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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althy 웰씨킴 Oct 26. 2024

번아웃 자아성찰 - 두 번의 장례식에서 깨달은 것들.


죽음, 그리고 살아있음에 대하여


번아웃을 겪는 동안 총 2번의 장례식을 다녀왔다. 한국에 돌아온 후 번아웃 증상이 심해지면서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며 무기력함이 가득했던 그때 20년 지기 친구의 부친상 소식을 들었다. 삶의 무용함을 느끼며 그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친구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현재 나는 살아있고, 그의 곁엔 아버지가 떠났으니 나의 정신적 고통보다 그 친구가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짐박스가 도착하지 않아 옷과 신발 그리고 벙거지 모자까지 검은색으로만 맞춘 채 시외버스를 타고 또 시내버스를 타서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 몇 년 전 보았던 모습들보다 조금씩 더 나이가 느껴졌지만 학창 시절 만난 친구들은 그 모습이 언제나 머릿속에 더 강렬하게 남아있어서 그런지 나이를 잊고 그때로 돌아간다. 그중 한 친구가 나를 보며 "저승사자가 온 줄 알았다"며 왜 이렇게 어둡냐고 물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던 나에게 어두움이 묻어났던 것일까. 그 친구의 한 마디로 나는 더 밝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짐이 도착하지 않아 검은색을 맞추다 보니 화장도 못하고 그냥 와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며 둘러댔다. 그러나 그 모습은 화장으로 감춰질 수 없는 내면에서 풍기는 분위기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괜찮아 보이고 싶었다. 


유골함을 모셔두는 장소까지 모두 함께 가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다 같이 고깃집에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나의 행색이 너무 남루했었던지 어디 아프냐는 말을 여기저기서 물어왔다. 괜찮다고 하는데 왜 다들 안 괜찮은지를 묻는 것일까. 마음이 더 불편했지만 더 밝게 웃어 보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몇 년 동안 무표정이 대부분이었던 얼굴에서 갑작스러운 미소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결국에는 입가가 찢어지고야 말았다. 고기를 먹는 내내 찢어진 입술이 아팠고, 내 마음도 아팠다. 오지 말 걸 그랬나...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에 잠시나마 현실에서 겪는 번아웃의 고통을 잊을 때도 있었다. 힘이 되어주기 위해 온 곳에서 내가 힘을 얻고 가는 순간이었다. 감사한 순간.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1년 동안 나만의 동굴에 갇혀 살았다.

안타깝게도 묵혀온 번아웃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에 온 지 3년이 지날 즈음, 번아웃의 굴레에서 거의 벗어난 듯한 때 또 한 번의 부친상 연락을 받게 되었다. 대학교 시절 함께하며 많이 의지하고 아끼던 친구의 아버지를 잃은 소식에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첫날은 가족들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리고 추억, 슬픔과 사랑을 온전히 나누길 바라며 다음날 낮에 빈소를 찾아갔다.


3년 전보다 밝아진 얼굴색, 검은색 외투와 바지, 구두, 그리고 이제는 벙거지를 쓰지 않고 사람들의 눈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건강해진 상태로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비슷한 여정의 3년 전과 비교해 보니 살아있음에 감사했고 살아줘서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빈소 입구에서 맞이하는 친구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친구를 꽉 안아주었다.

"미안하다. 나 살자고 그동안 연락도 없이 챙겨보지도 못했다. 미안해."

눈물을 참으며 건넨 나의 말에 친구는 "다들 바빠서 그렇지, 나도 그런 걸 뭐. 괜찮아."라며 미안해하는 나를 위로했다. 함께하며 좋은 일도 재미있는 일도, 처음이었던 일들도 많아서 대학시절의 추억으로 이어온 친구를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니 감정이 휘몰아쳤다.

"앞으로 더 자주 보면서 살자." 이 말을 건넨 후 부친께 부디 평안하게 쉬시고 친구와 가족들을 잘 보살펴 주시라 기도하며 인사를 드렸다.



인연. 만나게 되는 사람.


