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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 선화 Oct 18. 2024

청명대 밑 지하기지

통큰 하우스를 나온 혜성과 배달 아빠는 주차돼 있던 화성에서 렌트한 자율주행차를 타고 허겁지겁 청명대로 향했다. 청명대는 예전 대통령 집무실로 화석 에너지 대란 이전만 해도 관람객이 넘쳤지만 요즘은 사흘 간격으로 관람객을 받고 있었다. 도로 사정도 좋지 않고 차를 운행할 에너지가 부족하기에 명성 밖의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고, 웬만한 명성 시민들은 관람을 다 해서 올 사람이 별로 없어서였다. 이번 달은 내부 시설 점검으로 아예 휴관 중이었다. 청명대 앞에는 원강으로 흘러가는 청명천이 흐르고 뒤에는 그린벨트로 지정된 청명산이 있었다. 이곳은 그린벨트로 묶여 있어 고립된데다 국가 주요 시설이 있었던 곳이라 그런지 요란한 명성에서 가장 조용하고 깨끗한 곳이었다. 

자율주행차가 청명대 정문 길에서 멈춰 섰다. 혜성은 건반 가방과 모듬북 가방을 배달 아빠는 배달의 배낭과 거문고 가방을 짊어졌다. 둘은 청명대 뒤에 있는 청명산 둘레길 3코스로 올라갔다. 뒤따르던 혜성이 물었다. 

“애들이 정말 청명대 지하에 있나요? 아저씨는 애들이 거기 간 걸 어떻게 알았어요? 왜 그렇게 홀딱 젖어서 나타난 거예요?”

“난 경덕궁의 자회루로 겨우 나왔거든. 이 산 어디에 청명대 지하 기지로 통하는 길이 있어.”

계단 중턱까지 올라오자 배달 아빠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눈을 감았다. 암만 봐도 배포와 너무 똑같이 생긴데다 그가 착용하던 두꺼운 헤드셋을 써서 그런지 배포 같았다. 

근데 배포가 갑자기 저렇게 늙을 리가 없잖은가? 설마 배포가 사람들의 심장을 먹고 젊어진다는 멸망 인간……? 아니야. 멸망 인간 같은 건 새열이 같은 겁쟁이들만 믿는 공상이지. 그런 인간이 있을 리가 없어. 

혜성은 고개를 저으며 명상을 하는 배달 아빠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배달 아빠의 뒤에 있는 숲에서 초록색 불빛이 점점 다가왔다. 

놀란 혜성이 핸드폰 플래쉬로 불빛을 비춰 보았다. 인절미색 길고양이가 보였다. 고양이가 가르릉거리며 배달 아빠의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배달 아빠가 고양이의 배를 간질이자 발라당 자빠져서는 몸을 땅에 문대더니 계단 옆의 숲으로 들어갔다. 배달 아빠는 조용히 고양이를 따라갔다. 혜성도 어리둥절 그의 뒤를 따랐다. 

한참 가자 취윤당이라는 낡은 전각이 나타났다. 여긴 구한말에 지어진 전각으로 일제가 광복 후 퇴각할 때 이 밑에 감추어둔 금괴를 갖고 튀었다는 말이 도는 곳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이곳에서 보물이 발견됐다. ‘명성에서 보물찾기’에서 숨겨둔 보물이 정말 여기 숨겨져 있었던 거다. 

고양이가 전각 뒤쪽으로 가더니 계속 울어댔다. 둘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갔다. 거기엔 성인 남자 세 명이 들어가 목욕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의 고리가 달린 청동 항아리가 있었다. 항아리 안쪽에는 용이 있고 용의 입 부분에 쇠고리 같은 게 보였다. 물은 거의 발목이 잠길 정도 밖에는 차 있지 않았다. 배달 아빠가 말했다. 

“화재가 났을 때를 대비해 물을 받아두는 드므야.”

고양이가 배달 아빠 다리에 부비부비를 한 다음 드므 안으로 폴짝 뛰어 들어가더니 앞발로 바닥에 있는 용의 입에 걸린 쇠고리를 가리켰다. 

배달 아빠가 거문고 가방을 전각 기둥에 세워두고 드므 안으로 들어가 고양이가 가리킨 쇠고리를 잡아 힘껏 당겼다. 순간 바닥이 움푹 꺼지더니 끝도 모르는 컴컴한 암흑이 나타났다. 항아리에 있던 물이 그 구멍 속으로 순식간에 빠졌고 배달 아빠와 고양이도 그 구멍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꼭 블랙홀에 몸이 빨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혜성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대로 도망쳐서 그냥 혼자 우주대스타 예선에 참여할까? 멤버들이 없는 썰렁한 무대를 심사위원들이 이상하게 여기겠지. 내팽개친 라인과 배달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아 무대에서 실수가 나올지도 몰라. 그럼 예선에서 탈락해버리는 거야. 그리고 라인과 배달이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평생 도망친 것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해.

