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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althy 웰씨킴 Oct 06. 2024

돌아보니 나는 생각보다 더 강한 사람이었다.

번아웃의 시작은 순두부였다


연꽃이 되고 싶은 사람


인생을 살며 나라는 꽃 한 송이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하고 끝날 수 있다.

그래서 더 격렬하게 씨앗이 움트길 갈망하고 필요보다 더 많은 물을 주며 꽃이 만개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속에서 곪아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곪은 채 싹을 피워가는 꽃은 언젠가 썩어 문드러지게 되어있다.

그것이 인생에서는 번아웃이라 생각한다.


번아웃을 겪는 몇 년 동안 어린 시절의 나부터 지금의 나까지 되돌아보며 나라는 존재는 한 없이 나약하고, 여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대면하지 않고서는 타인의 나약함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는 사람 또는 힘든 시기를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신력이 약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장담했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 내 생각과 다른 나를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만과 오만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강해 보이는 겉모습을 만들기 위해 쉽게 으깨질 수 있는 순두부 같은 내면을 감춰온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기찻길 옆 오막살이 그것이 나의 시작이었다.


1983년 태어나길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았던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머리 양쪽에 뿔을 달고서.

어머니는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 산통을 느껴 기찻길 옆 셋방 살던 집으로 돌아왔고 주인집 할머니가 나를 받아줬다고 한다.

갓 태어난 아이가 크게 울지도 않고 머리에는 혹이 두 개가 있어서 두 사람은 기쁨보다 두려움이 컸다고 한다. 괴물을 낳은 것이 아니냐고.

병원비를 빌려 의사에게 찾아가 물어보니 "이 아이는 장차 크게 될 아이니 절대 나쁜 생각하지 말고 잘 키우라"라고 했단다. 어머니는 작은 머리에 큰 혹이 두 개나 있는데 기형아라면 키울 엄두가 안 난다며 걱정을 토로했고, 의사는 "아기가 뱃속에서 많이 놀란 상태였던 것일 뿐 돌 전에는 다시 들어갈 테니 걱정 말고 돌아가라"라며 안심시켜 주어 나를 버리지 않고 키우게 됐다고 한다. 다행히도 의사의 말처럼 두상의 혹은 1년 이내에 가라앉았고 나의 두상 양쪽은 현재 납작하게 모양이 잡혀있다.

훗날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시며 임신 중 잦은 부부 싸움과 폭행으로 복중에서 많이 놀라서 그랬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셨다.  

그것이 내가 진흙밭에 뿌려진 씨앗의 시초였다.




향냄새 가득했던 그곳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허름한 창고 건물 한편에 마련된 5평 남짓 쪽방에서 6명이 살았다. 아!,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으니 5명이 살았다고 해야겠다. 문을 열면 아궁이 주방을 지나 방이 있었는데 마음이 힘들고 의지할 곳이 없었던 어머니는 방 한가운데 신당을 모셔두었고 향냄새가 항상 온 집안에 배어있었다. 7살의 어린 내가 보았던 방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그 장면이 평범하지는 않았던 것이겠지.


노란 가방을 메고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혼자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던 7살 즈음.

여름에도 항상 얼굴은 터서 버짐을 달고 있었고, 소매에는 노란 콧물을 닦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시절 나의 별명은 '씩냉이'였다.(경상도 말로 씩냉이는 안 씻어서 더러운 아이에게 하는 말이다)

어린 나이에도 "왜 나는 유치원을 안 보내주는지, 왜 우리는 먹을 것이 없는지" 투정 한 번 부리지 않았다. 이미 그 이유를 보고 있었으니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때 이미 알았다.




나에게도 봄이 왔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진흙밭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매일 깨고 부수고 욕하며 싸우던 부모님이 드디어 이혼을 결정하셨다.

12살 평생에 가장 기쁜 날이었다.

사실 나는 무수한 밤을 기도했었다. 제발 서로 헐뜯고 싸우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드디어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편부 편모의 이혼가정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무시가 심했던 시절임에도 나는 오히려 괜찮았다.

어머니는 홀로 사시면서 조금씩 세상 사는 것을 배우며 진정한 자립을 해나가셨고 쪽방에 있을 때보다 더 당당하고 억세게 살아가실 수 있었다. 나는 친할머니댁에 맡겨졌기에 이상 부모의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좋은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었다. 안 싸우는 것은 어렵고 각자의 삶을 따로 사는 것이 더 쉬웠던 망가진 관계, 이혼은 모두에게 최선을 선택이다. 나는 지금도 두 분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리고 두 분 역시 당신들의 선택에 후회 없이 살아가고 계신 듯하여 감사할 뿐이다.