바로 가려던 나에게 친구는 잠시 앉아 이야기를 나누자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혼자서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사람들이 많을 저녁 시간을 피해 일부러 낮에 방문했지만, 이틀차 낮 시간에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참 다행이면서도 감사한 일이라 생각했다. 친구도 친구의 가족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을 곁에 많이 두어 힘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른 입을 적시기 위해 음료를 한 잔 하며 앉아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10여 년 만에 만나는 대학 친구 N이었다. 여전히 발랄한 목소리와 귀여운 얼굴로 나이라는 숫자만 더해진 그 친구는 대학시절에도 자유분방해서 모임에서 보기 어려웠지만 경조사에는 꼭 참석하는 마음 깊은 아이였다. 반가운 마음에 안부를 물으 여전히 특수학교 선생님으로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고 싱글라이프를 즐기며 자기만의 색으로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나의 색으로 다시 잘 살아봐야겠다는 좋은 자극이 되었다. 고맙다 N아!


내가 오기 바로 전, 대학 친구 C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고, 나는 계단으로 내려와서 간발의 차로 만나지 못했던 상황에서 오늘은 아무도 못 보고 갈 줄 알았지만, 오후 5시  시간에 N을 만나고 가는 것을 보면 만나게 될 인연은 언제고 만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를 통해 나를 깨닫는다.


대화를 나누며 N의 부모님은 건강하신지 가벼운 안부를 물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N은 "어차피 한 분 밖에 안 계시니까 지금 엄마는 건강하세요."라고 답했다.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유학가 있던 동안 건너 건너 소식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내 생활에 바빠 그것도 잊고 있었구나. 아끼는 이의 힘든 순간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속상함이 묻어난 눈물이 눈가에 맺힌다. 한국에 있었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함께했을 그 시기를 또 놓쳤구나.

마음으로 한 번 더 안타까움을 삭이며 "너는 그래도 그 힘들었던 상황을 참 덤덤하게 말하는구나. 마음이 참 단단한 것 같아."라고 N에게 말했고, 그 순간 N의 대답이 나의 머리를 치는 듯했다.

"매번 울면서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 친구의 말에 나는 과거로 돌아가버렸다. 힘든 순간에 애써 괜찮다 말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할 수 있는 척을 해내며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던 과거의 나. 그 당시 나를 만나 인연이 된 이 친구들은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보면서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인의 우는 모습만 보아도 따라서 눈물이 나고, 나의 고달픈 삶을 이야기하자면 또 눈물이 나고, 다른 사람이 울려고 입을 삐죽이는 모습만 봐도 먼저 눈물이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은 20년 전의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오십에 읽는 논어>에서 “공자 왈,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중 선한 자에게선 선함을 따르고, 선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나를 고치면 된다.”라고 한 것이 떠올랐다.

사람이기에 상호작용을 통해 느끼고, 배우고 또 성장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었지만 교류를 단절하고 살았던 몇 년 사이 나는 내 감정에 너무 연민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래, 몇 년 사이 나는 눈물이 과해졌다.

흘리지 않아도 될 때, 아니 적당히 흘려도 될 때에도 내 감정에 취해 왈칵 쏟아져 버리는 눈물. 제어할 수 없이 고장 난 수도꼭지와 같았다. 나의 감정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까, 눈물로써 스스로 고생했다 위안하기 위함이었을까. 그 시작이 무엇이었든 지금의 나는 내가 원하지 않을 만큼 과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한 변화를 알고 있었지만 차마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N의 말을 계기로 현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것을 기점으로 고장 난 눈물의 수도꼭지를 수리하기로 했다.

37년간 흘린 눈물의 양보다 최근 3년 사이에 흘린 눈물이 더 많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픔과 슬픔, 고통을 흘려보냈다고 생각해도 된다. 나이보다 더 의젓하고 강인했던 10대, 20대 시절의 나의 모습처럼, 이제는 담담하게 슬픔을 받아들이고 속으로 삭이는 모습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씨가 마른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눈물은 더 많은 눈물샘을 자극할 뿐이었다.

더 나약해지기 전에 멈춰야 한다. 눈물이 나의 삶을 삼키기 전에.  


번아웃이 심했던 시기, 그리고 번아웃의 극복 단계에서 조문한 장례식장에서 나는 두 번의 성찰을 경험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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