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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일곱 살 이전의 기억

by 은나무


내가 엄마와 살았던 오래된 기억 중

하나는 마당이 있는 낡은집 월세방 살이었다.



가운데 수도가 하나 있고 그 주위를 빙 둘러

방 한 칸씩이 붙어 있었다.
여름이면 수도가에서 물장난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빨래를 짜는 어른들의 손목의 힘줄이 엉켜 있던 곳.
나는 그 마당에서 한 지붕아래 사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재밌었다.



엄마는 집 근처 식당에서 일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반찬냄새가 옷에 배어 퇴근시간이 되면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식당 앞에서 놀다 졸리면

식당 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엄마는 계산대 근처에서 일하다가 나를 발견하면
“조금만 더 기다려 금방 끝나.” 하고는 손짓을 했다.
그 말은 언제나 거짓말이었다.
‘금방’이란 말은 늘 몇 시간쯤 뒤였다.



그 시절.

내 단짝은 옆방에 살던 동갑내기 남자아이였다.
나보다 키는 작았지만 눈이 크고

웃을 때마다 볼에 보조개가 생겼다.
우리는 매일 마당에서 만나
세상에서 가장 큰 모험을 꾸미듯 놀았다.



한 번은 동네 테니스장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다.
하얀 가루가 깔린 코트 위에서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고

코트를 그리는 기계를 가지고 이리저리 밀고 다니며

코트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적도 있었다.



운동장 끝까지 달리며 발자국도 남겼다.
그러다 테니스장 관리하시는 아저씨한테 들켜서
“이놈들!” 하는 소리와 동시에
둘 다 웃음을 터뜨리며 미친 듯이 도망쳤다.
골목길로 또 다른 골목으로.
숨이 턱에 차고 웃음이 눈물처럼 터져 나왔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아빠 없이 엄마랑 둘이 살던

그때의 나는 그 나이 아이답게 해맑고 티 없이 밝았던 거 같다.



그 친구에겐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세 살, 네 살쯤 됐을까.
우리는 그 아이를 데리고 놀기 싫어서 슬쩍 피하는 척하며 마당을 돌거나 같이 노는 척하다가 어느 순간 둘이 숨어버리기도 했었다.
그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면 어른들이 나와서 우리를 나무랐다.
“형이랑 누나가 같이 놀아줘야지!”



우리보다 어린 동생은 느리고 울보였다.
그래서 더더욱 단짝 친구와 둘이서만 놀고 싶었다.



가끔 친구와 놀다가 식당을 벗어나 있을 때

해가 지고 식당 간판에 불빛이 켜질 무렵이면
엄마의 그림자가 골목 끝에서 나타났다.
하얀 앞치마에는 국물 자국이 묻어 있고
손등은 늘 부르터 있었다.



엄마는 피곤한 얼굴로 나를 안아 올리며
“오늘도 잘 놀았어?”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 목에 팔을 감았다.
엄마는 늘 나를 혼내고 화내고 무섭기도 했지만
밤에 엄마 품에 안겨 잘 때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다.



지금도 기억난다.
그 좁은 방 벽지에 스며든 연탄 냄새.
엄마의 손등이 내 머리를 쓰다듬던 감촉.



밖에서는 다른 방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어딘가에서 노랫소리와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도 났다.
그 속에서 나는 세상이 얼마나 좁은 지도
그 안이 얼마나 따뜻했는지도 몰랐다.



그 시절의 나는 엄마가 불행하다는 걸 몰랐다.
단지 엄마는 늘 바빴고 나는 늘 기다렸을 뿐이다.



그 시간이 내 삶의 시작이었다.
엄마의 팔자 안에서 태어나,
그 팔자 속에서 자라난 나의 첫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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