 인간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거대 광 생명체인 지구는 자기가 낳은 여러 생명들이 다섯 번이나 대멸종을 겪은 것에 깊은 상심을 느끼다 모든 생명체들간의 소통을 관장하는 특이한 생명체를 낳았는데, 그게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들은 식물이나 동물들과 소통하며 자연의 질서를 잡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해늘은 우주대스타인 지구가 낳은 인간이 지구의 생명체를 지켜 줄 수 있는 수호자라 여기며, 인간에게 우주와 소통하는 법도 가르쳤다. 인간은 광활한 우주의 신비를 알려준 해늘을 신처럼 모셨다. 해늘은 인간을 가론성의 언어로 영원한 빛이라는 뜻의 ‘찬란’이라 부르며, 인간과 함께 지구 곳곳에 설치돼 있는 타칸 세력이 남기고 간 인위적 자연 조종 장치를 없애고, 상처 입은 지구의 대지 곳곳엔 수호석인 ‘지구석’을 심었다.
지구는 차츰 회복되었다. 지구가 살아날수록 이제껏 보지 못한 수많은 생명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해늘과 인간들은 막 지구에 새로 태어난 생명들을 사랑으로 보살폈다.
해늘들이 지구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천년이었다. 그들은 동식물의 일부 원소만 있어도 쉽게 그 생명체로 변할 수 있었다. 천년 동안 숱한 생명들로 변신해 우주의 지혜를 알려줄 수 있으나 우주의 평화와 아름다움을 지키는 대우주연합의 ‘해늘’이란 정체성을 잃으면 안 된다. 해늘의 정체성을 잃게 되면 변신한 생명의 몸으로 지구에서 생물학적 죽음을 맞고, 고향별인 가론성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대부분의 해늘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지구에서 갖가지 생명체로 살며 우주의 지혜를 전수하다 천년의 세월이 지난 뒤 다시 오색 털을 가진 해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원래 모습이 된 해늘들은 짝을 만나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알을 낳은 뒤 대우주연합이 있는 가론성으로 복귀했다. 해늘이 낳고 간 알에선 다시 새로운 해늘들이 나와서 지구를 천년 동안 지킨 다음 가론성으로 돌아갔다. 이 사이클은 오랜 시간 반복됐다.
알에서 깨어나 지구 위 생명체의 삶을 살던 해늘 중에는 변신한 생명체와 완전히 동화돼 고유의 정체성을 잃은 해늘도 있었다. 어떤 이는 나무, 어떤 이는 나비, 어떤 이는 바닷속의 산호나 고래로 살다 그대로 죽음을 맞았다. 해늘이 정체성을 잃고 정착하게 된 생명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건 그들이 ‘찬란’이란 가론성의 언어로 이름까지 붙여준 인간이었다.
인간이 된 해늘은 인간과의 사이에서 자손을 보게 됐다. 보통 인간보다 우주 감응력이 뛰어난 해늘과 인간의 후손들은 인간들에게 지구도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과 우주와 소통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에 힘을 쏟았다. 해늘과 다른 생명체로 사는 해늘,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은 꽤 오래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평화가 깨진 건 지구석이란 안전핀을 심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이 발생하면서부터이다. 해늘은 재앙의 원인을 찾다 타칸 세력의 잔재로 보이는 흑룡의 알이 깨진 것을 발견한다. 알에서 깨어난 흑룡이 지구의 땅과 대기를 헤집고 다니며 다시 지구를 괴롭혔다.
흑룡은 해늘만 볼 수 있을 뿐 보통 인간들은 볼 수 없었다. 인간들은 흑룡이 뿜는 암흑 에너지를 자기도 모르게 흡수했고, 그 에너지에 오염되어 해늘에게 전수받은 우주 감응력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원래 지닌 자연과의 소통 능력도 차츰 감퇴해 자연을 무작위로 착취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자연과 멀어질수록 흑룡은 점점 커졌다.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던 해늘은 오랜만에 뭉쳐서 흑룡에 맞섰다. 아주 오랜 시간 흑룡과 해늘의 전쟁이 이어졌고, 결국 해늘들은 흑룡을 없앴다. 흑룡은 죽으면서 그동안 축적한 엄청난 암흑 에너지를 지구에 뿜었다. 해늘들은 이 에너지로부터 지구와 지구생명체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다 절반 이상 목숨을 잃었다.
