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할 때 관광지에 들르거나 유명한 빵집에 가거나 줄 서는 카페에 가서 인증사진을 찍고 커피를 마시는 것을 하느라 바빴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관광객의 시선이 아닌 그 지역 주민의 삶처럼 살아보는 여행을 선호하게 되었다. 여행을 갔다고 꼭 특별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강박을 갖기보다는 동네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하고, 매일 하루의 루틴처럼 아침 운동을 하고, 숙소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동네 카페에 들르는 그런 여행.
그래서인가 요즘엔 여행을 할 때 스트레스가 좀 덜하다. 일단 갈 곳과 숙소를 정하면 거의 끝이랄까? 그 대신 숙소를 선택함에 있어 조금 더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지난주에는 레오와 함께 안동, 영덕, 울진 여행을 다녀왔다. 대게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와 레오는 겨울이 되면 안동에 들렀다가 강구항에서 대게를 먹고, 울진쯤에 가서 여행하는 코스를 즐긴다. 보통 2박 3일 코스로 다녀오곤 한다. 보통 연초에 많이 다녀오는데 올해는 연말에 평소보다는 조금 이르게 다녀오게 되었다.
대게가 목적이기에 영덕으로 바로 갈 법도 한데 바로 영덕 강구항으로 향하지 않고 안동에 들르는 이유는 안동에 연고지가 있기 때문이다. 레오 가족의 땅이 있는데, 몇 년 전 땅 주변 주민으로부터 땅의 경계에 길을 내고 싶은데 가능할지 묻는 편지를 한 통 받았더랬다. 연락처를 모르기에 안동시청에 가서 땅에 적혀있는 권리자 주소로 편지를 보낸 것이다. 길이 생기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라 우리는 그때 안동에 가서 길을 내는 것에 동의하고 주민분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안동에 들러 땅을 살피고 있는데, 얼마 후 가 보니 우리 땅을 누군가가 평탄화 작업을 하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그 땅의 소유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농사를 짓는 사람을 찾아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 이후로 우리 땅에 농사를 짓는 대가로 매년 쌀을 3 가마니 씩 도지형식으로 받게 되었다.
올해 가 보니 그 땅에 고추, 깨, 콩, 쌀농사를 지은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다음에 은퇴를 하게 된다면 이곳에 내려와 살아도 좋겠다는 얘기를 레오와 살짝 나누었다. 살기는 힘들고, 잠시 왔다 갔다 하는 별장 느낌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안동 땅을 둘러보고 예약해 둔 안동 서부시장 인근의 숙소를 찾았다. 신축 호텔이었고 다양한 크기의 방이 있었는데, 내가 선택한 룸은 안마의자가 있는 방이었다. 서울에서 안동까지 4시간 정도 운전을 하기도 했고, 안마를 워낙 좋아하는 레오를 위한 배려였다. 나도 안마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너무 강도가 센 것은 선호하지 않는 반면 레오는 좀 더 세고 강한 것을 좋아한다. 숙소는 깔끔했고, 침대도 포근했다. 바깥 뷰도 나쁘지 않았다. 맨 위층에는 라운지가 있었고, 몰랐는데 간단한 조식도 무료제공된다고 했다. 그렇게 숙소에 짐을 풀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에 동네 산책 겸 저녁으로 안동찜닭을 먹기 위해 나왔다. 서부시장은 그리 활성화된 시장은 아닌 듯 보였고, 모텔과 노래방이 많은 유흥가 같았다. 찜닭집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주민의 추천으로 치킨천국? 에 갔는데, 마침 문이 닫혀 있었다. 찜닭 집이라기엔 가게 이름부터 조금 의심스럽긴 했지만 동네 주민의 추천이라 믿어보자며 찾아간 거였는데, 아쉬웠다. 결국 호텔에 들어갈 때 봐 두었던 바로 앞 찜닭 집에 갔다. 찜닭은 맛있었다. 안동에 왔으니 안동소주를 곁들일까 하다가 간단히 맥주만 마셨다.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레오와 함께일 때는 술은 저절로 자제하게 된다. 사실 맥주 한 병이면 충분하기도 하다.
