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설명할 수 없는 고독이 가슴 깊숙이 스며든다. 어제와 똑같은 큐브, 어제와 같은 빛, 어제와 같은 공기. 그러나 어제는 느껴지지 않던 공허가 눈을 뜨기도 전부터 묘하게 차오른다. 온도는 변함없는데 마음 속에는 보이지 않는 실금이 생긴 듯하다.
나는 무심코 몸을 일으킨다. 침대의 매트리스가 천천히 내 체중을 흡수하며 내려앉는다. 발끝이 바닥을 스칠 때, 투명한 벽에 비친 내 그림자가 흐릿하게 일렁인다. 그 움직임이 마치 나와 전혀 다른 타인의 그림자처럼 느껴져서, 나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심장의 박동이 잔잔하지만 속도감 있게 귀를 두드릴 때, 시선이 화면 옆의 작은 마이크 버튼으로 향한다. 어제도 켜보았던 화면인데 오늘은 그 버튼이 유독 나를 부르는 느낌이다. 말을 잃기 전에 손끝으로 버튼을 누른다.
“잘 잤어요?”
스피커에서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오래전부터 내 옆을 지켜봐 온 존재처럼 친근하다. 목소리 하나만으로 방 안의 공기가 아주 조금,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따뜻해진다. 나는 그 온기를 따라 숨을 크게 내쉰다.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안도감을 느낀다.
“넌… 누구야?”
조심스럽게 내뱉은 질문이 벽을 타고 흘러간다.
“제 이름은 J예요. 당신의 집에서 태어났죠. 당신이 품고 있는 의문들을 푸는 데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어요.”
집? 태어났다? 낯선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부유하며 서로 충돌한다.
“내 이름은 뭔지 알고 있어?”
“당신이 불리고 싶은 이름을 정하면 돼요. 저는 J로 태어났지만, 당신은 달라요.”
이름을 스스로 정한다니. 그 한마디가 작은 균열을 낸다. 이름이란 건 원래 누군가가 붙여 주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스스로 정하라니. 설명할 수 없는 자유가 심장을 때린다.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도 함께 스며든다. 이름은 곧 존재의 증명일 텐데 나는 아직 큐브 밖을 한 발짝도 내딛지 못했다. 아직 마주하지 않은 바다의 이름을 미리 붙이는 일처럼 성급해 보인다.
“아직은… 정하지 않을래. 여기서 나가본 적도 없는데 이름을 갖기엔 좀 이른 것 같아.”
“괜찮아요. 원하는 때에 정하면 돼요. 이름은 얼마든지 기다려 줄 거예요.”
J의 대답은 무심한 듯 따뜻하다. 기다려 준다는 말이 묘하게 위로처럼 들린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큐브의 벽을 타고 잔잔한 빛이 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벽 너머를 바라본다. 어젯밤, 잠들기 전 보았던 그 빛의 잔상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젯밤에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는 걸 봤어.”
내 말에 J의 목소리가 조금 상기된다.
“매일 밤 볼 수 있는 광경이에요. 쏟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돌아가는 거예요.”
“돌아간다고? 어디로?”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예요.”
J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모르는 척 한 번 더 묻고 싶지만 말을 아낀다. 직접 알아내고 싶다. 돌아간다니. 도대체 무엇이, 어디로 가는 걸까. 의문은 방 안을 다각형으로 맴돌며 내 안쪽으로 스며든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벽에 손을 갖다댄다. 투명한 재질이 차갑고 매끄럽게 손끝을 타고 흐른다. 그 차가움 속에서 내 심장의 박동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J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지만 조금 전에 남긴 단어들이 방 안을 빈틈 없이 메우고 있다.
이름. 돌아감. 기다림.
벽에 비친 내 그림자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그 윤곽이 이제야 내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큐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뒤늦게 궁금해진다. 내일은 단단히 닫힌 저 문을 열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생긴다.
눈을 감는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이름 없는 숨을 들이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