흑룡이 남긴 암흑 에너지는 계속해서 지구를 떠돌며 각종 물질에 스며들었고, 인간을 비롯한 여러 생명체들은 그것을 먹고 자기도 모르게 암흑 에너지를 몸에 축적했다. 축적된 암흑 에너지는 후손들에게 계속 전해졌다. 대를 내려갈수록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자연 감응력은 퇴화됐다. 극소수의 인간만이 우주와 소통하는 능력과 자연 감응력이 살아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해늘들은 그들에게 지구와 하나가 되는 법을 가르치며 다시 닥칠지도 모르는 지구의 6번째 대멸종을 막으려 애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흑룡의 마음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인간들은 해늘이 들어가 있는 생명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주로 개체 수가 적은 생명체로 변신해 있던 해늘은 급작스런 인간의 공격에 저항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죽음을 맞았다.
남은 해늘들은 더는 지구 위의 생명체로 변신하지 않고 오색깃털을 가진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혹시나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여러 생명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아토라는 물질을 우주감응력이 뛰어난 인간들이 모여 있는 랑바린에 묻는다. 랑바린 섬에 있던 모베오는 해늘이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지구 위의 생명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남겨놓은 물질 ‘아토’였다.
지구의 6차 생명 대멸종을 막기 위해 이토록 애쓰던 해늘들은 점점 사라졌다. 랑바린 섬 사람들이 ‘키마’라고 부르던 새가 해늘이었다. 한반도에서는 태평성대를 불러오는 새 ‘봉황’이라 불렸다. 해늘은 세계 곳곳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해늘이 지구에서 한 일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설과 신화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지만 아무도 그걸 믿지 않았다. 이미 인간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자연과 우주에 감응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에 3차원에 사는 존재가 4차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잃어버린 역사를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로만 치부했다.
퇴화한 인간의 능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인간들이 바로 ‘찬란’이다. ‘찬란’은 오래전 인간이 가지고 있던 우주 소통 능력과 자연 감응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구와 한 몸이 되어 긴밀히 소통하고 있기에 지구의 능력인 소생 능력도 지녔다. 그들은 지구의 가장 건강한 몸인 청정한 자연 속에서 충분히 지구와 교감만 하면 어떤 생명이든 살릴 수 있다.
혜성이 아직도 의식이 없는 할머니가 된 룬아의 문드러진 입술과 배포의 귓불 없는 귀와 썩어가는 귓바퀴를 바라보았다. 저들이 입과 귀가 저렇게 된 게 병들어가는 우주대스타 지구와 감응하기 때문이라니…….
배포가 특유의 그윽한 눈빛으로 충격에 빠진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지구상에 있는 찬란은 정말 극소수야. 찬란들은 늘 오해를 받지. 달이도 어렸을 때 젊었다가 늙었다 하는 내 모습을 각각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형, 아빠, 할아버지라고 부르곤 했었어. 최근에 내가 다시 나타나니까 예전에 봤던 형이 전혀 나이를 먹지 않아 꽤 놀란 것 같더구나.”
배달이 눈물을 훔쳤다.
“미, 미안해요. 아빠. 아무리 생각해도 과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그랬어요.”
“괜찮아. 과학은 사람을 딱딱하게 만들어서 틀 속에 가두니까.”
혜성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청명대 밑의 비밀기지는 대체 뭐죠? 흑룡과 관련된 건가요?”
“타칸이 만든 흑룡 사육장의 잔재야. 갓필드에서 용케 그걸 찾아 개조한 것 같더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혜성이 아까 챙겨온 운석을 꺼내서는 물었다.
“사이언이 왜 이걸 가짜라고 하면서 진짜를 달라며 제 몸을 뒤졌던 거죠?”
배포가 쓰러져 있는 룬아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배낭 속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그 안엔 혜성이 쥔 것과 같은 초록 운석이 있었다.
“이건 운석이 아니라 대우주연합이 있는 가론성에서 보낸 우주석이야. 이 우주석을 요청한 게 룬아야. 우주석은 찬란의 인생에서 스무 살을 넘기기 전 딱 한 번 부를 수 있는데, 그 안에 있는 강한 에너지를 다룰 수 있는 것도 그걸 요청한 찬란뿐이야. 사이언은 룬아를 유인하기 위해 운석과 진동수가 유사한 광물로 가짜 운석을 만들어 전시해놓았던 거야. 룬아와 난 여기 와서 진짜와 가짜를 바꿔 치기 하려다 잡혔어. 그러다 달이랑 라인이가 찾아왔고, 다시 내가 운석을 바꿔치기해서 탈출했지. 네 손에 있는 건 학교에 전시돼 있던 가짜야.”
