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재건축추진위원장(홍위원장편)

7화. 움직이는 그림자들

by 건축학도고니

정비업체 선정 이후,
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는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디야 커피숍.
창가 자리에 모인 추진위 주요 멤버들은
커피잔을 옆에 두고, 자료 뭉치를 펼쳐들고 있었다.
어느덧 이 회의는 일상이 되었고,
이 작은 커피숍은 단지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장이 되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설계 들어가야죠."
홍위원장이 펼쳐진 설계사무소 브로슈어를 정리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단정하고 균형 잡혀 있었지만,
표정은 이전보다 조금 더 무거워 보였다.

강소장이 노트북을 돌리며 덧붙였다.
“요즘은 주민 의견 수렴을 3D로 구현해서 보여주는 설계사도 있어요.
우리 단지는 규모도 애매해서, 대형보단 중형 사무소가 맞을 수도 있어요.”

송사장이 브로슈어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설계도 설계지만, 이번엔 법무법인이 진짜 중요합니다.
대여금, 향후 계약, 분양까지—
초기부터 들어와야 리스크 줄일 수 있어요.”

조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워낙 정보가 많아서,
한 끗만 잘못해도 주민들이 바로 불신하더라고요.
우린 신뢰 쌓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홍위원장은 잠시 손끝으로 커피잔을 굴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오전 10시에 설계·법무 선정 공고 올리겠습니다.
입주민 참여를 위한 투표 방식도 곁들여서요.
카카오톡방에도 사전 공지 올리죠.”

네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는 차분했고, 준비는 완벽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다.
이 회의가 끝난 바로 그 시각,
단지의 또 다른 공간에선 전혀 다른 종류의 계획이 세워지고 있다는 걸.













노인정 뒤편 창고 – 그림자 속의 모의




단지 북쪽 노인정.
평소 낡은 의자와 행사 물품이 쌓여 있는 창고 안.
조용히 불을 밝히고 앉은 이들이 있었다.

부녀회장 김이심.
노인회장 김영수.
부녀회 총무 이미자.
노인회 부회장 전봉수.

네 명의 얼굴은 진지했고,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잡담이 아니었다.

김이심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계속 이렇게 놔두면, 우린 결국 들러리 신세로 끝나요.”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회의도 자기들끼리, 자료도 자기들끼리.
정비업체도 정해졌고, 이제 설계랑 법무도 자기들 기준으로 간다는데…
우리가 뭘 알 수 있겠어요?”

김영수가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이 동네서만 30년을 살았어.
주민들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우리야.
근데 지금 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전봉수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 원칙주의자들이라
딱히 문제는 없지만… 너무 차단돼 있어요.
우린 아예 접근조차 못 하고 있잖아요.”

이미자가 메모장을 꺼내며 작게 웃었다.
“그래서 들어가야 해요.
자리 하나씩 확보해서 운영에 참여하는 거예요.
이름만 있으면 월 300은 기본이고,
행사비, 자문비, 지원비… 그걸로 사람도 돌보고,
우리 기반도 유지하죠.”

김이심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홍위원장은 사람이야 바르죠.
그런데, 그게 약점이에요.
원칙만 믿고 움직이는 사람은
정치적 감각이 없어요.
우리가 ‘자발적 참여’라면 절대 거절 못 해요.”

김영수는 오랜 정치인의 말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명분은 주민 통합이야.
설계사 선정도, 법무법인 선정도
모두 ‘투표로 한다’는 건 결국 표 관리겠지.
우리가 운영진에 들어가야 그 흐름을 보죠.”

이미자가 메모장에 이름과 역할을 정리했다.

김이심 → 추진위 홍보자문위원

김영수 → 명예고문

전봉수 → 복지연계팀장

이미자 → 문화행사 운영담당


“내일 회의 오후 2시, 이디야죠?”
“그럼 그때 갑시다. 자연스럽게.
명함도 꺼내지 말고,
그냥 ‘우리도 도울게요’ 한 마디면 돼요.”

창고는 조용해졌고,
그들 얼굴엔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입주민 카카오톡방 – 미세한 진동




그 시각,
○○아파트 입주민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점심시간을 지나며 조용했던 방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도토리엄마
: 내일 설계·법무 업체 선정 공고 올라오는 거 맞죠?

라온832
: 그런데 요즘 부녀회 쪽은 왜 조용하죠?
원래 김이심 회장님, 행사 때마다 선두셨는데…

늘푸른402
: 추진위도 다 좋은데…
너무 폐쇄적인 거 아니냐는 말이 나와요.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말 들으면 곤란할 듯.

추진위_홍위원장
: 안녕하세요. 추진위입니다.
내일 오전 10시, 공식 공고 올라갑니다.
주민 참여 기반으로 투명하게 선정하겠습니다.

마이홈소망
: 아, 그런데 내일 회의에
김이심 회장님이랑 김영수 회장님도 나오신다던데요?
같이 하자는 이야기 하신다던데…

강소장_공인중개사
: 이건 그냥 느낌인데요—
그분들, 그냥 ‘같이 하자’는 말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운영비 구조 들어가기 시작하면 복잡해져요.
잘 판단하셔야 할 시기입니다.




홍위원장은 말없이 채팅창을 내려보다
잠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왔구나…”
혼잣말처럼 중얼이고,
다시 펜을 들었다.

“이번 판, 예정보다 더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이디야 커피숍, 9시 58분.




홍위원장은 유난히 시계를 자주 봤다.
오늘 회의는 설계업체·법무법인 공고 게시 직전,
투표 방식과 후보 제안서를 검토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커피숍 문이 열리고, 추진위 인원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강소장은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고,
송사장은 종이봉투에 뭔가를 넣어왔다.

