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문 앞에서...
나는 그다지 유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셨던 아버지를 대신해 경제적 가장의 자리를 채우느라 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시던 어머니는 바쁜 삶 속에서도 늘 따뜻한 미소와 사랑으로 자식들을 키워주셨다. 특히 막내였던 나에게는 잘하든 못하든 늘 칭찬을 해 주셨고, 뭐든 해 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심어 주셨다. 그 때문인지 평생을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지 못했음에도 나에게는 늘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꽤 괜찮은 회사의 관리자 직급으로 일을 시작했다. 정말 좋아했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돼 매일 밤을 새우는 스케줄에도 나는 행복했다. 그렇게 적잖은 경력도 쌓고, 업계에서 평판도 꽤 괜찮게 난 덕에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을 때는 꽤 많은 러브콜을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수년간 매일같이 밤샘과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일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건강이 무너졌고, 더불어 번아웃까지 오면서 나는 애정을 갖고 했던 일을 다 내려놓고,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삶 또한 당연히도 순탄치 못했다. 언어의 장벽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꽤 오래 쌓았던 경력도 미국에서는 인정받기 힘들어, 전공이나 경력과 전혀 상관없는 다양한 일들을 도전해 보면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어야 했다. 다양한 일들을 도전해 보던 중 겨우 한 직장에서 꽤 오래 일을 하며 인생의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지만, 순탄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게 인생인가... 안정을 찾아갈 무렵 가정에 큰 위기가 찾아왔고, 이어서 전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 팬데믹이 터져버렸다. 나는 하루아침에 실직했고, 앞이 막막했다. 하지만 격리된 삶은 나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꽤 깊은 고찰을 할 기회를 주었고, 바람 앞에 촛불처럼 언제 훅 꺼져버릴지 모를 삶에서 한 번은 더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죽어야 하지 않겠나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한국에서 건강 때문에 일을 내려놓고 수년간 많이 후회했다. 사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회보다는 아쉬움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젊은 시절 날아다니며 열심히 일하고, 하는 만큼 인정받던 그 반짝이던 시절이 너무 그리웠다. 그렇게 나는 갑자기 짐을 다 싸들고 나이 마흔 살에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보통 마흔이면 하던 일에서 자리를 잡고, 여러 부분에서 삶의 안정을 찾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늘 열심히 즐겁게 사는 것에만 몰두하던 나는 마흔이란 나이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에 큰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바뀌어 있었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바뀌어 있었다. 소위 말하는 베스트 프렌드라고 하는 친구들 중 한 명은 돈도 없이 다시 예전 하던 일을 하겠다고 돌아와 월세 방을 찾으러 다니는 나를 불쌍하고 이해 안 간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나를 걱정해 주는 듯한 말에는 안정되게 사는 자의 우월감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가 잔뜩 배어있었다. 30년간 친구로 지내며 느껴보지 못했던 하대하는 친구의 태도는 우울한 시작을 암시하는듯했다.
내가 서울을 떠났을 그 시기에 나는 소위말해 매우 잘 팔리는 사람이었다. 그 시기 내가 일하던 업계에 큰 지각변동이 있었고, 수많은 신생 회사들이 생겨나면서 모든 회사들이 인재를 데려가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내 연차는 특히나 수요가 많은 연차였고, 이력서를 냈다 하면 바로 채용되는 거의 프리패스 이력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돌아온 서울에서 내 이력서는 다른 의미로 프리패스가 됐다는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관련 업계의 하위 직급 또는 신입 직급까지 다 넣어봐도 면접 기회를 잡기 조차 힘들었다. 어쩌다 한 번씩 돌아온 답변은 나이가 너무 많아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내 마음과 정신은 바뀐 것이 없는데, 나를 대변하는 숫자는 모든 이들이 꺼리는 숫자로 바뀌어 버렸다는 사실을 한동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여전히 예전과 똑같이 열심히 할 수 있는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음에 화가 났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다시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지 6개월. 마침내 아주 운 좋게 평소 동경하던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감사한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10년 만에 하는 일이라 기억을 더듬어 가며 해 나가느라 예전보다 시간은 더 걸렸지만 너무 행복했다. 다행히 근무환경이 많이 좋아져 밤새는 일도 예전만큼 많지 않아 좋았지만, 어쩌다 하루 밤샘일을 할 때면 정말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게 몸에 직접적인 타격이 왔다. 밤샘 후에는 치주염이 생겨 이가 흔들리기까지 했고, 어지럼증은 물론이고 기억력에도 문제가 생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서울로 이주한 직후 개에게 물리는 사고가 있었는데, 그 사건의 후유증으로 전신 통증에 시달리던 시기였고, 밤샘 후에는 거의 몸이 찢겨나가는 것 같은 통증에 시달렸다. 서른 살까지만 해도 주 6일씩 밤샘 작업을 해도 끄떡없어 면접을 볼 때면 밤 잘 샌다는 걸 어필할 정도의 나였기에 마흔 후에 이런 몸 상태를 마주한건 정말 당혹스럽고 절망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가 평생에 걸쳐 나에게 심어주신 자신감을 하나 둘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 후로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상황은 해가 갈수록 나빠져만가고 있다. 노화는 시속 40킬로에서 42킬로로 빨라졌지만 여전히 나의 이상은 20킬로대에서 헤매고 있다. 늙어가는 몸을 이끌고 젊은 날의 꿈을 좇는 일은 마치 녹슨 기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려 하는 것과 같다. 시간은 내 육체를 비정하게 침식해 가지만, 내 꿈과 야망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져만 간다. 썩어가는 육체를 바라보며 한숨짓다가도, 가슴속에서 꿈틀대는 열정의 울림을 느낄 때면 녹슨 기차 바퀴에 기름칠을 하듯 조금은 육체가 의지대로 움직여지는 것에 작은 위안과 희망을 얻는다. 이렇게 나는 매일 녹슬어 가는 내 기차에 기름칠을 하며 오늘도 고속도로를 기웃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