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를 임시청사로 쓰고 있는 도서관 입구, 그러니까 교문 바로 안쪽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가끔 도서관을 다니면서도 은행나무가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나무에 비해 키도 크지 않거니와 보다도 차를 끌고 도서관을 오가기 때문일 것이었다.
모처럼 걸어서 도서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도 적당하니 걷기에 그만이다. 하늘은 파랗고, 나뭇잎들이 보기 좋게 알록달록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이 어찌나 예쁘고 운치가 있는지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가을 정취를 느끼기에 손색이 없다.
거의 읽지도 않은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역시 다 읽어낼 자신도 없으면서 책을 빌리지 않으면 왠지 입안에 가시라도 돋칠까 강박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책을 빌려 나온다.
저만치 운동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교문 가까이 서 있는 은행나무 아래서 은행을 줍는 노인이 눈에 들어온다. 노인은 은행을 줍다가 돌을 쌓아 흙을 부어 단차가 생긴 곳에 오르려 몸을 일으켰다. 노인은 가늘게 '끙'하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폈으나 이삭 줍는 사람의 모습에 그쳤고, 마치 한자 아들 자(子) 자의 첫 획처럼 보였다.ㄱ
노인은 키가 제각각인 돌들을 계단처럼 밟고 오르려 애썼고, 나는 그 모습이 그렇게 위태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할머니의 뒤에 다다라 여차하면 노인의 엉덩이를 받아내리라 마음먹었다. 다행히 노인은 네 발을 이용하여 흙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돌 위에 안착(?)했다.
"할머니, 저 사진 한 장 찍어요!" 노인은 대답 대신 낮고 깊숙하게 찔러오는 가을 햇살에 눈이 부신지 눈을 찡그린다. 눈가에 햇살 같은 주름이 가득 피었다.
나는 노인이 앉은자리에서 뻗은 팔의 반경 너머에서 은행을 주웠다. 한 움큼 주운 은행을 노인의 검은 봉지에 담아주자 노인이 만류한다. "손에 냄새가 밸 텐데.. 그만둬"
"아니에요, 할머니. 손은 씻으면 되지요 뭐" 그리고 또 한 움큼을 주워 노인의 봉지에 담는다.
"아이고, 그럼 자꾸 나 주지 말고 주워서 가져 가" 할머니 눈에 웃음이 담긴다.
"아니에요, 할머니. 전 냄새나서 은행 싫어요." 대답을 하고 보니 좀 전에 할머니가 냄새난다고 줍지 말라고 했던 말이 머리를 스친다. "은행 까는 것도 별로구요.."하고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은행은 발로 밟아서 은행알만 골라내. 그리고 은행알은 우유팩에 넣고 전자레인지에 밥 데우는 시간만큼 돌리면 잘 까진대. 나두 얼마 전에 누구한테 배웠는데 이번에 그렇게 해 보려구.."
노인은 은행알을 주워 막내딸에게 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내(나이)가 노인의 막내 딸만해 보인다고 했다. 나는 노인이 우리 엄마만 하다고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노인의 막내딸은 인근에서 대학을 나와 부잣집 아들을 만나 결혼을 했고, 평생 직장생활 한 번 안 하고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손주, 그러니까 막내딸의 아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며 자랑을 한다.
우리 엄마도 자랑을 할까. 노인은 자랑할 거리가 있지만 우리 엄마는 그럴만한 것이 없을 것 같다. 나는 그럭저럭 사는 남편 만나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을 하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우리 엄마와 아버지는 자나 깨나 손주들이 걱정이다. 사실은 손주들 때문에 힘들 막내딸이 걱정이겠지만. 정작 나는 아이들에 대해 별로 걱정이 없는데도 말이다.
사실 나는 아이의 용기가 대견하다. 내가 선택하고 들어선 길이지만 아니다 싶을 때 다른 길을 선택할 용기.. 나는 한 번 선택한 길은 죽으나 사나 가봐야 한다고 믿었다. 그 길이 가시밭이고, 똥밭인걸 알면서도. 나는 산에 오르면 어찌 되었든 끝까지 올랐다 내려와야 한다고 믿었다. 중간에 힘이 들어 그대로 산을 내려오는 건 낙오자나 하는 짓이라고.. 그런 정신 자세로 살면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될까 두려워 죽을 둥 말 둥 산의 정상을 찍고 내려오고자 했다.
차라리 산의 정상까지 오르는데 방점을 찍기보다 산을 오르고 내리며 만나는 나무들, 꽃들, 바람과 향기와 사람들에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산을 오르내리는 일에 재미를 붙여 더 자주 산을 찾고 종내는 산의 정상까지 오르는 일도 수월하게 잘하게 되지 않았을까..
여유를 가지고 살피고 둘러보며 살았다면 더 재미있고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뭔가 재밌고 즐겁게 살고 싶은데 막상 재밌는 게 뭔지, 어떻게 살아야 즐거운지 몰라서 결국 살던 대로 사는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질 때가 있다.
노인의 막내딸은 나랑은 삶의 모습이 다른 것 같다. 그러나 노인과 우리 엄마는 닮아도 너무 닮았다. 잘 사는 막내딸을 둔 노인이나 그럭저럭 사는 막내딸을 둔 우리 엄마나 막내딸들을 위해 구부러진 허리로 한 알 한 알 냄새나는 은행알 줍기를 마다하지 않는 황금색 그 마음이 닮았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노인의 막내딸과 나도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은행알을 줍는.. 노인과 엄마처럼 꼭 닮은 사람이 되어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