라인이 배포의 손바닥 위에 진짜 우주석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요즘 운석, 아니 우주석이 왜 그렇게 많이 떨어져요? 떨어진 그 우주석으로 소원을 이룬 사람들은 아저씨나 룬아 같은 찬란은 아닌 것 같던데……”
배포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구와 한 몸이 되어 감응하는 찬란들은 누구보다 지구의 아픔을 잘 느끼고 있어. 너희도 알다시피 지구는 지금 스스로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병들어 있단다. 인간은 지구의 고통을 외면한 채 숲을 파괴하고, 물을 오염시키고,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대지를 파헤치고, 온갖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공장들을 세우고 있지. 찬란인 걸 자각한 아이들은 대부분 막 개발이 시작된 땅에 살고 있어. 그 아이들은 삶의 터전이었던 자연이 파괴되고, 그 속에서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이 공장에 가서 힘겹게 미싱을 돌리거나, 폐품을 뒤지거나, 좁은 갱도에서 광물을 캐며 고된 생활을 하는 걸 지켜봐야 했지. 물론 찬란의 고유한 힘으로 죽어가는 생명들과 사람들을 살릴 수는 있어. 하지만 찬란의 몸을 다시 회복시켜줄 자연이 사라져 버리면 더는 그 능력도 쓸 수 없게 돼. 그럼 찬란인 아이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염된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된 삶을 살다 죽음을 기다려야 해. 우주석에는 살아가는 것들을 살리고 싶은 찬란 아이들의 간절함이 깃들어 있어. 그런 우주석이 찬란인 아이들의 손에 떨어지지 못하는 건, 이미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인간의 탐욕이 흑룡이 남긴 암흑 에너지를 팽창시켜서야. 암흑 에너지의 방해로 우주석은 찬란의 손이 아닌 엉뚱한 곳에 떨어지고 있어. 다른 사람이 우주석으로 소원을 이루면 그것을 요청한 찬란은 얼마 안 가 죽고 만단다.”
놀란 혜성이 물었다.
“그럼 그동안 우주석으로 소원을 이룬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그 우주석을 부른 찬란 아이들은 다 세상을 떠났나요?”
배포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우주석을 부른 찬란 아이들이 희생된 건 꽤 오래전부터 있던 일이야. 갓필드도 찬란이던 아메리카 원주민 소녀가 부른 우주석을 빼앗아 소원을 빌어 세계적인 부를 얻었지. 지구가 지금보다 아프지 않을 때 떨어진 우주석은 그 힘이 더 강력했어. 이 소문을 들은 다국적 기업의 창업주들은 너도나도 찬란들을 찾아다녔지. 그들은 찬란 아이들을 잡아 우주석을 부르게 한 후, 욕망을 채우기 위해 우주석을 썼어. 자신들의 욕망 때문에 어린 생명들이 죽는 건 전혀 개의치 않았지.”
상상할 수 없던 무서운 일들이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라인은 화가 나는지 얼굴이 시뻘게졌다. 혜성이 겨우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말했다.
“사이언이 룬아의 우주석을 썼다면 룬아도 어쩌면…….”
배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그걸 막기 위해 룬아를 도왔던 거야. 지금 찬란들은 지구를 소생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어. 지구엔 아주 오래전 해늘이 설치한 지구석이 있어. 지구석은 해늘이 암흑 에너지와 철저히 차단된 장소에 묻어놓았기에 원래 에너지 그대로야. 우주에서 온 우주석과 지구에 묻혀있던 지구석을 합치면 지구를 다시 소생시키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지. 근데 갓필드에서도 이 사실을 알아버렸어. 지구석과 우주석을 합칠 수 있는 것도 우주석을 요청한 찬란만이 할 수 있어. 그래서 학교에 떨어진 우주석을 부른 룬아를 잡기 위해 진짜와 진동수가 비슷한 가짜를 전시해놓은 운석 박물관을 만들었어.”
