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타고 영양제 몇 알을 주어먹었다. 출근은 하지 않으니 버릇처럼 노트북을 켜고 음악을 들으며 일기장을 폈다. 나는 7년째 일기를 썼다. 7년 동안 매일같이 썼다는 말은 아니고 꾸준히 쓰다 말 다했다. 그러다 근 4년 동안은 매일 책상 앞에 앉아 일기를 써 내려갔다. 어떤 날은 몇 줄을 쓰다 덮은 날도 있었지만 또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일기장을 펴고 책상 앞에 앉기도 했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은 지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는 몇 개의 단어와 그리 길지 않은 문장들을 계속 써 내려갔다. 이것들은 내게 일기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기도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처음 펜을 잡았을 때보단 모든 게 나았다.
그런다고 글로 눈을 돌리진 않았다. 오히려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켜고 몇 개에 공고에 지원했다. 이번엔 좀 다르리라 기대하면서 마음도 좀 다잡았다. 한번 진창에 빠졌다고 해서 계속 빠지리란 법은 없으니까 하고 되뇌었다. 그저 운이 좀 없었다고 생각하자. 따지고 보면 내 계획은 계속 진행 중이었고 말이다. 그러니 적당히 괜찮다 여겼다. 굽은 길 하나 없는 인생은 없다고 혼자 위로했다.
그런데 인생 참 고되더라.
앞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오래 한 사람을 바란 적이 있다고. 이 무렵엔 만약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그런 사람을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많이 지쳤다. 매일 12시간씩 고된 노동에 시달렸었고 일 보다 사람의 악랄함에 여러모로 진저리가 쳐졌다. 어쩌다 글이 떠오르면 멀리 시선을 던질 만큼 머릿속도 여러 갈래로 나뉘기 일 수였고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 은근슬쩍 뒷목을 움켜잡았다. 그렇다고 털썩 주저앉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부로 사람을 봤다. 새로운 관계를 기대했고 또 노력한다면 보통의 관계도 어쩌면 스칠 인연도 남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다 한 사람을 만났다. 시작부터 어딘가 잔뜩 비틀리고 어긋난 것 투성이었지만 작은 건 그냥 묻어두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모든 관계는 완벽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착각했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모든 걸 이해해 주자고 혼자 결심하기도 했다. 이번만큼은 꼭 그렇게 해주자고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내가 참고 또 참으면 이전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거라고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럼 너를 무력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 과거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반복되는 거짓말에도.
뻔히 의도가 읽히는 흠집 내기에도.
나를 깎고 저를 세우려는 저열한 방식에도 그저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쩔 땐 일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고 또 어쩔 때는 아직 나를 잘 몰라서 그런거 라고 넘겼다. 원래 상처가 있는 사람은 의심도 불안도 습관이 되니까. 이제 상처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나를 그렇게 대해도 이해해 주고 싶었다. 내가 조금 더 솔직해주면 서로의 상처를 이해해 주고 돌봐주면서 일상의 작은 부분까지 공감하고 교감하는 관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바란 적도 적지 않았다. 과거 친구 녀석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사람과도 결국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오만한 기대를 했다.
그래서 결국 모른 척 눈을 감았다.
아무리 큰 상처를 가졌다 해도 누군가의 도움이 있다면 기꺼이 디딤돌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손길 중에 하나가 되고 싶었다. 성격과 취향이 달라도. 먹고 입는 옷이 달라도. 어쩌면 맞지 않는 걸음일지라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존중하며 걸을 수 있지 않을까 계속 기대를 품었다. 그런데 그것조차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게 그냥 웃겼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아아......하고 깨달았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고 나는 그저 운이 없었구나 생각했다.
억지로 손에 쥐고 있던 시간들이 정리되자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건 그녀가 날 속여서도 아니고 내가 속고 있다고 착각해서도 아니었다. 또 그간 내 뒤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끝을 모르고 질주하는 여자의 삶이 안타깝고 또 안타까워서 자꾸 속이 상했다. 결국 이런 선택을 하고야 마는구나. 그래서 당신은 정말 만족하냐고 묻고 싶었다. 원하던 대로 집어 삼키고 손에 쥐어서 마음껏 행복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녀는 아직도 내가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다는 걸 모른다. 내가 어째서 모든 것에서 물러나 조용히 입을 다물고 멀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솔직히 그녀가 모르길 바라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저 누군가는 멈춰야 하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그녀도 알았으면 했다. 그곳에 있는 내내 마지막을 준비했음을. 줄곧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오래 눈에 새기려고 노력했음을. 그래서 마지막 날까지 아무렇지 않은 듯 장부에 날짜를 적고 하루를 시작하는 메시지를 적었다는 걸. 애써 모든 것을 모른 척했던 나는 떠나지만 여전히 남게 될 이들을 위해서. 그곳에 있을 당신을 위해서. 내가 떠나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보통의 하루를 살기를.
속에 칼을 품은 삶이 편할리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평안하길 바랐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