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다가온 사람

내게 마음을 열게 해 준 그 사람

by 은나무


수연이 그동안 만나온 사람들의 처음은 늘 애써 자기를 감추고 포장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달랐다.

그는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부터 솔직했다.


“수연 씨 난 돌싱이에요. 몇 년 전 이혼했어요.

애도 있어요. 네 살이고 현수라고 해요. 지금은 어머니와 셋이 살고 있어요. ”


수연은 순간 병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걸 느꼈다.

‘아이 있는 남자’라는 말은 그녀에게 경계의 방패를 더 크게 세우게 했다.

과거의 수많은 약속과 거짓 그리고 소유욕을 떠올리며 수연은 곧장 선을 그었다.


그걸 왜 저한테 말해요? 저는 진우 씨 관심 없어요” 수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은 방어였고 선언이었다.

다시는 아무에게 보호막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

진우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낮게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알아요. 그래도 그냥…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어요. 친구처럼 지내도 좋잖아요”


수연은 거절했고 그날 어쩔 수 없이 주고받은 그의 연락처도 막아놓으려 했지만 왠지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진우는 조심스럽게 꾸준히 다가왔다.


처음엔 소박한 것들이었다.

일찍 출근하는 날이면 미용실 앞에 작은 커피와 샌드위치를 두고 가고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챙겨 가게 앞에 살짝 두고 가기도 했다.


그의 제스처엔 과장이 없었다.

화려함도 계산도 없었다.

그저 ‘당신이 불편하지 않게’ 존재하려는 태도였다.


수연은 스스로 놀랐다.

과거라면 그런 친절을 ‘의도’로 읽었을 테고 곧장 몸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미용실에서 사람들과 쌓아온 일상의 온기 자신의 회복으로 생긴 작은 여유가 수연의 마음을 살짝 편안하게 만들어 놓았다.

진우가 건네는 작은 온기들을 수연은 아무렇지 않게 받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하나하나 기록했다.


어느 늦은 저녁.

미용실이 한창 바쁠 때였다.

원장님께서 갑자기 친척 결혼식 때문에 급히 자리를 비우게 되었고 직원도 한 명 아파서 손이 모자랐다. 예약 손님들이 겹치자 수연은 숨이 가빠졌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진우가 들어왔다. 손에는 도시락 상자와 작은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저, 혹시… 도와드릴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느새 불러주는 손님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수건을 정리하며 가볍게 파마 오일을 닦아냈다.


그의 손은 어설프지 않았다.

단정하고 신중한 손놀림이었다.

손님들은 처음엔 놀랐지만 이내 편안해하며 웃었다.


그날 밤 수연은 오래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 내 곁에 있어도 내가 사라지지 않는구나.’

진우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수연은 그저

그 사실만으로도 안도했다.


진우는 현수가 있는 주말에 종종 미용실 근처까지 들렀다. 어느 날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수 데리고 올게요. 괜찮아요? 잠깐 인사만 시켜드리고 싶어요.”


수연은 마음속의 파열음을 느꼈다.

‘아이’는 늘 복잡한 의미였다.

책임, 기대, 상처의 재연.

그래도 그날은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수연은 자신이 조금 지쳐있었고 진우의 솔직함이 그녀를 궁금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수는 네 살답게 분주했다.

식당 안 큼직한 가방을 끌고 들어오면서도 곧장 장난감 자동차를 꺼내 의자로 달려갔다.

진우는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랐다.

부드럽고 책임감이 있었다.


손수 도시락 뚜껑을 따주고 현수의 작은 애착인형을 조심스레 털어주었다.

수연은 그 장면을 한참 바라봤다.

작은 것들을 챙기는 남자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남자’와 전혀 다른 종류의 신호를 보냈다.


그날 수연은 우연히 현수가 떨어뜨린 사과를 주워 주었고 아이는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모, 이거 같이 먹자.” 하고 건넸다.

그 한마디에 불현듯 수연의 가슴이 저려왔다. 아이의 순수함은 수연의 방어막을 슬쩍 밀어냈다.


시간은 더디게도 그러나 꾸준히 흘렀다.

진우는 쉬운 약속만 했다.

늦지 않겠다는 약속 한 번 한 말은 지키겠다는 약속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미리 말하는 약속.


수연은 그 약속들이 쌓이는 것을 보며 마음의 무게추가 조금씩 이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절대 ‘엄마 역할’을 강요하지 않았다.

진우는 늘 먼저 말했다.

“현수는 내 책임이에요. 수연 씨가 뭔가 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같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인 거예요.”


어느 저녁이었다.

현수가 갑자기 열이 난다고 현수 할머니에게 전화를 받은 진우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제가 빨리 집으로 갈게요."


수연은 같이 가도 되겠냐는 진우의 말에 조금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현수는 수연 무릎에 머리를 얹고 잠들었다. 따뜻한 체온 그 작고 불안한 숨소리를 들으며 수연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얹었다.


그 작은 접촉은 수연에게 큰 의미였다.

오래도록 닫아두었던 마음의 문이 아주 조금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연은 여전히 경계했다.

밤마다 불안이 덮쳤고 때때로 자신을 의심했다.


‘내가 다시 누군가에게 기댄다면 그 끝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늘 뒤따랐다.


진우는 그런 수연을 조급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어느 날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다 그는 말했다.

“서두르지 말아요. 나도 빠르게 재촉하지 않아요. 우리에게는 서로의 속도가 있는 거죠.”

그 말은 수연에게 작은 위로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아주 작은 것들로 둘의 거리는 줄어들었다.

진우의 꾸준함 현수의 웃음 그리고 수연의 느린 허락. 어떤 날은 단순한 저녁식사 어떤 날은 함께 걷는 동네 공원 아주 소소한 일상이 한 올씩 연결될 때마다 수연은 놀랐다.

‘나도 이 평범함 안에서 안식할 수 있구나’ 하고...


마지막 장면은 평범한 오후였다.

공원 벤치에 앉아 현수가 장난감을 갖고 노는 걸 바라봤다. 진우는 손수 모자를 고쳐 쓰여 주고 수연은 작은 손으로 사과 조각을 건넸다. 진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우리 옆에 있어줘서.”


수연은 잠깐 눈을 감았다.

옛날엔 그런 말이 무섭게 들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음의 경계선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손 끝이 닿자 따뜻했다.

수연은 낮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나도...”


그날 수연의 심장은 오래간만에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박동을 맞추고 있었다.


믿음은 단숨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신뢰는 작은 약속들 위에 쌓이는 것이었다.

수연은 그 사실을 몸으로 배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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