죄책감 같은 어두운 감정은 무겁다. 무거우면 높이 날 수 없다. 우주대스타는 가벼워야 한다. 

혜성은 건반과 모듬북 가방을 내려놓았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몸을 던졌다. 새까만 어둠이 그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저절로 엄청난 비명이 흘러나왔다. 몸이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딱딱한 바닥이 발에 닿았다. 커다란 손이 고음을 내지르는 혜성의 입을 틀어막았다. 먼저 내려온 배달 아빠였다. 혜성이 덜덜 떨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플래쉬를 켰다. 거의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한 높이는 좁은 바위굴 속이었다. 

“여긴 어디죠?”

“용의 뱃속. 달이랑 라인이도 여기로 들어온 것 같아. 역시 내 아들이야. 절박한 순간이라 능력이 살아났나 봐. 달이도 이 고양이를 불렸대.”

고양이가 야옹거렸다. 배달 아빠가 고양이를 뒤로 한 채 바위굴을 따라 걸었다. 혜성이 뜨악해서는 그를 따라서며 물었다. 

“아저씨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예요? 배달이 그런 능력이 있었다니……그게 유전되기도 하나요?”

대답 없이 그는 이 알 수 없는 바위 동굴 속을 걷기만 했다. 계속 가다 보니 빛이 새어 나왔다. 바닥의 돌에는 용의 발이 새겨져 있었다. 배달 아빠가 용의 중간 발톱을 누르자 돌바닥이 밀리면서 아래로 가는 통로가 열렸다. 그가 훌쩍 뛰어내렸고 혜성이 뒤를 따랐다. 

안에는 투명한 유리 복도가 보였다. 좀 전까지만 해도 고대의 어느 왕릉 안을 헤매던 느낌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현대로 시간 점프를 한 듯했다. 침입자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렸다. 유리로 만들어 부품들이 훤히 다 보이는 로봇들이 하나둘 혜성과 배달 아빠를 에워쌌다. 배달 아빠는 매고 있던 배낭을 열심히 뒤져서 럭비공 크기의 투명한 물방울 모양의 괴상한 물체의 버튼을 눌렀다. 신경을 건드리는 괴상한 소리가 울리더니 갑자기 멀쩡하던 로봇들이 우왕좌왕하며 흩어졌다. 어떤 로봇은 피겨 스케이팅 점프를 뛰듯 점프를 하더니 다른 로봇 위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다른 로봇들이 깨졌다. 어떤 로봇은 다른 로봇을 마구 껴안으며 뽀뽀를 하기도 했다. 배달 아빠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필이가 입자교란 폭탄을 아주 잘 만들었군.”

“입자교란폭탄을 만들 수 있다니……”

입자교란폭탄은 어떤 기계에 닿기만 해도 기계 속 미세한 입자가 교란되며 고장이 나 버리는 폭탄인데, 몇 년 전 저 폭탄이 명성 은행에 떨어졌다. 명성 은행의 모든 로봇이 오작동 되고 전산 시스템이 마비됐다. 오작동 되던 로봇들은 은행에 있던 돈을 길에 뿌리고 다녔다. 

이 폭탄을 개발한 사람은 명성의 영재 학교에 다니다 학교에 불을 지르고 나온 시대의 반항아였다. 그는 산업 혁명 때 러다이트 운동을 하던 사람처럼 세상의 기계들이 없어져야 사람을 기계처럼 대하는 풍토가 사라질 거라며 입자 교란 폭탄의 제작법을 세상에 공개한 후 곧 경찰에 체포됐다. 

입자 교란 폭탄의 제작법이 퍼지면 명성 은행이 털리는 것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포털에선 즉시 관련 데이터를 삭제해버렸는데 특이한 것이라면 무조건 해보는 배필은 입자교란폭탄의 제작법을 번개처럼 다운받아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배필이 새삼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혜성은 다시 뼈저리게 느끼며 이제 서로 격투기까지 하는 로봇들을 구경했다. 배달 아빠가 이런 혜성을 재촉했다. 

“뭘 구경하고 있어! 저거 안 보여?”

배달 아빠가 가리킨 곳에 나선형의 유리 계단이 보였다. 둥글게 뚫린 계단 중앙에 박힌 굵다랗고 투명한 유리 원기둥 안엔 목까지 초록색 액체가 차 있는 라인과 배달이 기절해 있었다. 배달 아빠가 스위치를 찾았다. 혜성은 급한 마음에 자기들끼리 싸우다 쓰러져 있는 로봇 다리 한짝을 주워들고 와서는 유리 기둥을 힘껏 쳤다. 