"오늘도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네요."
강소장이 자리잡으며 웃었지만,
표정은 어딘지 긴장돼 있었다.

"그럴 리 없죠."
조대표는 말없이 수첩을 꺼내면서 말했다.
"오늘은 누가 움직일지 거의 정해져 있잖아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찰칵.

문이 열렸다.


김이심, 김영수, 전봉수, 이미자.
네 사람은 마치 사전에 리허설이라도 한 듯
절도 있는 미소로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회의하시는 거 알고 조용히 왔어요."
김이심은 특유의 사근사근한 말투로 인사했다.

홍위원장은 잠시 정적을 끌며 일어섰다.
"반갑습니다. 예고 없이 오셔서 조금 놀랐네요."

김영수가 느릿하게 말했다.
"이제 중요한 단계잖아요.
설계니 법무니… 우리도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요."

이미자는 웃으며 보탰다.
"주민 대표로 돕겠다는 겁니다.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빠졌다는 이유로 불안해하는 분들도 많아요."

홍위원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보다 네 사람의 태도는
한 치의 공격성도 없었다.
정중하고, 공손하며, 심지어 ‘헌신적’이었다.

“좋습니다. 참여하겠다는 뜻은 감사하지만…
오늘은 일단 내부 정리 회의입니다.
추가 인선이나 위촉은 아직 논의된 바 없고요.”

하지만 김영수는 거기서 물러나지 않았다.
“우린 위촉 안 받아도 됩니다.
회의에만 들어가도 충분하죠.
행사 때 도와드릴 수 있고, 주민 설득도 저희가 맡을 수 있고.”

김이심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이런 사업은 원래 초반엔 추진력이 필요하고,
후반엔 조율력이 필요해요.
우린 조율에 능한 사람들이에요.”

강소장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도와드리겠다'는 표현이,
운영에 ‘들어가겠다’는 의미는 아니시죠?"

이미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의미가 없다고는… 말 못하죠.
근데 우리가 굳이 말 안 꺼내도,
언젠가 자리가 비면 또 그 얘기 나올 겁니다."

분위기는 부드러웠지만,
명확히 ‘통제되지 않는 기류’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디야 커피숍.
추진위 회의가 끝나고 커튼이 반쯤 내려진 공간엔
홍위원장, 강소장, 송사장, 조대표 네 명만 남아 있었다.

“오늘 참… 숨이 막히는 회의였네요.”
강소장이 찬 커피를 들이켜며 말했다.

“한마디로 정리되죠.
‘도와드릴게요’가 ‘들어갈게요’가 된 순간부터,
이건 협상이 아니라 압박입니다.”
송사장이 조용히 말했다.

홍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따로 만납시다.
공식 회의 말고, 비공식 면담.
최종적으로 어떻게 하실 건지 직접 듣고 싶습니다.”

















다음 날, 정면의 대화




아파트 상가 안 작은 회의실.
보조의자 두 개가 놓인 테이블 한켠에
김이심 부녀회장과 김영수 노인회장이 앉아 있었다.

“위원장님, 바쁘신데 시간 내줘서 고맙네요.”
김영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심 씨도 그렇고,
저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이런 자리, 솔직히 편한 건 아닙니다.”

김이심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제 회의 때 드린 말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전달드리고 싶었어요.”

그녀는 준비해온 종이를 꺼냈다.
활동명, 역할, 그리고 오른쪽 열엔 소액의 운영비 명목이 적혀 있었다.

“홍보자문, 주민소통 담당, 고령자 복지 연계, 문화행사 운영…
이건 실제로 우리가 해오던 일들이에요.
다만, 공식적으로 체계화되면 더 좋지 않겠어요?”

김영수가 말을 받았다.
“운영비라 해도, 우린 급여를 바라진 않습니다.
다만… 매달 300 정도씩,
자문료나 활동비 성격으로 잡아주시면 됩니다.”

그들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정확했다.

홍위원장은 서류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심 회장님, 김영수 회장님.
두 분이 단지에 해주신 일들,
누구보다 저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낸 거고요.”

그는 말을 고르듯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저희는 원칙이 있습니다.
아직 조합도 설립되지 않았고,
운영위 인건비는 고정비가 아닌, 비정기적 자원봉사성 활동비만 인정하기로
입주민들과 이미 약속했습니다.”

김이심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럼… 우리더러 봉사만 하라는 말씀이세요?”

“의미를 축소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아직 정식 예산도 없는 상태에서
월 300만 원씩의 인건비를 책정하는 건…”

김영수가 말을 잘랐다.
“그쪽에선 정비업체 대여금 받아 쓰시잖아요.
우린 명함도 안 받고 도와주겠다는 건데,
그 정도도 안 됩니까?”

홍위원장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 대여금도, 전액 회계공개 중이며
법률 자문과 주민 대상 홍보물, 설명회 준비 등
사용내역 전부 입주민에게 공유되고 있습니다.”

정적.

김이심이 천천히 서류를 접었다.
“그럼 그쪽 뜻은 알겠습니다.”

김영수도 일어서며 말했다.
“우리가 빠지면,
이 사업이 얼마나 매끄럽게 갈지 두고 보죠.”

















돌아서며 남긴 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을 열었다.
나가기 직전, 김이심이 돌아보며 말했다.

“위원장님.
사람은 원칙으로만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때론 정서, 때론 유연함도 있어야
리더가 되는 겁니다.”

홍위원장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명분은 끊겼고,
이제 남은 건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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