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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을 되찾는 시간

by 한빛나
학교에서는 번호로 불리다가, 직장에서는 직책으로만 불리고, 가정에서는 부모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얼마 전, 인터넷 기사에서 읽은 문장이다.
그 문장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엄마가 되고 싶던 시간이 참 길었다.
그래서일까. 처음 ‘엄마’라고 불리던 그날이 참 좋았다. 누구 엄마, 누구 어머니라는 그 호칭 안에는 사랑과 책임이 함께 들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이름만 ‘엄마’로 바뀐 게 아니라, 그 이름과 함께 ‘나’라는 사람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자라 학교에 가고,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다. 그런데 막상 내 앞에 펼쳐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예전의 나는 ‘취미부자’라 불릴 만큼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있는 일도 많았던 사람인데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그 모든 것을 멈추게 할 만큼 너무나 크고 절대적인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무엇이든 또래들보다 조금 느렸던 아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며, 조금씩 해 나가자고 다독이며 곁에서 함께 걸었다.

그렇게 느리게 자라던 아이가 이제는 제법 엄마의 품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스스로 옷을 고르고, 가방을 챙기고, 혼자서도 잘 해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런데 문득,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간이 시작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 조금 쓸쓸해지기도 한다.


편하고 여유로울 것만 같던 시간이 이상하게도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두려움은 잃어버렸던 내 시간,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 자신을 마주하는 두려움이었다.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모습도 변했지만, 그보다 더 낯선 건 텅 빈 것 같은 내 마음이었다.

나중으로 미뤄뒀던 내 꿈과 취미들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그동안 너무 멀리 두었던 나의 세계가 아직은 희미하지만 조금씩 되살아나는 듯하다.




그래, 나는 꽤 오랫동안 나 자신을 잊고 살았다. 아이의 하루를 먼저 챙기고, 가족의 일정을 우선하고, 나의 마음은 늘 그 뒤로 밀려났다. ‘엄마니까 당연하지’라는 말은 어쩌면 나를 가장 손쉽게 설득시킨 주문이었다.

그 말 뒤에 숨은 건 사랑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미뤄도 괜찮다’는 자기 합리화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달라지고 싶다. 내가 행복해야 아이도, 가족도 더 따뜻해진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나는 아주 작은 일들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는 향기를 천천히 느끼고, 그동안 미뤄왔던 책 한 권을 꺼내 읽는다.
하루의 끝에 짧은 글을 쓰며, 오늘의 나를 기록하는 연습도 하고 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나답게 숨 쉬는 삶’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싶다.

예전엔 나를 위한 시간이 이기적인 일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 마음이 단단해져야 가족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예전보다 조금 지쳐 있고, 때로는 자신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분명 ‘나’라는 이름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름을 되찾는다는 건, 세상 속에서 나만의 호흡을 되찾는 일이다. 누군가의 엄마이기 전에, 하나의 사람으로서 다시 서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를 부른다. 오랜만에 내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

그 이름 속에서 내가 다시 살아나는 소리가 들린다.



[함께하는 작가님]

지혜여니, 따름, 김수다, 아델린, 새봄, 바람꽃, 다정한태쁘, 한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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