종을 치듯 몇 번 세게 치자 기둥이 금이 가며 갈라지더니 안에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초록색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초록색 액체 휩쓸린 배달 아빠가 계단 난간에 걸려 머리를 박고 쓰러졌고, 혜성은 액체와 함께 거의 계단 끝까지 내려갔다. 온몸이 초록색 식물처럼 된 혜성이 난간에 걸려있는 배달 아빠가 있는 쪽으로 올라왔다. 배달 아빠도 혜성처럼 온몸이 초록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가 힘없이 말했다. 

“내 걱정 말고 어서 가서 룬아나 구해. 어서……”

혜성은 그를 걱정스레 쳐다보다 나선형의 계단 끝까지 내려갔다. 계단 끝에는 유리가 번쩍이는 방이 보였다. 방 안엔 운석 박물관의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초록 운석 진열장이 있었다. 

진열장 안의 초록 운석이 반짝였다. 진열장의 맞은편에 있는 입방체 안에는 찰랑거리는 초록색 액체 속에서 목만 드러내놓은 흰 머리를 늘어뜨린 할머니가 기절해 있었다. 할머니는 룬아가 착용하던 깃털 귀걸이가 하고 있었고 입이 아주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일그러진 입술에선 이상하게 푸르스름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설마 저 할머니가 룬아? 아니야. 그럴 리가…….

소름이 돋은 혜성이 다시 방을 기웃거리며 룬아를 찾고 있는데 진열장 옆에 있던 강화유리로 된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주로 핸드폰으로만 보던 아주 익숙한 사람이 나왔다. 당연히 지구 밖 화성에 있는 줄 알았던 사이언이었다. 사이언이 비틀거리면서 걸어오다 관자놀이를 만졌다. 어이없어하던 혜성이 짧은 영어로 물었다. 

“와이 아 유 히얼?”

지친 얼굴의 사이언이 말했다. 

“텔레포팅 프롬 마스. 아임 베리 타여드.”

“화성에서 순간 이동했다고! 꿍쳐둔 모베오가 아직 많이 있는 모양이죠!”

사이언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영어로 한국어를 섞어 말했다.

“쿵 쳐? 아임 사이언, 슈퍼 리치, 지구에서 내가 찰 나가! 모베오 갓필드엔 아칙 마나. 아 유 찰란?”

“찰랑? 찬란? 어쨌든 난 찬란한 우주대스타가 될 거라고요! 랑바린에서 얼마나 훔쳤길래 아직 모베오가 있는 거죠? 도둑이 진짜 여기 있었네!”

“토, 토둑? 아하, 로버! 오! 노! 아임 더 가디언 오브 어스. 유 아 로버! 기 미 더 리얼 유니버스 스톤!”

“리, 리얼 유니버스 스톤?”

전시된 건 가짜란 말인가? 사이언이 벙찐 혜성에게 달려들었다. 정신을 차린 혜성이 날렵하게 피했다. 사이언이 혼자 바닥에 엎어지며 바닥에 있는 초록색 액체에 빠졌다. 혜성이 그 위에 올라타서 빠떼루 자세로 있으면서 그를 압박했다. 혜성의 온몸에 진득하게 묻어있던 초록색 액체가 사이언의 얼굴에 흘러내렸다. 사이언이 기겁했다. 

“오 마이 갓! 마이 핸섬 페이스 이스 베리 프리시어스”

“꼴 좋네! 웨어스 룬아?”

괴로워하던 사이언이 할머니 쪽으로 슬쩍 눈길을 주며 말했다.

“룬아? 아하! 디스 올드 우먼 이즈 룬아”

혜성이 황당한 얼굴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화성에서 텔레포트 해서 오더니 완전 돌았어요? 저게 룬아라니! 말도 안 돼!”

한국어를 잘 못 알아듣는 사이언이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온 힘을 다해 거머리처럼 붙어있는 혜성을 등에 진 채 일어나더니 그를 떼어내서는 바닥에 던져버렸다. 혜성은 눌린 호떡처럼 찌그러져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사이언은 이마에 흘러내린 초록 액체를 소매로 쓱 닦아낸 사이언이 넘어져 있는 혜성의 온몸을 수색했다. 

“웨어 이즈 더 리얼 유니버스 스톤?”

혜성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 뻥쟁이! 우주돌? 돌 우주? 그게 뭔데 나한테서 찾아? 돌아이 아냐?”

벌떡 일어난 혜성이 사이언과 박치기 했다. 사이언이 고대로 넘어졌다. 그때 안색이 창백한 배달 아빠가 내려오더니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어 던졌다. 헤드셋에 감춰져 있던 그의 귀가 드러났다. 왼쪽 귓불은 없었고, 오른쪽 귓바퀴는 절반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상처 난 양 귀에선 푸르스름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거 쓰고 귀 꽉 막아. 이 인간 손 좀 봐줘야겠어. 절대 빼면 안 돼!”

