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재건축 추진위원장(홍위원장 편)

6화: 정비업체 대여금을 받자

by 건축학도고니

운영비가 필요하다 – 추진위 앞에 닥친 첫 번째 현실


부녀회와 노인회를 한바퀴 돌고나서

이디야커피숍의 창가 자리는 이제 추진위원들의 고정 회의석이 되어 있었다.

비도 아니고 바람도 없는 평온한 오후, 하지만 커피잔을 앞에 둔 홍위원장의 표정은 평온과 거리가 멀었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합니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조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홍위원장은 수첩을 펼쳤다.
깔끔하게 정리된 숫자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현수막 제작, 입주민 안내문, 공고문, 회계 시스템 구축, 네이버 카페 커뮤니티 관리, 설명회 장소 대여…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이 판을 굴리기 위한 최소 운영비가 2천만 원입니다."


"…벌써 그렇게 들어갑니까?"
조대표는 한숨을 내쉬었다.


"재건축이 ‘말’이 아니라 ‘행동’이 되는 순간부터 돈이 필요합니다."

"노인회와 부녀회 그리고 입주민들을 전부 설득해야 되니까요.."

홍위원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럼, 입주민들에게 모금을 받죠."
강소장이 조심스레 말했다.
"세대당 2만 원씩만 받아도 충분할 겁니다."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홍위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우리는 공식 추진위도 아니고, 조합도 아닙니다.
입주민 입장에선 ‘누가 너희한테 돈을 주냐’는 반응 나올 수 있어요."


"괜히 초반부터 신뢰 잃을 수도 있겠네요."
송사장이 중얼거렸다.
"돈 얘기 먼저 꺼내면 괜히 '저 사람들 사업 하려고 하나?' 소문 날 수도 있고…"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회의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홍위원장은 조용히 테이블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정비업체로부터 조건부 대여금을 받는 거죠."














정비업체 대여금이라는 카드


“그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조대표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정비업체 돈 받는 순간,
‘특정 업체 밀어주기 아니냐’ 소리 나옵니다.”


강소장도 조심스럽게 의견을 더했다.


"그래도… 요즘은 업체 쪽에서도
대여금 줄 때 조건 명확하게 씁니다.
입찰 공정성 보장, 대여금 반환 확약…
법무사 끼고 확실히 하면
실제로 받은 추진위들도 꽤 있어요."


홍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도 처음엔 꺼렸지만,
이대로 가다간 홍보도 못 하고
시간만 질질 끌게 됩니다.
우린 지금,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겁니다."


송사장이 손가락을 툭탁거리며 말했다.


"정비업체도 결국 경쟁이니까요.
사업성이 있는 단지면 먼저 움직입니다.
우리가 먼저 제안해볼 수도 있죠."


조대표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미팅이라도 해봅시다.
우리 단지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그쪽 반응도 들어봐야죠."












서울 강남, 대형 정비업체 A사와의 미팅


며칠 후, 홍위원장은 강소장과 함께 서울 강남의 한 고층 건물에 도착했다.


로비는 은은한 향기와 깔끔한 인테리어로 이미 ‘우리는 고급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20층.

문이 열리자, 세련된 회의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비업체 A사의 실장과 전략기획팀이 이미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홍위원장님, 강소장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실장이 밝게 인사했다.


잠깐의 인사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홍위원장은 준비해온 단지 현황 자료를 꺼냈다.
입지 조건, 학군, 교통, 용적률, 주변 개발 계획까지 A4 세 장 분량의 단지 가치 브리핑이었다.


그 자료를 들여다보던 A사 기획실장이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는 이미 이 단지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홍위원장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 정도 규모나 사업성은 갖춰졌다고 판단합니다. 다만, 아직 추진위가 공식화되지 않은 게 걸림돌이죠. 그래서 저희 쪽에서도 내부 검토만 해두고 있었는데…"


그가 말을 잇는다.


"위원장님이 먼저 컨택 주셔서, 솔직히 반가웠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강소장이 물었다.


"혹시… 운영비 대여금, 가능합니까?"


기획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보통 2천만 원 정도는 조건부로 지원해드립니다. 정비업체 선정과는 무관하며, 공정 입찰 보장과 대여금 반환 약정서 모두 체결합니다."


홍위원장은 긴장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며 물었다.


"업체선정에서 귀사가 탈락하면… 그 돈은 어떻게 되죠?"


"무조건 반환해주십시오. 저희는 신뢰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추진위와 업체 간 사전 유착 오해, 요즘엔 제일 조심합니다."











커피숍 회의 – 다시 모인 추진위원들


며칠 뒤, 이디야 커피숍.


“A사 측에서 2천만 원 대여금 지원 가능하답니다.” 홍위원장이 브리핑을 마쳤다.


조대표가 물었다.
“그럼 받는 겁니까?”


홍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건은 명확합니다. 입찰 공정성 서약, 대여금 반환 약정, 회계 내역 투명 공개. 그대로 카페에도 게시할 겁니다.”


잠시 침묵.


송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 정도면 잡음 없이 갈 수 있겠네요. 우리에겐 지금 연료가 필요해요.”


조대표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돈은 좋은데… 우리가 그 돈에 끌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기억하세요. 주인공은 주민들입니다."


홍위원장은 커피잔을 들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 돈으로 ‘말’을 ‘행동’으로 바꾸는 것뿐입니다. 판은 우리가 짜고, 심판은 주민들이 할 겁니다."









정비업체 대여금 약정서 서명 – 책임과 유혹 사이



봄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던 어느 오후.
홍위원장은 서울 강남 A정비업체 본사 14층 회의실에 다시 도착했다.
오늘은 다르다.
이제 말이 아닌, 서류로 책임을 쓰는 날.

책상 위엔
‘정비사업 추진 협력 관련 대여금 약정서’가 놓여 있었다.

업체 쪽 실무이사와 법무팀 직원이 동석한 자리였다.



홍위원장 옆엔 송사장이 앉아 있었고,

카페 회원 중 회계 전문가인 주민 자문도 한 명 참관하고 있었다.

"확인하신 대로, 이 약정서엔 세 가지 조항이 핵심입니다."


법무팀 직원이 조용히 말했다.

"첫째, 대여금 2천만 원은 ‘추진위원회 초기 운영비’ 명목으로 제공됩니다.
둘째, 당사는 이로 인해 정비업체 선정 시 어떠한 우선권도 주장하지 않으며,
셋째, 당사가 정비업체로 선정되지 않을 경우, 이 금액은 무조건 반환을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홍위원장은 약정서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사무적인 문장들이지만, 그 안에는 무거운 ‘공공의 신뢰’가 들어 있었다.

"혹시라도 이게, 주민들 사이에서 ‘밀어주기 아니냐’는 말이 나올까봐 걱정입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무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저희도 명확히 해두려는 겁니다. 요즘은 정비업체가 먼저 돈 주고 분위기 띄웠다가 여론 역풍 맞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투명하게 문서화하는 게 서로를 위한 거죠."




홍위원장은 마지막 서명을 하기 전,
한 번 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우린 지금 판을 열고 있다.

이 돈은 책임이다.
절대, 이 돈이 우리를 끌고 가게 해선 안 된다.’

펜을 들었다.
"○○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 대표, 홍OO."




사각.
서명이 적히는 순간,
회의실 안 공기는 한층 묵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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