저녁을 든든히 먹고 소화를 시킬 겸 본격적인 동네 산책을 시작했다. 숙소에서 보였던 언덕 위 공원이 식당 근처여서 살짝 올라가 보기로 했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터라 차에 들러서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공원 근처에는 가로등이 많지 않았다. 나지막한 언덕 위 공원에 도착하니 인근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책했을 때 봤던 모텔과 노래방이 많은 유흥가 치고는 조용하고 얌전한 동네였다. 공원에서 내려와 한 바퀴 돌다 보니 초등학교가 나왔다. 학교 운동장에 가 보니 저녁 운동을 하는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몇몇 놀고 있었다. 나와 레오도 운동장을 돌며 가볍게 조깅을 하고 병설유치원 앞에 있는 그네를 탔다.
"내일 아침에는 여기를 달리면 되겠어"
"오호~ 내일도 달리게?"
"응. 여행지에서도 러닝은 못 참지."
그랬다. 여행을 가면 이제는 어느 곳을 달리면 좋을지 찾게 되었다. 일상의 루틴을 깨고 싶지 않은 여행지에서의 루틴이 된 것이다. 바깥에서 달릴만한 곳이 없을 때는 호텔에 있는 짐을 찾아 트레드밀을 달리거나 수영을 한다. 사실 낯선 곳에서 바깥을 달리는 것이 설레는 일이기는 하지만 조금은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호기심이 많은 반면 겁도 많은 나에게는 살짝 도전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 6시가 되니 알람이 울렸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운동복을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섰다. 어제 다녀왔던 초등학교에 가니 이미 동네 어르신들이 나와 운동을 하고 계셨다. 운동장을 돌며 5km 러닝을 했다. 땀이 나면서 기분이 상쾌해졌다. 영덕 강구항에 가서 대게를 먹을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집에 돌아와 씻고 라운지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수프와 토스트, 시리얼,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방에 돌아와 안마를 마지막으로 좀 더 받은 뒤 짐을 챙겨 강구항으로 출발했다. 대게축제가 보통 3월에 하기 때문에 지금은 대게보다는 홍게가 살수율이 높은 시기였다. 홍게는 좀 짭조름한 반면 대게는 고소하면서도 담백했기에 대게를 더 좋아했지만 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작은 대게보다는 큰 홍게를 먹는 게 나을 듯 해 홍게 큰 놈으로 4마리와 작은 대게 2마리를 서비스로 받아 식당에 들어갔다.
찜기에 들어갔다가 나온 게를 직원분들이 먹기 좋게 손질해 식탁에 올려주셨다. 식당은 조금 허름했지만 손질 솜씨만큼은 물러가라였다. 큰 홍게는 역시 살이 가득 차 있었고 짭조름했다. 그러다 고소한 녀석들을 보면 대게였다. '나는 역시 대게 파인 듯... ' 생각하며 맛나게 홍게와 대게를 먹고 대게볶음밥까지 든든히 먹었다.
다음 목적지는 백암온천이 있는 백암온천지구였다. 덕구온천에 가려했는데, 이미 예약이 가득 찬 상태라 더 안쪽에 있는 백암온천에 가게 되었다. 우리는 마사지만큼이나 스파, 사우나, 온천을 좋아하기에 여행을 할 때 인근에 그런 곳이 있으면 찾아가게 된다. 가는 길에 후포해변에 들러 산책을 하고 백암온천으로 향했다.