혜성이 일단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아 헤드셋을 쓰고 귀를 막았다. 양쪽 귀가 멀쩡하지 않은 배달 아빠는 배포가 가지고 있던 도피 피리를 꺼내 불었다. 연주가 궁금했지만 헤드셋을 빼지 말라고 하니 할 수 없었다. 혜성과 충돌한 머리를 만지던 사이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배달 아빠가 입방체에 있는 할머니를 보더니 혜성에게 말했다. 

“어서 데리고 나와!”

혜성은 진열장에 있는 운석을 일단 꺼내 주머니에 넣고 할머니를 업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오다 보니 혜성처럼 초록색 액체로 온몸이 뒤덮인 라인과 배달이 쓰러져 있었다. 겨우 그들을 깨워서는 아까 나왔던 통로 쪽으로 달려갔다.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던 유리 로봇들은 거의 다 멈춰 있었다. 

아까 길을 알려줬던 고양이가 깨진 유리 로봇 위에 앉아 고양이 세수를 하다 폴짝 뛰어내리더니 앞장섰다. 배달 아빠가 고양이를 따라갔다. 할머니를 업은 혜성, 잔뜩 지친 배달과 라인이 뒤를 따랐다. 다시 아까 왔던 좁은 바위굴이 나왔다. 바위굴이 가면 갈수록 좁아졌다. 나중에는 기어서 가야 했다. 할머니를 업은 혜성은 힘겹게 그 좁은 터널을 빠져나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 가다 보니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을 따라 나오니 청명산의 소나무 숲이었다. 혜성이 할머니를 소나무 숲에 내려놓았다. 아직 새벽이었다. 혜성이 여전히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어 여전히 이상한 푸른 기운이 나오는 양쪽 귀가 일그러진 배달의 아빠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죠? 아저씨는 왜 배포랑 거의 똑같이 생겼고 배포가 쓰던 헤드셋을 쓰고 있고, 배포처럼 도피 피리를 잘 불어요? 이 할머니는 대체 누구예요? 진짜 룬아는 아니겠죠?”

배달 아빠가 조용히 말했다. 

“맞아. 룬아야. 그리고 난…… 배달 아빠 배포다.”

라인은 놀랐지만 배달은 비교적 덤덤했다. 혜성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 겨우 말을 꺼냈다.

“둘, 둘은 멸망 인간? 맙소사…… 멸망 인간이 진짜 있었다니……”

배포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린 멸망 인간이 아니라 지구와 감응하는 능력을 지닌 ‘찬란’이야. 룬아는 지구의 입과 감응할 수 있는데, 지구의 입은 소통 능력을 잃어버린 채 병들어서 룬아의 입처럼 저렇게 썩어가고 있단다. 난 지구의 귀와 감응하고 있어. 지구의 귀도 멀쩡하지 않긴 마찬가지야. ‘찬란’은 지구 위의 모든 생명과 소통할 수 있고, 자연의 순수한 기운을 받으면 몸의 세포가 다시 살아나. 우린 자연에서 받은 기운으로 죽어가는 것들을 살릴 수 있어. 살리는 데 에너지를 쓰면 급격하게 늙어. 하지만 청정한 자연에서 기운을 충전하면 다시 젊어지지.”

혜성은 난민 아파트 뒷산의 낡은 온실에 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개판의 대궐 같은 개집 밑의 꽃밭에 누워있던 중년 남성과 중년 여성이 룬아와 배포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듣고 있던 라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배포가 놀란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룬아와 내가 이상해 보이겠지. 하지만 아주 오래전 지구에 살던 인간은 모두 지구와 감응하는 ‘찬란’이었어. ‘찬란’은 지구에 온 봉황 아니, 해늘이 인간에게 지어준 아름다운 이름이야.”

그런 인간들이 있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혜성이 물었다. 

“봉황을 해늘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죠. 아저씨도 봉황의 전설을 알고 있어요?”

“봉황은 전설이 아니야. 그들은 많은 생명이 멸종된 지구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켰어. 봉황이 지구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창조할 수 있었던 건 지구가 우주에서 제일 아름답고 다채로운 빛을 뿜는 우주대스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혜성은 언제나 자신의 꿈인 우주대스타만 생각하다 지구가 우주대스타라는 걸 듣고 어리벙벙해졌다. 

“네? 지구가 우주대스타라고요? 그건 누가 정한 거예요?”

“누가 정해주지 않아도 지구의 수많은 생명이 내뿜는 빛이 지구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단다. 지구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야. 인간이 굴곡진 역사를 가졌듯 지구에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역사가 있어.”

인간이 발굴한 역사만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 배포는 인간이 발굴하지 못한 지구와 지구에 살던 생명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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