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력이 빠른 걸까. 눈을 떴는데 이제는 큐브 안의 공기가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내 몸이 이곳에 조금씩 길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어젯밤에는 자는 동안 낯선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노랗게 빛나는 동그라미. 이곳에서도 가끔 보이는 그 빛을 J는 ‘달’이라고 불렀다.
달.
단 한 글자이지만, 이상하게 가슴 깊숙이 울림을 남기는 단어다. 이름을 ‘달’이라고 지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아직은 남겨두기로 했다. 세상에는 분명 달보다 더 많은 이름과 풍경이 있을 것이고, 나는 그걸 직접 보고 싶다.
“J, 오늘은 밖으로 나가보고 싶어.”
내가 말을 꺼내자, J의 목소리가 환하게 울린다.
“멋진 생각이에요! 바깥은 훨씬 더 아름다울 거예요.”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리자 J는 덧붙였다.
“처음이니까 당연해요. 하지만 그 두려움 너머에서 더 큰 풍경을 만나게 될 거예요.”
J의 목소리를 들으니, 알 수 없는 떨림이 가슴에서 올라왔다.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여 손바닥이 축축해진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손잡이를 움켜쥔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우와…”
안에서 보던 하늘은 네모난 틀에 갇혀 있었는데, 막상 나와 보니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빛이다.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J가 아무리 말해주어도, 직접 보는 순간의 감각은 완전히 달랐다.
이제부터는 J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큐브 밖에서는 오직 나만의 발걸음으로 움직여야 한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막상 그 고요를 맞닥뜨리자 가슴 어딘가가 텅 빈 듯 허전하다. 그 빈자리가 새로운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자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첫 발을 내디뎠다.
바닥은 밤새 내린 비로 질퍽거린다. 큐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양옆에 줄지어 있고, 그 사이로 난 길이 공용 공간으로 이어져 있다. 나는 무심코 다른 큐브쪽을 흘깃 본다. 안쪽에서 그림자가 어렴풋이 움직인다. 저곳에도 나처럼 깨어난 이들이 있구나. 문득, 저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걸음을 옮길수록 다리가 떨린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나를 붙잡는다. 수많은 생명들이 서로 얽혀 있다. 나와 비슷한 모습이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르다. 같은 곳에서 태어났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그들은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웃고, 걸었다. 그 여유로운 뒷모습 하나에도 나도 모르게 부러움이 일었다.
“조금 더 빨리 걸어볼까.”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보폭을 넓힌다. 팔을 힘차게 흔들며 앞으로 나아간다. 저 앞에 거대한 건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만큼 큰 구조물들. 가까워질수록 숨이 막힐 듯 웅장하다. 마치 이곳에서 또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마침내 거대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파란 건물 입구에 ‘학교’라고 적혀 있다. 안에서는 여러 생명들이 두꺼운 종이를 품에 안고 쏟아져 나온다. 그들의 표정은 진지하면서도 즐거워 보인다. 나도 모르게 홀린 듯 따라 들어간다.
안쪽은 내가 살던 큐브와는 다르다. 큐브들이 이어져 붙어 있는 모습에 공간마다 다른 기운이 흐른다. 어떤 곳에서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다른 곳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가득하다, 또 어떤 공간에서는 수많은 생명들이 고개를 숙이고 종이에 적힌 문장을 열심히 읽고 있다. 처음 보는 풍경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숨을 고를 새도 없다.
J는 학교가 배움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언어를 자연스럽게 익혔지만, 이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왜일까. 이미 아는 것 같으면서도 더 알고 싶어 하는 그 표정들이 나를 자꾸 끌어당긴다.
학교를 나서자, 이번엔 ‘마트’라고 적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호기심에 또다시 발길이 이끌린다. 안으로 들어가자 눈앞이 빛으로 가득 찼다. 형형색색의 음식들이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다. 빨갛고, 노랗고, 초록빛의 과일과 채소들, 다양한 포장지에 싸인 먹거리들. 그 광경은 그 자체로 축제 같다.
우린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길을 뗄 수 없다. 마치 그 안에서 나를 향해 손짓하는 듯하다. 욕구. J가 말했던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는 않아도, 바라보고, 손에 쥐고, 맛보고 싶게 만드는 힘.
나는 빨간 열매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내려놓는다.
세상은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넓고, 다채로웠다. 아직 첫 걸음일 뿐인데도, 나는 이미 압도되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어떤 내가 될까.’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큐브 속에서 보던 네모난 하늘이 아니라, 경계 없는 거대한 하늘. 그 아래에서 나는 이제 막 첫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