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만약 큐브 바깥 세계가 정말 있다면… 넌 가지 않을 거야?”
나의 질문에 바다는 잠시 침묵하다 답한다. 별빛이 눈동자에 비친다. 또 다른 우주가 있다면 그 곳은 바다의 눈동자일 것이다.
“나는 이미 많은 세상을 봤어. 모든 삶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번 생은 이곳에 남아서 마지막 돌아감을 지켜보고 싶어.”
바다의 대답은 담담하지만 단단하다. 그 말 속에는 이미 선택을 마친 사람의 무게가 담겨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마음은 좀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다른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나를 계속 흔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바다가 돌아가버리면, 나 혼자 이곳에 남게 된다면 그 빈 자리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결국 도망치듯 결심했다. 나의 나약함에 목 뒤가 뜨거워진다.
그날 밤, 우리는 처음 루프를 만났던 언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곳을 떠나면 바다가 말한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다, 나 다녀올게. 너는 이곳에 남아줘. 내가 본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바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손끝으로 내 볼을 스쳤다. 그 온기가 내 마지막 두려움을 녹였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
그 말이 끝나자 바람이 방향을 바꿨다. 발밑이 부드럽게 흔들리더니 빛으로 이루어진 길이 천천히 열렸다.
나는 별빛으로 만들어진 문턱을 조심스럽게 넘었다. 뒤돌아봤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이상할 만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큐브 바깥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빛은 넘쳤지만 온기가 없었다. 모든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공기의 냄새도, 감촉도 낯설었다. 처음엔 끝없이 펼쳐진 세상 속에 무한히 가벼워진 나를 보며 자유를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자유는 나를 텅 비게 만들었다. 무한히 넓은 세계 속에서 나는 무엇이고,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게 큐브 바깥이구나…”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목소리는 쉽게 흩어졌다. 긁히는 느낌이 목에 남지만 나조차 듣기 힘들었다. 공기는 맑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어 있었다. 눈을 감으면 나의 존재조차 바람 속에 녹아 사라질 것 같아서 억지로 뜬다.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자, 그때 별빛 하나가 유난히 밝게 떨어졌다. 그 궤적이 바다의 웃음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 빛을 받았다. 손바닥 위에서 작은 불씨처럼 깜빡이는 그 빛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바다, 너는 나의 길이야. 너를 만나서 참 다행이야. 고마워.”
가슴이 철렁하며, 동시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그가 이 빛 속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바다를 두 눈으로 다시 보고 싶었다. 그가 정말 여전히 큐브 세상에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돌아감을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자 발밑이 흔들렸다. 손바닥 위의 빛이 길게 늘어나더니 눈부신 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그건 분명 큐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그 길 위를 빠르게 걸었다. 혹시라도 빛이 사라질까봐, 바다라고 예상했던 그 온기를 영영 놓치게 될까봐.
길이란 떠나는 게 아니라 서로를 향해 이어져 있는 무언의 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