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미용실에 키도 작고 마른 체형에
퍽 지쳐 보이는 중년의 남자분이 들어오셨다.
얼굴엔 피곤이 내려앉아 있고 머리엔
사나흘 감지 못한 듯 비듬과 유분이 가득했다.
보통은 샴푸실로 먼저 안내하지만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그 얼굴을 보니 괜히
“그냥 앉으세요 커트해드릴게요.” 하고 싶어졌다.
커트를 시작하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요. 야간 근무를 하고 일이 끝나면
바로 자기 바빠요. 머리 감은 지… 한 3일 됐어요. 미안합니다. 다음엔 감고 올게요.”
그 말투가 조금 낯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고객님, 고향이 어디세요? 북한이세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한다.
“고향 말하면… 그 나라 사람들 안 씻고 다닌다고 소문내시는 거 아니십니까?"
“아유 걱정 마셔요. 소문 안 냅니다. 저는 그냥 궁금해서요. 북한에서 오신 거 맞죠?”
“…네. 15년 전에 왔습니다.
죽기 살기로… 목숨 걸고 왔어요.”
나는 그간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봐왔던 터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가족분들은요…?”
“혼자 왔습니다.”
"아구.. 마음이 힘드시겠네요..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 누구요?”
“선생님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처절한지 모르고 이 땅에 태어나 평안하게 자라서 일하고, 머리 깎고, 가족이랑 웃고… 그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셔야 합니다.”
그 말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북한 주민으로 살아온 삶을
가벼운 동정이 아닌 ‘존엄한 인간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사람을 내 앞에서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고객님 오늘은 제가 마사지 샴푸를 해드리고 싶어요. 오늘도 피곤하실 텐데 댁에 가셔서 바로 주무실 수 있게요"
"아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제 마음이 해드리고 싶어서요."
우리 가게는 커트비가 저렴한 대신 샴푸는 셀프이고
마사지 샴푸까지 하는 비용은 18000원이다.
그래서 내가 샴푸를 서비스로 해드린 것도
프로모션도, 친절 포인트도 아니었다.
그냥…
오늘 하루라도 이 사람이 위로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샴푸대에 누워 눈을 감은 그의 표정은
말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것을 말해줬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고객님… 북한 정권은 저도 동의할 수 없지만
이 땅에도 고객님처럼 아픈 삶을 짊어진 분들을 위해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기서는 더 따뜻해지시길 바랄게요.”
머리를 말리고 마무리한 후 계산을 도우려 하는데
갑자기 그가 말했다.
“선생님, 제가 밥이라도 사드릴까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저를요? 고객님이요? 하하하, 괜찮습니다.
대신에 다음에 또 오세요.”
그런데 그가 덧붙인 말이
오늘 하루 중 가장 뜨거운 문장으로 남을 거 같다.
“선생님 같은 분… 대한민국 와서 처음 봅니다.
여기 사람들… 대부분은 차가워요. 오늘 참 감사했습니다.”
말끝이 조금 떨렸고
나는 그 떨림 속에 담긴 지난 시간들을 보았다.
혼자서 국경을 넘었을 사람.
가족 하나 없이 이 땅에 정착해야 했을 사람.
밤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는 일부러 농담으로 분위기를 돌리며 말했다.
“다음엔 머리 꼭 감고 오셔야 돼요~ 비듬 또 나오면 잔소리합니다. 고객님 두피 건강 때문이에요!”
그는 수줍게 웃으며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내 눈가가 뜨겁게 젖었다.
삶은 우리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평범한 하루를 사는 것조차
목숨을 걸고 건너온 뒤에야 얻을 수 있다.
오늘 내가 해드린 작은 샴푸 한 번, 말 한마디, 웃음 하나가
그분에게 아주 작은 따뜻함이라도 되었기를 바란다.
그 작은 온기가
한국의 차가운 겨울을
조금이라도 덜 춥게 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