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보이지 않는 향수
포돌이가 없는 동안 아파서였을까.
회사 워크숍 일정까지 겹쳐 더 오래 못 봐서였을까.
이번엔, 이상하게 반가움이 더 크게 밀려왔다.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밤새 이야기하는 포돌이의 모습이 귀여웠다.
사실,
카톡으로 이미 실시간 공유를 다 해줘서
새로울 게 별로 없었는데. ㅋㅋ
그래, 이렇게 즐겁게 다녀올 것을
나는 왜 그리 화를 내고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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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은 같은 상처를 안고 있다.
사랑 앞에서 크게 다쳐본 기억.
나는 그 기억 때문에
작은 일에도 흔들리지만,
포돌이는 오히려 더 평온하게 웃는다.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포돌이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거다.
“그래, 잘 다녀와.”
(물론 나는 여행 하루 전에 말하는 일은
절대! 없겠지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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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내 물음에 포돌이는 말했다.
“날 사랑해서 그렇지.”
그 말이 귀엽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해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그 한마디로 베트남 사건은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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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다시 시작된,
향수 사건. ㅋㅋ
포돌이 캐리어엔
발렌타인 17년과 21년이 들어 있었다.
우리가 함께 마셨던
발렌타인 30년을 기억하며,
“다음엔 17년이랑 21년 비교해 보자”
했던 말을 기억해 준 거다.
우리 둘이 함께 마시는 술.
그건 단순한 위스키가 아니라
‘함께 나눈 기억’의 상징이었다.
⸻
그런데… 내 향수는?
그때부터 위스키는 안중에도 없고,
“향수 왜 안 사 왔어?”에만 꽂혀
며칠을 툴툴거렸다.
적고 보니,
나 … 좀 피곤한 스타일인 건 맞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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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원래 향수를 잘 쓰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자기가 고른 향으로, 꼭 사 와줘.”
진심을 담아 세 번은 말했을 거다.
왜 그랬을까?
발렌타인은 ‘우리’를 위한 선물이고,
향수는 ‘나’를 위한 선물이니까.
그리고 더 솔직히는
베트남 여행을 하루 전에 말하고 떠난
섭섭함에 대한 보상심리였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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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툴툴대고 있는 나에게
포돌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실… 안 본 게 아니야.
시향 다 해봤고, 맘에 드는 것도 있었어.
근데 기내면세가 더 나을 것 같아서…
기다렸는데, 돌아올 땐 없더라.”
……그걸, 왜 이제 말해?!!
그 말에,
마음속 서운함이 스르르 풀렸다.
“아… 그래도 날 기억하긴 했구나. “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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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선물의 의미는 결국 하나.
‘그곳에서도 내가 기억되고 있었다’는 증거니까.
향수에 집착한 건
그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 뿐이다.
포돌이는 아마 억울하게 말하겠지.
“아니, 그래서 발렌타인 사 왔잖아…”
응.
그건 그거고,
향수는 향수지.
⸻
누군가 내게 물었다.
“솔직히 발렌타인이랑 향수 중에
하나만 가져오라고 했다면 뭐 원했어?”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발렌타인.”
그리고 스스로도 웃음이 났다.
결국 향수에 집착했던 건
선물이 아니라
‘나를 기억해 주는 그 마음’이 필요했을 뿐.
진짜로 내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건…
포돌이와 함께 마시는 위스키 한 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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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는 없었지만,
포돌이의 서툰 방식 속엔
여전히 내가 있었다.
그걸 읽어내는 게,
아마도 내가 회피형과의 사랑을
이어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어렸다면 몰랐을 거다.
그땐, 회피형은 기피대상 1호라고
도망가라고 말했겠지.
하지만 이 나이 먹도록,
회피형 연애를 해보니
조금씩 보인다.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왜 그런 말을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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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마더의 회피형 연애 꿀팁
경윤아,
포돌이는 널 안 떠올린 게 아니야.
향수 보러 갔고, 시향도 했어.
다만 “기내면세가 더 낫겠다” 싶어
미뤘을 뿐이지.
회피형은 이런 ‘미루는 순간’을
잘 설명하지 않아.
괜히 감정이 커질까 봐.
다만, 향수보다 위스키를 먼저 고른 건
너와의 공유된 기억이
더 먼저 떠올랐기 때문일 거야.
서툴고 무뚝뚝해 보여도,
그 안엔 널 향한 사랑이 있었어.
그리고 그걸 너도 느꼈으니까,
이 이야기를 지금 할 수 있는 거고.
⸻
다음 화 예고
회피형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너무 아파하지 말아요.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이해되는 것들이 있어요.
저도 글로 적어보니 알겠더라고요.
회피형도, 사랑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걸.
… 혹시 알아요?
포돌이와 내가 회피형 연애 교과서가 될지도요.
그렇다면,
우리에겐 또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까요?
포돌이는 여행 후 병이 나서
아직, 발렌타인은 맛도 못 봤어요.
20화에서 계속 이어가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