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온실 수리 보고서 | 김금희

얼음을 녹이는 온기는 사실 얼음 속에 숨어 있다.

by 유영운

- 제목: <대온실 수리 보고서>

- 저자: 김금희

- 장르: 장편소설

- 분량: 416쪽

- 독서 기간: 2025년 2월 28일 - 3월 2일 (재독이라 빠르게 읽었다.)

- 별점: ⭐️⭐️⭐️⭐️⭐️

- 한 줄 평: 얼음을 녹이는 온기는 사실 얼음 속에 숨어 있다.

- 읽게 된 계기: <너무 한낮의 연애>로 시작해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 너무 몰입해서 읽다가 내릴 역을 놓친 기억이 있다. -, <식물적 낙관>을 읽으며 애독자가 되어, 이제 김금희 작가님의 신간은 당연히 읽는 것이 되었다. 작년에 완독한 책이지만 창경궁 대온실에서 북토크가 열린다는 소식에 도서 감상 후기 응모를 위해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보지 않았던 부분들이 새롭게 보이면서 책을 다시 읽는 기회 자체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조만간 <나의 폴라 일지> 독후감도 올릴 계획이다.


아래의 내용부터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 책 속 문장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을, 걔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물론 동대문시장까지 밤의 자전거를 타고 오가던 계절에는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p.157

그러자 당연한 수순처럼 순신이 수난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 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그 얼음 나중에 녹아 없어지기는 하는 거지?" 순신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사람이 순신이라서 힘주어 말했다. p.158

"소목이 영두씨는 자기 세계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그랬거든. 시간이든 생각이든 한번 하고 버리는 게 아니라 남겨두었다가 거기에 다시 시간과 생각을 덧대 뭔가 큰 걸 만들어가는 사람 같다고.” p.163

정과장 말처럼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하지만 질서에는 어긋날 것이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는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한쪽을 묻어버린다면 허술한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p.209-210

정확히 일년 전, 복잡한 마음으로 안국역에서 걸어나와 창경궁으로 향했던 게 생각났다. 지금은 달랐다. 가는 목적은 일하는 사람에 꼭 맞게 단순했고 감정의 결도 단정했다. 나는 간결한 내 마음이 마음에 들었다. p.322

나는 설명하고 싶었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부스러기처럼 우연과 발견이 이어져 도착한 이 결과에 대해. p.343
우연에 감사하는 순간 그건 신비가 되니까 더욱 특별했다. p.374

“아니란다, 영두야. 그건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들이 언제나 흐르고 있다는 얘기지.” p.403


- 줄거리

건축사사무소에서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 영두. 소설은 그런 영두가 동료들과 함께 대온실 지하에 묻혀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 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은 대온실의 공사 책임자였던 후쿠다 노보루가 걸어온 농업 원예가로서의 삶, 잔류 일본인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살아낸 마리코 문자 할머니, 차갑게 침전된 영두의 어린 시절, 그리고 칠판이나 담장 같은 아이가 되어버린 스미의 아픔까지 모두 파헤치고 결국에는 다시 세운다. 소설 속 인물들과 한때 외면한 시간 속에 숨어있는 온기와 다정함을 발견하는 독서 과정은 이 소설만이 건넬 수 있는 일종의 위로가 아닐까.


- 느낀 점

영두는 강화보다 더 춥게 느껴져 지워버렸던 장소를 다시 찾고, 이후 자연스레 들르며, 마침내 담담히 말할 수 있는 간결한 마음에 닿는다. 그러나 그 마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우연의 연속이자 신비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트럭에 치이고도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아버지, 누군가의 말투를 빌려 더 어린 동생을 돌보는 아이, 낯선 이의 배고픔을 알아차리고 생선을 건네는 상인, 같이 산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이 되어가는 사람들, 다문 입 너머의 마음을 알아보는 친구까지. ‘낙원하숙’은 지명에서 따온 이름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일종의 낙원(樂園)으로 기억될 것 같다. 가장 추운 순간 따뜻함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은 얼음을 녹이는 온기가 결국 얼음 속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소설이 말하는 인간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한 시절의 최선은 회환 없이 온전히 이해되리라 믿으며 책장을 덮는다.


IMG_5047.heic 좋은 문장에 표시하다 보니 북마크가 이렇게 많아졌다. 뽐내지 않지만 담백하게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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