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새로운 등장 - 부녀회와 노인회
먼저 도착한 건 부녀회장, 김이심 씨였다.
올해 쉰 중반. 자녀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 출가했고,
남편은 공기업에서 정년퇴직 후 조용히 집 근처에 머무는 인물.
겉보기엔 단지 내 활동적인 아주머니, 하지만 알고 보면 단지를 자기 손바닥처럼 관리하고 있는 실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들어오며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위원장님~ 날도 꾸물꾸물한데 고생 많으시네요.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주시다니, 참 부지런하시네요?"
표정은 부드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뒷말이 달린 듯한 느낌.
홍위원장은 예의 바르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이심 회장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 재건축 얘기, 부녀회 의견도 꼭 듣고 싶었습니다."
김이심 회장은 커피를 받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유~ 저희야 뭐. 우리 주민들이 잘되면 좋은 거죠. 근데 말이죠…"
그녀는 살짝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게… 잘되긴 해야 하는데, 너무 급하게 밀어붙이는 건 좀 그렇잖아요. 노인회 쪽에서도 불안해하더라고요."
홍위원장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무리하게 하진 않으려 합니다. 다만, 전체적인 틀은 짜놓고 주민들과 함께 논의하려는 방향이죠."
김 회장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위원장님,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네, 말씀하세요."
"우리 부녀회… 사실 운영비도 없고, 김장 행사도, 바자회도, 다 자원봉사로 해왔어요. 근데 이렇게 큰 사업이 진행되면… 우리 역할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렇겠죠. 주민 설명회, 간식 준비, 현장 지원 등등…"
"맞아요. 그리고요… 우리가 도울 테니,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어때요?"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위원회 구성하실 때… 우리 쪽에서도 한 명 운영위원으로 넣어주세요. 그래야 부녀회도 공식적으로 움직이죠. 그리고… 작은 활동비? 명목상 월급? 그런 거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홍위원장은 순간 긴장했다.
‘왔구나… 이 시점에서 항상 나오는 이야기.’
김 회장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재건축이라는 게 1~2년 안에 끝나는 거 아니잖아요. 최소 5년? 길면 7년 이상 가는 사업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 금방 지쳐요. 그러니… 좀 느긋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녀는 억지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부드럽고 현실적인 논리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사업의 속도를 늦추자는 제안을 건넸다.
홍위원장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겉으론 도와주는 척하면서, 사실상 이 구조를 지속 가능한 이득 구조로 만들겠다는 거네.’
김 회장은 단지 내에서 꽤 영향력이 있었다. 어르신들은 그녀의 김치 담그는 솜씨를 기억하고, 중년 여성들은 부녀회 회의에서 그녀의 말을 따른다.
단순한 봉사 단체가 아니라, 어찌 보면 이 아파트의 ‘비공식 정서적 여론’을 이끄는 역할.
그리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판이 커지면, 돈이 돌고, 권한이 생기고, 나눠 먹을 게 생긴다.’
그녀는 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 운영위원 자리에 한 자리
▶ 명목상 활동비
▶ 부녀회 이름으로 주관하는 설명회, 행사
▶ 중간 브로커 역할
그렇게 해서 월 100만 원에서 200만 원 정도라도 꾸준히 확보된다면, 남편 퇴직 이후 생활비 부담도 줄고, 사람들 앞에 계속 설 수 있는 명분도 생긴다.
그리고 중요한 건— ‘너무 빨리 가지 마라.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내 역할은 계속 유지된다.’
모임이 끝나고, 김 회장은 웃는 얼굴로 일어나 말했다.
"위원장님, 오늘 이야기 참 유익했어요. 제가 그럼… 우리 부녀회 쪽이랑도 이야기 좀 돌려볼게요."
그녀는 우산을 들고 조용히 커피숍을 나섰다.
강소장이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낮게 말했다.
"저 분… 진짜 무서운 분이에요."
홍위원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겉으론 도와주는 척하지만, 사실상 이 사업을 '먹는 구조'를 만들고 싶어하는 거죠. 사업은 질질 끌수록 그분은 오래 이 안에서 머무를 수 있고."
"어떡하실 건가요?"
홍위원장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단은… 도와달라지만, 이걸 주도하게 두진 않아요."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재건축은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월급 수단이 되지 않도록… 이 판은, 내가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한다.’
며칠 뒤, 홍위원장은 조대표와 함께 단지 내 노인정을 찾았다.
노인회장을 직접 만나, 재건축의 필요성과 운영위원회 구성을 설명하려는 자리였다.
비도 안 오고 바람도 없는 날이었지만, 홍위원장의 마음은 왠지 어두운 안개가 깔린 듯 불안했다.
"솔직히… 제일 어려운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조대표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먼저 찾아가야죠. 그분들 마음 안 얻으면, 아파트는 절대 움직이지 않아요."
두 사람은 조용히 노인정 입구로 들어섰다.
낡은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인 현관. 실내에선 화사한 난들과 함께 바둑판을 놓고 둘러앉은 노인들의 작은 웅성거림이 들렸다.
TV에서는 낮 드라마가 희미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홍위원장입니다. 시간 좀 괜찮으실까요?"
홍위원장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노인회장인 꽃에 물을 주던 할머님 한분이 고개를 들었다.
긴 세월 동안 이 노인정을 지켜온 사람.
한때는 사회복지학 교수로 근무한 이력도 있어, 단지 내 어르신들 사이에선 영향력이 컸다.
"뭐야, 너 그 재건축 얘기 돌리고 다닌다는 사람 맞지?"
노인정 안의 분위기가 확 얼어붙었다.
바둑돌 두던 손들이 멈췄고, TV 소리조차 갑자기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예… 저희가 지금 추진 초기 단계인데, 입주민 의견을 듣고 싶어서—"
"여긴 그런 얘기 하러 오는 데가 아니야." 할머니 회장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아파트 바꾸는 거, 그거 니들 젊은 사람들 땅값 올리자고 하는 거잖아. 우린 지금 이 집에 만족하고 살아.
20년, 30년 산 집인데 이 나이에 어디로 나가라고, 어?"
조대표가 조심스레 중재에 나섰다.
"회장님, 일단 앉아서 이야기라도—"
"됐어! 얘기는 무슨 얘기야! 젊은 것들이 조용히 좀 살지, 왜 동네를 시끄럽게 만드냐고! 우린 조용히 살고 싶어! 조용히!"
그의 목소리가 커지자 주변에 있던 어르신들도 입을 모았다.
"그냥 가요! 우린 싫다니까!"
"여기서 살다 죽을 사람들이야!"
"옛날 생각 좀 해봐, 이 집이 얼마나 고마운 집인데!"
누군가는 홍위원장의 팔을 밀치며 외쳤다.
"여긴 그런 정치질 하러 오는 곳이 아니야! 나가!"
결국 홍위원장과 조대표는 어르신들의 몰아치는 목소리에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노인정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을 닫자마자, 안에서 다시 바둑돌 소리와 TV 드라마 대사가 들려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홍위원장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말없이 계단 아래까지 내려온 그는 한참을 말없이 벤치에 앉았다.
조대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위원장님. 저도… 이렇게까지일 줄은 몰랐네요."
홍위원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뇨. 어르신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침범한 거죠."
그는 손에 쥔 재건축 추진 계획서를 천천히 폈다가 그대로 접었다.
"이건… 시간이 필요하겠네요. 정면돌파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조대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이제 이 단지를 '바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걸 먼저 보여줘야 할 것 같습니다."
홍위원장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흐려진 구름 사이로 햇살 한 줄기가 조심스럽게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