박물관은 찬란인 룬아를 잡기 위한 거대한 덫이었다. 세계 평화 어쩌구저쩌구 하며 아이들과 사람들을 농락한 사이언과 오라지를 떠올리며 혜성은 열이 불끈 솟았다.
“그럼 지구석은 어디 있어요? 설마 화성에……?”
“그래. 룬아가 찾았어. 그걸 지키기 위해 아직 나한테도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어. 지구석이 파괴되면 기후비상사태가 일어나. 지구석은 파괴되기 전 소리로 조짐을 알려주지. 세상이 멸망하는 소리는 지구석의 에너지가 빠져나가면서 발생하는 소리야. 지구석은 묻힌 땅과 그 땅에 사는 생명체들과 연결이 돼 있어. 생명체들이 해를 입어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지구석 안에 있던 에너지가 점차 새면서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 화재 같은 대형 재난이 일어나.”
세상이 멸망하는 소리는 지구석이 파괴되는 소리였다니. 혜성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제 날이 완전히 밝았다. 곧 있으면 우주대스타 예선에 출전해야 할 시간이었다. 여전히 늙은 룬아는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 배포가 룬아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했다.
“룬아는 놈펜을 너무 많이 먹었어. 그래서 이렇게 늙어버린 거야.”
“놈펜이요? 그걸 먹였다고요?”
“찬란들은 놈펜을 먹으면 몸이 갑자기 초록색으로 변하고 급격히 늙어. 놈펜은 찬란을 찾기 위해 갓필드에서 만든 약인데 그게 잘못 퍼져서 놈펜 사태가 일어났어. 갓필드에선 찬란을 찾기 위해 변종 놈펜을 다시 만들었어. 난민 아파트와 화성고에 놈펜 사건이 일어난 건 다 찬란 아이를 찾기 위해서야. 찬란 하나를 찾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놈펜을 먹고 고통을 겪어야 했지. ”
난민들과 화성고 아이들이 그렇게 아팠던 게 다 찬란을 찾기 위한 갓필드의 수작이라니. 혜성은 기가 막혔다. 배포가 말했다.
“난 몸에 들어온 유독성 물질을 태우는 법을 익혀서 들어온 놈펜을 없애서 이 정도밖에 노화가 안 됐어. 둘 다 순간 이동으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버렸어. 한 번만 써도 에너지가 엄청나게 소진되는데, 두 번이나 했으니……”
찬란의 숨겨진 능력에 놀란 혜성이 물었다.
“찬란이 순간 이동도 할 수 있나요?”
“순간 이동을 하려면 마음에 온 우주에 모든 별을 품는다는 일념으로 수련을 해야 해. 그렇게 해도 성공 확률이 아주 낮고, 한 번 시도하면 온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이 따르지. 정말 몸에 불이 붙을 때도 있어. 박물관에서 운석을 가져올 때 살짝 몸이 붙어서 얼른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벗어버렸지.”
혜성은 꽃할배가 주웠다던 두루마기가 왜 탔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라인이 신기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병원에서 탈출할 때도 순간 이동을 한 거예요? 찬란은 신 같아요.”
“그땐 정말 절박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어. 우린 그냥 지구 위의 생명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이야. 그런 특별한 능력을 쓰고 나면 온몸의 기운이 빠지면서 죽음 직전의 고통이 밀려오지. 지금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거야. 갑자기 찬란의 존재를 알게 돼서 다들 심경이 복잡하겠지만 탁 털어버리고 어서 우주대스타 오디션이나 보러 가. 룬아가 회복되면 우린 다시 화성으로 돌아갈 거다. 룬아가 지구석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까. 우주석과 합쳐야지. 아, 가기 전에 꽃돌을 좀 주겠니. 꽃돌 안에 있는 우주화의 씨앗이 룬아를 회복시켜 줄 거야.”
혜성이 주머니에 있던 꽃돌을 꺼냈다.
“이 돌 안에 룬아를 살리는 씨앗이 들어 있다고요?”
“찬란을 한순간에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지구를 살릴 씨앗이 여기 들어 있지. 씨앗을 꺼내야 할 것 같아.”
“이런 중요한 걸 왜 저한테 준 거죠?”
“꽃돌 안에 있는 씨앗은 엄청난 고진동으로 발아해. 그럼 세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지. 근데 사람이란 우주가 꾸는 아름다운 꿈의 진동으로도 이 꽃돌 안의 씨앗이 발아할 수도 있단다. 룬아는 너의 꿈이 이 꽃돌 안의 씨앗을 발아시킬 수 있을 거라 믿은 거야.”
