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형국 Dec 11. 2024

23. 아이에게 사랑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공감

아이를 키우다 보면 당연히 겪는 일이 '생떼'이다. 안 되는 것을 안된다고 이야기할 뿐인데 아이들은 그렇게 운다. 고집을 피운다.

둘째 : 나 저거하고 싶어!
아빠 : 지금은 안될 것 같아. 시간이 없어.
둘째 : 근데 나 저거 하고 싶다는 말이야!
아빠 : 아빠가 시간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우리 가야해.
둘째 : 아 아빠! 저걸 하고 싶다고 아빠!

무슨 이유든 설명이 안된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달래 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달래는 방법이 있을까?

사유는 중요하다. 육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울 때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달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우는 이유를 사유해야 한다. 당황하여 이것저것 쥐어주는 것보다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아이가 울면 우리에게는 ‘감정’이라는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분히 생각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다.


배고픔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급하지 않다. 배가 고파도 급하게 먹어 탈이 나는 일은 없다. 참을 줄 알고 침착하게 음식을 고른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자신의 장점으로 ’ 단식‘을 꼽았다. ’ 단식‘을 장점으로 꼽는 그를 보고 나는 실소했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그것을 장점으로 생각하는 이유를 듣고 난 후 나는 감탄했다. 그는 ’ 단식‘은 배고픔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 침착할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 배고픔에 휩쓸려서 급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돕는다고 하였다. 욕망을 지배하면 사람은 침착해진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우리가 욕망으로 이루어졌다면 그 욕망을 조절하면 이성적일 수 있다. 아이가 울 때 우리는 먼저 나의 ‘감정’에 집중을 하자. 나는 떼쓰는 아이에게 욱하는 마음일까? 나는 슬퍼서 우는 아이에게 당황스러운 마음일까? 미안한 마음일까? 그 감정을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 감정을 직시하는 순간 감정의 주인이 된다. 감정을 다스리면 그땐 생각을 할 수 있다. 흔히들 ‘아이가 울면 먼저 침착하세요!’라고 조언하지만 그 근본을 알아야 한다.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나의 감정을 파악하고 그 감정을 직시하여 잠재우는 것이다. 그때야 우리는 침착해진다. 아이는 왜 우는 것일까를 고찰하는 것은 침착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아이들은 왜 우는 것일까? 대부분의 경우엔 ‘원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 얻어지지 않을 때 아이들은 운다. ‘난 무엇을 원한다!’라고 강하게 어필하는 방법이 ‘울음‘ 인 것이다. 그렇다면 원한다는 것을 알아주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런 식의 대화를 해왔다.


“아빠 나 저거하고 싶어”

“아, 지금은... 이런 이런 이유로 안돼”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으나 아이는 울기 시작하고 그런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 계속 헛다리를 짚는다. 지금부터는 아이의 ‘원한다’라는 감정을 인정해 주자.


“아빠 나 저거하고 싶어”

“응 저거하고 싶어? 그렇구나, 그런데 지금은..”

“그래도 나 저거하고 싶어! 하게 해 줘!”

“ㅇㅇ 가 저걸 하고 싶구나 저게 참 재미있어 보이는구나 그렇지만 저건...”


현재의 대화에서 단 문장만 넣어주면 된다. 어떤 상황에도 공감이 먼저다.



앞에서 나는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 감정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그 감정을 같이 바라봐주자.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 당연히 아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감정을 같이 바라봐 주어 ‘내가 너의 의지를 들었단다.’라는 공감을 안겨주자.



그렇다면 공감을 통해 우리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는 육체적인 욕망을 중시하는 엄마의 환경과 전혀 맞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를 공감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쓸쓸히 살았다. 그리고 토마시를 보게 되었고 그의 책 읽는 모습을 보고 육체적인 욕망과 사랑이 아닌 정신적인 감정의 공감을 원하는 그녀는 깊은 사랑에 빠졌다. 이것이 공감의 함이다. 공감은 아무 말도 없이 ‘사랑’을 느끼게 한다.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에서 개를 다루는데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무작정 개들을 때리며 썰매를 강제로 끌게 한다. 공감은 없었고 강요만 있었다. 그들은 쓰러진 개에게 이렇게 말한다.

“왜 더 힘껏 끌지 못하니? 그러면 얻어맞지 않을 텐데.”

이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가? 상대의 상황과 감정과 체력은 고려되지 않는다. ‘나는 가고 싶은데 왜 안 그러냐, 그러니 너를 때린다.’라며 합리화하는 짓이다. 결국 그들은 고집을 부리다가 얼음 속에 빠지고 만다.


그중 ‘손톤’이라는 사람과 ‘벅’이라는 개만 살아남는다. 벅은 손톤에게 목숨 걸고 복종한다. 손톤을 괴롭힌 사람과 주저 없이 싸우며 주인을 지킨다. 급류에서 손톤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가슴이 두근두근 할 정도로 열정적이다. 이 근원은 사랑이다. 손톤은 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꼈다. 거기서 순종이 나온다.



오늘 우리는 아이가 왜 우는지 곰곰이 살펴보았다. 결국 ‘원한다’라는 것을 강력하게 어필하는 행위가 울음이었다. 우리는 이 ‘원한다’라는 욕구 그 자체를 공감해 주자. 이 공감을 통해서 아이의 감정을 보듬어줄 수 있다. 또한 공감은 아이가 ‘사랑’을 느끼게 한다. 아이는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함을 느낀다. 자신을 관찰하고 사랑하고 배려하고 아낀다는 것을 느낀다. 그 사랑이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로 인해서 서로 간의 원활한 협력이 이루어진다. 단순히 아이의 울음을 달래려고 하지 말자. 나는 우리 모두가 더 깊이 사유하여 육아하는 부모가 되었으면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