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쿠키 4시간전

 이참에 혼자 살아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어떤 말도 어떤 위로도 건네지 못했다. 어차피 그녀는 공감 따위를 바라지 않았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공감은 공(空)감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갔음을 고백했다.  그녀는 얼마 전 유방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 모든 게 제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동안 돌보지 못한 아이들과 늘 조마조마하게 확신과 불안함을 오가며 외줄 타기 하듯 가슴 졸이며 살았던 그녀에게 완치 판정은 안도감과 함께 해방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손바닥만 한 종이 하나 때문에 겨우 탈출했던 지옥 언저리에서 진짜 지옥으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이 모든 건 예상치 못한 영수증 하나를 그녀의 남편 우와기 안주머니에서 발견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녀는 계절이 바뀜에 따라 드라이클리닝을 해줘야 하는 마이나 양복 같은걸  세탁소에 맡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탁물을 가지고 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각각의 옷에 달린 주머니들을 손을 넣어 훑었고 대충 구겨진 영수증 하나가 그녀의 남편 양복저고리 안주머니로부터 그녀의 손에 끌려 나왔다.


그냥 버릴까 하다가 혹시나 싶어 펼쳐본 영수증은 보름 전쯤 oo극장에서 결제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으며 그날은 그녀가 서울로 정기검진을 받으러 간 날이기도 했다. 그날 그녀의 남편은 세미나가 있어 출장을 가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와의 병원으로의 동행을 난처해했었다.


그녀는 남편이 퇴근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난 후에 TV를 보다가 느닷없이 물었다.

"자기야, 요즘 oo 영화가 핫하다던데 우리 영화 보러 갈까?"

그녀의 남편은 잠깐 눈동자가 흔들렸고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나 요즘 너무 피곤해.."


그녀는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이후의 일은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생각을 뒷받친할만한 증거 같은 걸 찾는 지루하고도 가슴을 옥죄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블랙박스를 뒤졌으며 남편의 가방과 주머니 등 어딘가에 흘려놨을 흔적들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녀는 문득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지.."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져서 스스로를 괴롭혔다. 건강하기만 하면 세상을 다시 찾을 것 같았고, 제2의 인생으로 여겨 착하고 덕있게 살리라 기도하고 다짐했었다.


그녀는 마침내 그녀의 남편의 핸드폰이라는 판도라를 열 기회를 맞았다. 냠편의 핸드폰이 늘 지문으로 꼭꼭 잠겨져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천우신조가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그녀와는 다르게 키가 아담하고 긴 생머리를 한 마치 처녀 같은 행색을 하고자 애쓴 흔적이 역력한 어떤 여자의 얼굴과 불현듯 마주쳤다.  낯선 여자가 그녀의 남편과 그녀보다 더 다정하고 애틋하게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현실을 목도하고 보니 몸이 덜덜덜 떨려왔다. 차마 계속 읽어 내려갈 자신이 없어 핸드폰을 닫았다.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그녀가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고 암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고 정기적으로 서울을 오락가락하는 동안 그녀의 남편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녀 앞에는 너무나 또렷한 증거가 뻔뻔하게 얼굴을 빠짝 치켜들고 있었다.


대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는 그 남자를 만났다. 그녀는 졸업반이었고, 그 남자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대학생활 4년 동안 남자친구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원거리 미인 또는 뒤태 미인이라고 불렸다. 그녀가 여름방학 쌍꺼풀 수술을 하고 나타났을 때 친구들은 그녀의 달라진 얼굴과 인상에 대해 그리고 차차 그녀의 인생을 바꾸게 될 의술에 감탄했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친구가 생겼고 우리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머지않아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그녀는 졸업과 동신에 그녀의 남자친구를 위해 돈을 벌었고,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헌신으로 무사히 박사과정을 마치고 교수가 되었다. 그녀는 내조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를 좋아하는 그녀의 남편을 위해 철철이 배추김치며 열무김치, 알타리무 김치, 김장김치 등등을 담갔다. 갓김치, 고들빼기김치 같은 별미 김치는 물론이고 나는 듣기도 처음이고 먹어본 적은 더더욱 없는 고구마순 김치,  호박김치 등을 담가 입맛 까다로운 남편의 밥상에 올렸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그저 감사한 마음과 헌신과 노고에 합당한 말 한마디면 족했지만 보답은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성공한 남편의 아내였으며 입 짧고 까탈스러운 남편과 어쩌다 보니 세명으로 늘어난 아이들의 엄마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전업주부로 살았다.


그녀가 그와 결혼을 해야겠다 결심한 이유에는 그의 아버지가 학교 교장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이 한몫을 했다.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러다 보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스스로 생각하는 아버지 상에 늘 목말라했다. 교육자 집안이니 최소한의 예절과 양심, 태도 등은 갖추어져 있으려니 믿었다. 그러나 시부님은 그저 직업이 교사였을 뿐  교사로서의 본보기가 될 어떤 게 부재했고 시어머니는 쇼핑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시부모님은 두 분 다 자녀들에게는 별 관심이나 애정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시댁의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했다. 늘 충족되지 못한 애정에 목말라하는 남편으로 인해 애정에 목마르기는 마찬가지였던 그녀는 늘 심신이 피로했고 허기를 느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녀는 남편과 달리 가정에 충실한 대가로 아이들과 책을 읽고, 아이들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언어에, 정서에, 관심사에 갭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의 남편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동그랗게 눈을 맞춰줄 이야기 상대가 생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녀에게 말이 안 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 사이에 밴 생활의 냄새가 주는 안정감과 익숙함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이를  쉽게 저버린 남편을 그녀는 매우 애석해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 관한 이야기는 흔히 주변에서 듣는 이야기와 별로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여전히 함께 살지만 마음에 커다란 흉터를 지닌 그녀는 여전히 내상을 치료 중이고, 그 치료는 평생 동안 이어진다 해도 결코 온전히 치료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불쑥불쑥 울었다. 웃으면서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시작해도 결국 꺼이꺼이 울었다. 그녀의 남편은 알고 있을까? 그녀가 친구 앞에서 어떻게 말을 삼키고 울음을 쏟아내는지..  그녀가 자신의 허물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쏟아내고 쏟아내도 마음속은 여전히 허허롭고 슬픔은 덜어질 기미도 보이질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의 남편을 대하고 여전히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온갖 이름의 김치를 담근다. 그녀는 남편의 교수실에 걸린 노을 진 바닷가 풍경 사진 속 실루엣이 누구라는 걸 알지만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한다.


그녀가 한참을 울다가 고개를 들어 내게 말한다.

"우리, 남편들 먼저 가면 함께 살래?"

나는 느닷없는 친구의 말에 놀라 묻는다.

"함께 살자고?"

"그래, 한 집에서 함께 살자고.."

나는 웃으며 말한다.

"남편들이 먼저 간다는 보장 있어?"

"글쎄.. 그렇지만 나는 오래오래 살아남을 거야.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거잖아." 결연한 표정의 친구가 애처롭다기보다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살아남은 자가 이긴다는 말이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지 감이 오질 않는다.

나는 정색하며 대답한다. "안 돼. 내 소원이 뭔데.. 나 혼자 살아보는 거, 그게 내 소원이잖아!"

"맞다, 우리 어릴 때 소원이 혼자 살아보는 거였네.. 이참에 나 한번 혼자 살아볼까?!" 친구가 헤벌쭉 웃는다.

작가의 이전글 장구봉에서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