순두부가 강해지기로 결심한 날


중학교 1학년 사춘기가 왔을 즈음, 나의 존재 의미와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며 친구와 학교에 가지 않고 하루 가출한 적이 있었다. 가출이라고 해봐야 집 바로 뒷골목에 있는 롤러스케이트장이었고, 낮은 담장을 넘어 컴컴한 롤러장 시멘트 바닥 위에 뭉쳐 앉아 추위에 떨며 새벽을 지새웠던 것이 전부다. 어차피 집에서는 내가 가출을 해도 관심이나 걱정해 줄 사람이 없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다음날 집으로 들어갔지만, 학교에서는 원인보다 결과에 관심이 있었던 학생주임이 가출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뺨을 내리쳤다. 모멸감과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주는 것으로 선도를 하는 것이 그의 방법이라면 성공했다. 나는 "절대 그와 같은 어른은 되지 않기로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하고, 이런 수모를 겪지 않도록 제대로 된 선택을 하며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순두부 같은 내면을 숨기며 조금씩 강하게 보이는 사람으로 만들어 갔다.


갈라진 진흙밭 사이로 더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는 시간을 보내면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와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등 자기 계발서와 동기부여 책을 읽으며 나처럼 힘들게 자라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멘토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 꿈은 대학교 졸업 전 HR 회사에 며 조금씩 이루게 되었다. 커리어 컨설턴트로 길로 접어들어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중장년층까지 취업을 위해 고민하는 대상이 있다면 컨설팅과 강의로 그들의 의지를 응원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새로운 도전 그리고 번아웃


경력이 안정되었을 즈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동안 꿈꾸던 대학원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세계적인 멘토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토익 200점대 수준의 영어 실력으로 워킹홀리데이부터 어학연수 프렙 과정을 거쳐 장학금을 받고 HRM 대학원에 진학했다. 공장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힘든 나날이었지만 앞만 보고 내달렸다.

이제 다 잘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안고 호주에서 취업을 준비했지만 졸업 시점에 Covid-19가 시작되면서 면접 진행 중이던 곳에서 보류하였고 국경 봉쇄와 사업 축소로 인해 채용 시장이 얼어버렸다. 1년 넘게 기다렸지만 경기 침체는 장기화 추세를 보였고 그 상황에서 나는 큰 목표를 달성 후 다음 목표가 무산되니 허무함과 무기력이 밀려와 기운이 쭉 빠졌다.

그렇게 순두부 같이 깨지기 쉬운 모습이 다시 밖으로 나와버렸다.


사실 대학원을 들어가면서부터 조금씩 시작되었던 무기력감과 우울감, 의욕 상실 등은 번아웃의 초기 증상이었음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졸업 후 1년 넘게 HR분야에서 취업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오가닉 푸드 공장에서 팩커로 일하고 있다는 것에서 성장보다 퇴보를, 자신감보다 자괴감이 커지면서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갇히고 있었지만 무시했었다.

겉으로는 고고한 연꽃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진흙밭 속에서는 뿌리까지 곪고 곪아 서 있을 힘도 없는 나.

괜찮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압박했던 것이 터져버린 것 같았다.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지쳐갈 즈음, 비행편이 막힌다는 소식에 한국행을 선택했고, 돌아와서 활기차게 시작해 보자 했었지만 한국은 백신을 맞지 않고서는 어디에서도 편안하게 다닐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나는 백신을 맞는 대신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혼자 지내기를 선택했다.

정신의 문제는 육체로 이어져 면역력 저하로 대상포진, 알레르기, 안과 질환, 위장병 등으로 병원 다니기에 진을 뺐고, 차량 침수, 주식 폭락, 부동산 투자 실패 등 재정적 손실까지 겹치니 뭘 해도 안 되는 때인가 보다 하고 낙담하며 그렇게 나는 번아웃이라는 그림자 아래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2년의 세월을 홀로 은둔하게 되었던 것이다.

2019년부터 시작된 번아웃, 약 5년 동안 인생의 최저점을 아니, 생과 사를 생각하는 시점까지 오가면서도 살아야 할 이유를 부단히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살기 위해 독서에 미쳐있었던 마지막 1년, 그 덕분에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힘든 일은 한 번만 오지 않는다.

그 빈도와 강도만 다를 뿐 누구에게나 역경은 오기 마련이다.


나에게는 그 역경을 이겨낼 만한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전에 없던 새로운 고난이 닥쳐올 때면 또다시 순두부 같은 모습을 덮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그런 의미로 나는 아직 인생의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에 있고, 오늘도 진흙밭에서 연꽃이 피어날 날을 기다리며 충실히 살아내는 중이다.


매일 독서를 하며 블로그에 생각을 올리는 과정 동안 온라인으로 나의 글을 읽고 또 공감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다시 살아볼 이유를 찾은 것이다. 나는 번아웃을 홀로 이겨낸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실상은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함께 이겨낸 것이었다. 그래서 글로 풀어내기로 했다.

나의 생각이 누군가에게 한 순간이라도 힘이 되고, 서로의 좋은 에너지를 나누며 응원해 준다면 나비효과가 되어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지켜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오늘 하루도 살아 낼 수 있도록.


나의 개인사를 글로 풀어내기까지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러나 번아웃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를 돌아보고 알아갈 수 있는 값진 경험을 하였기에 그 과정도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태생적으로 불안정한 존재였고 약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대단하게 살아야만 할 것 같았던 인생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살아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내 안에 중심을 두고 튼튼한 뿌리를 내리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번아웃이라는 힘든 시간이

자신을 찾아가는 값진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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