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달, 열두 주제 ― 지노
내가 처음부터 의도한 건 이 월간지 활동을 통해 나 스스로가 아카이브를 관리하면서 쌓은 기록에 관한 지식을 글로 정리하고, 그것을 신임 아키비스트 그리고 관심 있는 모두와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의 콘텐츠는 아카이브 소장기록을 설명하는 도구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의집은 개관 이후 다양한 전시를 열어 소장기록을 외부로 공개해 왔지만 이러한 아카이브의 설명작업은 더 기초적이고 소장 사료 전반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저 남겨져 있을 뿐 정리되거나 설명되지 않은 기록은 파기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용자가 사용할 수 없다.” 나는 이 말에 굉장히 공감하는데 그건 이런 노력 없이 아카이브가 제대로 활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는 한국 근현대사를 포괄하고 있다고 할 만큼 넓고 다양한 범주에 걸쳐 기록이 있고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설명작업은 불가능하다. 다만 “최근 몇 년간의 아카이브 작업 성과를 토대로 우선적인 열두 개의 세부 주제에 초점을 둔다면 시범적으로나마 해볼 만하지 않을까” 이렇게 문제는 우리가 함께 다룰만한 주제를 구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내 머릿속에 좁혀졌다.
시작 상황에서 콘텐츠플러스의 일원 대부분은 월간지를 내는 일도 늦봄 봄길에 관해서도 서툰 상태였다. 우리는 당장 늦봄과 기록에 익숙해지는 것부터 필요했다. 나는 기록과 생산자에 관한 이해를 돕는 데 주력했다. 문익환 전집 12권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전집 목차를 분석해 정리한 엑셀표, 늦봄 아카이브 기록 현황을 보여주는 분류체계, 핵심 기록 군 정보를 제공한 채 기다렸다.
그 사이 첫 달 주제가 <시인 문익환>으로 정해졌다. 창간호가 3월 호라 ‘시인’ 늦봄 문익환을 조명하는 내용으로 꾸며도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각자가 세부 주제를 정해 전방위적인 공부를 토대로 콘텐츠를 생산해 냈다. 첫 결과물을 낸 이후 모두들 약간은 안도와 앞으로의 여정을 희미하게 그리는 듯했다. 편집장 백총은 3월호를 마감하고 두 번째 주제 회의를 예고하며 이번에는 조금 긴 계획을 준비해 올 것을 숙제로 냈다. 나는 내심 “이제 때가 되었구나”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두 번째 주제회의를 준비하며 다양한 주제 후보들을 떠올려보았다. 아카이브 기록분류체계는 생산자를 기준으로 다양한 활동을 더한 기준이다. 이전에 늦봄편지집을 만들 땐 통일의집 사람들과 편지의 주제로 “감옥과 편지, 삶과 지혜, 사랑과 용서, 몸과 마음, 시와 기도, 양심과 정의, 화해와 통일, 생명과 평화”로 구분했었다. 또, 옥중편지 텍스트 어휘분석 프로젝트를 할 때 추출한 단어를 “감성, 민주통일, 신학, 가족”으로 구분해 말구름을 만들었던 경험도 떠올랐다. 한참 TV예능에서는 ‘부캐’가 유행일 때 문익환 목사야말로 부캐부자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던 기억도 났다. 그때 사랑꾼 이미지 말고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부캐들을 아카이브가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고민했었다.
생각의 흐름을 따르다 보니 매월의 주제는 다양한 요인들을 두루 포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늦봄의 활동과 기록이 포함하고 있는 주제들, 다양한 기록 유형, 늦봄의 다양한 부캐까지 조합돼도 상관없다. 통일의집 사람들과 만들었던 주제도 좋았지만 그들은 늦봄과 너무 가까운 사이라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주제가 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범주에서 4월부터 내년 2월까지 다뤄보고 싶은 주제들을 적어보고 또 문서로 정리해 보았다.
나의 제안에 관한 반응들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콘텐츠플러스 회의록을 다시 들춰보니 그날 회의에서 먼저 4월과 5월호에 적합한 주제로 ‘청년’과 ‘가족’이 선정되었고 나머지 것들은 잠정적인 향후 주제로 기록되어 있다. 콘텐츠플러스는 이후 새로운 달이 시작될 때마다 그달의 상징성과 늦봄 활동과 기록현황을 고려해 열띤 논의를 거쳐 주제를 확정했고 그렇게 열두 달 열두 주제, 시즌1이 완성되었다.
주제가 정해진 이후에도 토의는 이어진다. 큰 주제 속에 각자만의 다양한 시각이 가미되며 흥미로운 콘텐츠들이 조화롭게 구성되었다. 매월 나는 주로 ‘기록으로 본’ 주제 콘텐츠를 맡아 주제와 관련된 기록현황과 다양한 맥락들을 글로 정리해 냈다. 시즌1을 진행하던 때를 생각하면 무엇보다 우리들의 회의가 떠오른다. 자발적이고 느슨한 형태로 작업하는 우리 일의 성격상 회의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한 관문일 수밖에 없었다. 매주 회의로 공동작업을 지켜가고 각자 상황을 공유하며 주제의 결을 맞춰왔다고 생각된다. 물론 화기애애한 속에서 무언의 압박과 긴장을 못 느꼈다면 그건 거짓말.
글쓴이_지노
초대 늦봄 아카이브 아키비스트. 늦봄과 봄길 편지를 정리하며 기록 관리에 ‘마음’이 깃들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때때로 잠이 안 올 때 늦봄 아카이브에서 편지를 찾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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