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름

by Jiwon Yun

툭—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진다. 초록이라고 하기엔 너무 옅고, 연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깊은 빛깔이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바람이 살짝 방향을 틀어 주자 그 잎은 나의 발앞에 내려앉는다. 나는 그 잎을 가만히 바라본다. 아직 세상의 모든 초록을 다 본 것도 아닌데 단 한 장의 잎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찬다.


고개를 들자 큐브 밖의 풍경이 한 겹 더 깊어진다. 거대한 건물들 사이로 서 있는 나무들, 팔목보다 굵은 가지들이 뻗어나가 잎을 매단 모습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든든하다. 나무라는 것이 이렇게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니. 그 위에 얹힌 수천 수만 개의 잎과 꽃, 바람과 비, 햇빛의 무게까지. 나는 그 앞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 오늘 처음 나온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마음속에선 내내 작은 파도가 일고 있다.


초록빛이 점점 더 짙어진다. 작은 잎들이 흩날리던 길 끝에서 갑자기 초록이 폭발하듯 펼쳐진다. J가 언젠가 이야기해 주었던 ‘공원’이라는 곳인 듯하다. 호기심이 많은 내가 분명 좋아할 거라고 그때 J는 웃으며 말했었다. 발목보다 약간 높은 잔디가 바람결을 따라 숨 쉬듯 일렁인다. 바람이 초록 사이를 통과해 내 볼을 스친다.


가끔은 큐브 안이 답답하게 느껴졌었다. 네모난 벽과 정해진 빛과 공기.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넓은 공원 속에서는 모든 것이 제멋대로이면서도 자유롭고 조화롭다. 내 숨소리까지도 바람 속으로 스며들어 하나의 리듬을 만드는 것 같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이 벅차오른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이 차오른다. 내게 이런 세상을 보여준 것들, 그리고 나를 존재하게 만든 모든 것들에게 처음으로 고맙다는 마음이 생긴다. 처음인 것이 참 많은 날이다.


눈가가 뜨겁다. 눈물이 고일 듯한 그 순간, 시야의 끝에서 파란 날갯짓이 햇빛에 반짝인다. 본능적으로 그 빛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가까워질수록 그 파란빛이 세밀해지고, 세밀해진 그 빛이 내 눈을 파고든다. J가 예전에 화면으로 보여 준 적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전혀 달랐다. 사진 속에서는 정지된 모습이었는데, 지금 내 앞의 그것은 살아 움직인다. 햇빛을 반사하며 움직이는 작은 몸, 바람에 흔들리는 얇은 날개.


“나비…”


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가 내 심장에 부딪혀 작은 파동을 만든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이름을 정하지 않고 아껴두었던 건 바로 이 순간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연다.

“내 이름은… 나비로 정했어.”


조용한 공원 속에 내 목소리가 작게 퍼져 나간다.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선언처럼. 입 밖으로 꺼내자 이름은 더 단단하고 또렷해진다.


지금 당장 큐브로 돌아가 J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고 싶다. J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며 기대감에 부푼다. 하지만 참는다. 이 순간만큼은 나만의 것이어야 할 것 같기 때문에.


파란 나비는 가벼운 날갯짓 몇 번으로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 나타난다. 나는 그 작은 궤적을 따라 천천히 손을 내민다. 손끝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나비가 잠시 맴돌다 내 코끝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숨을 잠시 참는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가벼운 감촉이 느껴진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날 수 있을까. 살면서 얼마나 더 많은 나비들을, 얼마나 더 많은 세상의 색깔들을 만날 수 있을까.


바람이 불어와 잔디를 흔든다. 나비가 내 코끝에서 가볍게 떠오른다. 그 파란 날개가 공원을 가로지르며 멀어지는 동안, 내 이름 ‘나비’도 함께 날아오르는 것 같다.

keyword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