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나도 아마 ‘엄마’라는 단어를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은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아들도 그렇다. 한 살이었을 때도, 열한 살이 된 지금도,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부른다.
“엄마, 배고파.”
“엄마, 이것 좀 봐.”
“엄마, 나 아파.”
“엄마, 뭐 해?”
그리고 틈만 나면 “엄마, 엄마!”
아이가 처음 ‘엄마’라고 불러주던 그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요즘은 아이가 나를 부를 때마다 가끔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 아이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든든한 존재일 텐데, 그 기대에 내가 혹시라도 미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어릴 적 나에게도 엄마는 언제나 강한 존재였다. 무너지지 않고, 모든 걸 다 감싸줄 수 있는 절대적인 사람.
그래서일까. 아이 앞에서 무너질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더 강하게, 더 현명해지도록 몰아가곤 한다.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는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불쑥 다가온다.
밤새 열이 오르던 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날이 있었다.
나는 아이의 이마에 젖은 수건을 올려주며, 속으로 수십 번도 넘게 기도했다. ‘제발 빨리 열이 내려가게 해 달라고.’
그때 아이는 연약한 목소리로 “엄마, 괜찮아?”라고 내게 물었다. 아픈 건 아이인데, 안심시켜야 하는 건 나였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아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울타리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무게는 무겁지만, 그 무게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학교에서 작은 일이 있었을 때였다.
친구와의 다툼으로 울고 돌아온 아이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말했다.
“엄마, 나 억울해. 엄마는 내 편이지?”
그 말에 나는 주춤했다. 무조건적인 지지와 동시에, 아이가 세상 속에서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래, 네가 맞아”라고 말하기엔 부족했고, “네가 틀렸어”라고 말하기엔 너무 가혹했다. 아이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면서도, 변함없이 ‘내 편’이 되어야 하는 것. 그 균형이야말로 엄마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 속에서도 무게는 늘 존재한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와도, 아이가 달려와 “엄마!” 하고 부르면 피곤함을 뒤로 미뤄야 한다. 저녁을 차리고, 숙제를 챙기고, 내 이야기는 잠시 접어둔 채 아이의 하루를 들어준다. 엄마라는 이름은 때로 내 목소리를 줄이고, 내 감정을 눌러야 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무게는 나를 짓누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무게가 있기에 나는 단단해졌고, 책임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어릴 적 엄마를 절대적인 존재로 여겼던 것처럼, 지금 내 아이도 나를 그 무게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그 무게는 나를 더 강하게 만들고, 아이를 지탱하게 하는 또 다른 힘이 된다.
엄마라는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때로는 나를 짓누르고, 때로는 나를 지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게가 있었기에 나는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고, 더 깊은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
아이의 눈빛 하나, 작은 손길 하나가 그 무게를 은혜로 바꾼다.
‘엄마’라는 두 글자 안에는 짐도 있지만, 동시에 축복도 있다.
내가 기대지 못할 만큼 무겁게만 느껴질 때조차, 그 무게는 결국 나를 더 크고 넓은 사람으로 빚어왔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는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세워주는 은혜라는 것을.
그리고 그 무게를 짊어진 나의 삶은, 결국 가장 큰 축복이었다는 것을.
[함께하는 작가님]
지혜여니, 따름, 김수다, 아델린, 새봄, 바람꽃, 다정한태쁘, 한빛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