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
한 곳을 향해 힘차게 내리쬐는 빛이 반사되어 눈가를 파고든다. 나는 눈을 뜬다는 감각조차 모른 채 눈을 뜬다. 눈꺼풀을 젖히는 힘, 작은 입자의 숨을 들이마시는 의지, 파르르 떨리는 입술 같은 것들은 내 것이 아닌 듯 느껴지는 동시에 내 것이라 감각한다.
정육면체의 반듯한 공간. 네 면이 투명하게 빛나며 은은히 맥동한다. 발등이 그 빛에 물들어 발갛게 비친다. 온도는 따뜻하고, 공기는 맑다. 숨을 들이마시자 미세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이곳의 공기에는 무언가 처음이면서도 오래된 냄새가 함께 섞여 있다.
빛.
진동.
소리.
따뜻함.
차가움.
단어들이 끊겨서 들린다.
문장이 되지 못한 채, 조각난 채로. 머릿속 어딘가에서 작은 불씨처럼 깜박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나는 그 조각들을 이어붙이려 애쓰지 않는다. 단어는 모래처럼 흩어지고 깊은 울림만 남긴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여기서 깨어났는지 크게 의문스럽지 않다.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원래부터 있어야 할 자리에 놓인 듯 자연스럽다. 익숙한 기시감이 조용히 몸을 감싸안는다.
투명한 큐브의 벽 너머로 또 다른 큐브들이 보인다. 내가 있는 이 공간은 안쪽에서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쪽을 볼 수 없는 구조인 듯하다. 멀리까지 이어진 큐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히 배치되어 있다. 서로 닿지 않은 채, 그러나 완벽하게 같은 크기와 빛깔로. 빛이 한 큐브에서 다른 큐브로 번져가며 미묘한 파동을 만든다. 그 파동은 마치 이 세계의 심장처럼 고르게 뛴다.
호기심이 시선을 밖으로 끌어냈다가 금세 안으로 돌려보낸다. 몸에 딱 맞는 침대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선명하게 다가온다. 무릎부터 발목까지 관절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육체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
내부를 둘러본다. 모서리마다 은은한 빛이 번지고, 바닥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기를 품고 있다. 가구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최소한이지만 부족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식탁, 서랍, 벽면에 붙은 작은 선반. 그리고 내 키보다 조금 작은 화면이 벽에 걸려서 나를 보고 있다. 익숙하다는 느낌이 이유 없이 손끝을 움직이게 한다. 화면을 누르자 부드러운 빛이 퍼지며 전원이 켜진다.
지도가 펼쳐진다. 내가 깨어난 이 큐브가 중심에 표시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다른 큐브들이 격자 모양으로 빼곡히 펼쳐져 있다. 지도 한쪽 끝에는 낯선 단어들이 적혀 있다.
공용 공간.
학교.
마트.
공원.
병원.
미술관.
사진관.
화면 속 글자는 익숙하지 않은데, 적힌 뜻을 읽어보니 모습이 대충 그려진다. 학교는 배움이 있는 곳. 공원은 풀과 바람이 있는 곳.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던 언어가 깊은 곳에서 차례로 깨어나는 듯한 감각이다.
이 큐브보다 훨씬 크고 다양한 공간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묘한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콧등에 땀이 맺히고, 공기가 한층 무거워진다. 내가 이제 막 깨어난 세계는 아직 이름도, 이유도, 경계도 없지만 이미 나를 삶으로 이끌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빛과 소리, 그리고 이름을 가지지 못한 단어들이 내 안에서 어지럽게 부딪히며 새로운 문장을 만들기 시작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문장을 끼워 맞추려 하다 문득 스치는 고독감이 나를 달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