손바닥 위에 있는 꽃돌 위로 혜성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룬아는 모두가 비웃던 우주대스타 라는 혜성의 꿈을 믿어준 진정한 빠순이였다. 이제껏 누구도 이렇게 진심으로 자신의 꿈을 응원해 준 사람은 없었다. 룬아의 믿음이 준 거대한 감동이 진한 눈물로 휩쓸려 왔다. 혜성은 아주 잠깐 자신이 우주란 걸 자각할 수 있었다. 배포가 혜성의 눈물을 보며 미소 지었다.
“찬란의 힘은 낯설어서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만 음악은 친숙하게 사람들에게 스며들지. 인간은 원래 찬란이야. 찬란일 걸 일깨우기 위해선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의 율려를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해. 네 음악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룬아는 느낀 거야.”
우주가 되었던 그 찰나의 순간을 가슴 깊이 간직한 혜성이 배포에게 꽃돌을 건넸다. 배포는 조용히 꽃돌을 손에 얹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때 엎드려서 모든 얘기를 듣고 있던 고양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부리나케 도망가버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지하에 있던 유리 로봇과는 달리 엄청 사나워 보이는 로봇개들을 이끈 사이언이 오고 있었다. 소나무 숲은 로봇 개판이 됐다. 배포가 얼른 꽃돌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후 소매에서 도피 피리 꺼내 불었다. 이번엔 아이들이 귀를 막았다. 사이언도 코웃음 치더니 얼른 귀마개를 꽂았다.
“노우 프라블럼! ”
개가 배포에게 달려들어 그를 물었다. 배포는 곧장 쓰러졌다. 다른 로봇개들아 혜성, 라인, 배달에게 다가왔다. 겁 없는 라인은 로봇개를 피하지 않고 있다 물렸다. 배포처럼 즉시 마취가 되며 쓰러졌다. 혜성과 배달은 그 꼴이 되기 싫어 달아났다. 로봇개가 더는 따라오지 않을 때쯤 둘은 숨을 헐떡이며 소나무 숲으로 돌아왔다. 룬아는 보이지 않았고 배포는 쓰러져 있었다. 라인이 마취에서 깨어난 후 배포도 눈을 떴다. 혜성이 다급하게 물었다.
“사이언이 룬아를 데리고 어디로 간 거죠?”
배포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화성 같아. 룬아가 놈펜을 먹고 환각이 일어나서 자꾸 화성으로 가야 한다고 했었거든. 모베오로 갔으니 진작에 도착했겠지. 큰일이야. 진짜 우주석을 또 빼앗겨 버렸으니……”
자신의 꿈을 믿어주었던 찬란 빠순이가 사라져버렸다. 겁쟁이처럼 로봇개를 피해 도망갔던 게 후회됐다. 지금 가면 우주대스타 오디션에 참가할 수 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혜성이 라인과 배달을 보며 소리쳤다.
“탱자 밴드는 우주대스타 지구를 구하기 위해 화성으로 돌아간다!”
라인이 혜성을 대견스럽게 바라봤다.
“환혜성, 오늘 정말 우주대스타 같아!”
룬아를 구하는 건 지구를 구하는 일인 동시에 우주를 구하는 일이다. 그 애의 말대로 인간은 우주니까. 우주를 구할 수 있는 건 우주뿐이다. 룬아가 꿈을 진심으로 믿어 준 덕분에 엄청난 감동이 밀려왔고 비록 찰나의 순간이긴 하지만 혜성은 자기가 우주라는 걸 느꼈다.
우주가 됐던 짧은 순간을 잊지 말아야지. 그래야 아까처럼 도망가지 않고 모든 일에 담대하게 맞설 수 있다. 혜성은 룬아라는 우주에게 꼭 보답하기 위해 우주처럼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계속 우주처럼 행동하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한 우주가 될 수 있을 거다.
우주대스타를 포기한 것에 대한 아주 조금의 미련이 남긴 하지만 혜성은 지구를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던진 초록 눈의 빠순이를 생각하며 덤덤하게 명성에서 제일 맑고 깨끗한 청명산을 내려왔다. 미세 먼지로 혼탁한 명성의 공기가 그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