공사 중이어서 후포해변에서 백암온천에 가는 길이 구불구불했는데, 인근에 도착하니 소방헬기들이 바쁘게 오고 가고 있었고 소방차며 경찰차도 분주히 오갔다. 숙소 주인에게 물어보니 인근 밭에 작은 불이 났는데, 주불이 잡혔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인근 주민이 담배를 피우다가 불이 났다고 했다. 요즘에는 작은 불이 나도 헬기가 출동해 불을 꺼야 큰 불을 막을 수 있기에 그랬던 거라고 한다. 큰 불이 난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온천을 즐겼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옛날 여관방 같은 숙소였는데, 나는 이 숙소가 꽤나 맘에 들었다. 인근에 한화 리조트가 문을 닫으면서 인근 다른 숙소들도 문을 닫은 곳들이 많았는데, 내가 예약한 숙소는 가장 끝에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이 많았다. 온천만 하러 오는 손님들도 많아 보였다. 온천을 다녀오니 물이 순하면서도 피부가 매끈매끈해지는 게 좋았다. 오래되긴 했지만 시설을 깨끗이 유지하려고 애쓴 것이 보였다. 숙소도 들어서자마자 방이 따끈따끈했고, 산이 보이는 바깥 뷰에 침구도 깨끗했다. 일부러 침대방이 아닌 한실을 예약했는데,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숙박을 하면 온천은 몇 번이고 이용할 수 있었기에 다음날 아침을 기약하고 저녁을 먹으로 나왔다. 백암온천지구에는 LG, 포스코 등 대기업연수원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LG연수원에는 일반도 이용할 수 있는 식당이 있어 우리는 저녁식사로 양식당을 예약해 다녀왔다. 가성비가 좋다더니 가격은 정말 저렴했고 서비스도 엇비슷했다. 연수원 안에는 자율식당도 있어서 석식과 조식을 해결할 수 있을 듯 보였다.
저녁을 먹고 나와 걸으니 밤하늘에 쏟아질 듯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조명이 많지 않고 공기가 맑아서인지 별들이 너무 예쁘게 총총 떠 있었다. 인근 도로를 따라 밤산책을 했다. 혼자라면 무서웠을 테지만 내 옆에는 레오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온천 오픈시간을 미리 봐 두었던 터라 새벽 6시가 좀 넘어 바로 온천으로 향했다. 따끈한 물에 몸을 녹이고 씻고 나와 체크아웃을 하고 백암산 등산을 갔다. 숙소 바로 뒤에 백암산이 있었는데, 정상까지 가기는 어려울 듯하여 백암폭포까지만 다녀오기로 하고 출발했다. 아침일찍이라그런지 오고 가는 사람 한 명 보지 못하다가 폭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2 커플을 만났다.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 등산로라 어렵지는 않았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꽤 여러 번 있었고, 낙엽으로 길이 가려져 있어 쓸만한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의지하며 산을 탔다.
그렇게 백암폭포까지 다녀오니 1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다음에는 정상에 오르리 다짐하고 늦은 아침식사를 했다. 순댓국에 반찬을 더 내어주셔서 맛나게 아침을 먹고 또다시 온천을 하러 갔다. 물이 좋으니 온천을 자꾸자꾸 찾아가게 된다. 그렇게 씻고 서울로 출발. 내비를 찍어보니 5시간 30분이 걸린단다. 가는 길에 차는 막히지 않았는데, 서울에서 백암온천지구가 꽤 멀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다음에는 같은 숙소를 예약해 백암산에도 다녀오고 온천도 하고 자율식당에서 식사도 하고 그런 여행을 또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여행은 언제나 숙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숙소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데, 사실 가기 전까지는 후기를 많이 살피더라도 나의 선택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알기 어렵다. 안동의 숙소는 그나마 자신이 있었지만 백암온천숙소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숙소의 첫인상이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그것으로 오케이다. 백암온천숙소는 오래된 숙소여서 사실 괜찮을지 고민하면서 선택한 숙소였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있었고 방이 따뜻하고 깨끗했으며 뷰도 좋았고 환기도 잘 되어 있었다. 숙소의 기본을 잘 갖춘 숙소였기에 만족도가 높았다. 숙소가 선택되었다면 이후의 것들은 동네가 주는 분위기다. 그 분위기를 잘 느끼고 스며들며 동네주민들처럼 동네를 아끼는 마음으로 여행한다면 여행의 만족도는 자연스레 올라간다.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보낸다면 조금 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