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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을 다니는 이유

사람과 사랑, 사랑과 사람.

by C H

어제 대학을 다니면서 참으로 기쁜 일이 있었다. 내 인생에 대한 최고의 찬사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동시에 한 교양 과목의 교수님이 종강 마무리 공지로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여 강연을 하는 영상을 올려주셨다. 30분이 좀 넘는 강연이었지만 나는 한강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작가 특유의 분위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강연은 사람의 사랑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내가 수강했던 철학 교양 수업의 주제인 '존재가 사랑'임을 깨닫게 해주었던 것과 일맥상통했다.


6개월 전에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강연을 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 때는 어지러운 시대 상황과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에 일침을 가하는 듯한 작가의 목소리가 더 뚜렷하게 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의 개인적인 성취와 맞물려 내가 대학을 다니는 또 다른 이유를 갖게 했다.


종강은 했으나 아직 학교의 시험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나의 느낌이 너무나도 선명해 이렇게 글을 남긴다.


내가 처음에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모두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한국의 대개의 기업들이 고졸자보다는 대졸자의 처우 개선을 좀 더 우선으로 하고 있고, 실제로 대졸자들에게 봉급도 많이 주고 있으며 대졸자들에게 기회가 좀 더 많이 주어지는 한국에서 살아가야하는 이상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의 삶의 방향성과는 많이 다른 방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리주의적인 생각에서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대학에 가야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2학년이 되어서야 대학이라는 공간의 진면모를 보게 된 느낌이다.

인문학의 종말이라 불리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인문학의 진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예술인이 되고 싶은 사람으로서 인문학에 참 관심이 많았다. 다른 말로는 사람에 관심이 많았다고 보아야 옳겠다. 사람이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질문에 여러가지 방향성을 가지고도 결국엔 똑같은 답으로 내달리고 있는 인문학은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가치임을 설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교양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타자에 관한 사랑이 없는 학문이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그 말이 백번이고 천번이고 옳다는 생각을 어제 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강연을 들으며 생각했다. 지극히 실리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이었던 내가 이상을, 아니 사랑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 순간이었다. 내가 대학에 온 이유는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동시에 떠올랐다.


한 때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동경했던 적이 있다. 나의 소신을 행동으로서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지식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정의내릴 순 없었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아는 것, 많이 아는 것을 토대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것 정도를 미덕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지식인'을 정의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지식인이란 사람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가정폭력의 피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그로 인해 사람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친 상태였고, 그 바닥을 친 신뢰는 모든 관계를 맺을 때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사람들 사이에서 덜그럭거리며 살아가는 이물질 정도의 스탠스를 취하며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고 부유했던 것 같다.


생존자로서의 사명이란 살아남는 것이 전부였던 나는 마치 마음의 뼈만 앙상하게 남아버린 걸어다니는 시체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무엇인가가 빠져있는 것 같은 느낌을 한동안 느끼면서 살아왔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아니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람과 사랑의 음운의 형태가 비슷한 것은 결국 사람이 사랑이고, 사랑이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친다.


사람에게서 사랑이 빠지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실로 진실된 이야기였다.

나에게 공허감을 갖고 있던 것은 사람에 대한 신뢰, 즉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내가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결말이었다.


내가 브런치에 올렸던 글 중에 내가 사람을 인간이라고 어떤 소격효과를 가지면서 이야기를 했던 것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적은 적이 있는데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나의 내면에 빛이 들어와서 생긴 눈부신 변화일 것이다.


내가 사람에 대해서 애정어린 시선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기에 인문학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깨달은 자는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것을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생각했다. <나>가 <너>이고, <너>가 <나>인 무경계의 세계에서 내가 깨달은 것을 퍼뜨리는 것은 맑은 물에 푸른 잉크가 풀어지듯 자연스러운 확산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처럼 나도 예술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소명이 소명이 아니라고 부정을 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강한 저항이었구나하는 생각 또한 스친다.


사람을 애정어린 시선을 가지고 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의 잠재성이고 나의 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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