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가 건넨 풍경
도서관 카페에서 일을 하다 보면 잔잔한 풍경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장면과 마주할 때가 있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커피를 내리지만 그날그날의 사람과 순간은 결코 같지 않다.
누군가는 책을 끌어안고 커피를 마시며 긴 시간을 보내낸다.
또 누군가는 잠시 들렀다 사라지며 흔적만 남긴다.
어떤 장면은 금세 잊히지만 어떤 장면은 오래도록 마음에 머문다.
마치 작은 파문이 번져 나가듯 그 기억이 내 일상의 결을 살짝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날도 그랬다.
평범한 하루처럼 흘러가던 시간 속에서 나는 도서관 복도에서 한 사람을 마주쳤다.
휠체어에 앉아 사물함 앞에 서 있는 듯한 그 사람은 바닥에 떨어진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책을 향해 있었지만 쉽게 손을 뻗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그러나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낯선 상황 앞에서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왜 이토록 조심스러운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그때, 그는 나를 바라보며 짧고도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 좀 주워주세요.”
나는 얼른 허리를 굽혀 책을 주워 드렸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짧게 남기고 휠체어 바퀴를 굴려 자율학습실로 들어갔다.
짧은 만남이었다. 그런데도 그 장면이 묘하게 오래 남았다.
바닥에 놓인 책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내 마음 한구석을 오래 붙들었기 때문이다.
점심 무렵, 그는 카페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뭔가를 꺼내 간단히 끼니를 때우는 듯 보였다.
샌드위치였을까, 아니면 집에서 챙겨 온 도시락이었을까.
혼자 있는 모습은 어쩐지 단정하면서도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나는 커피를 내리면서도 자꾸 시선이 그에게 갔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 그의 앞에 앉았다.
두 사람은 서류 같은 것을 펼쳐 보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표정은 진지했다.
나는 속으로 ‘아, 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이었구나’ 하고 짐작했다.
그런데 조금 뒤 또 다른 사람이 와서 함께 자리에 앉았다.
셋은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화의 흐름을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웃음이 섞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에서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도대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학업 중인 학생일까? 아니면 직장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일까?
혹은 지역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활동을 이끄는 리더일지도 모른다.
휠체어에 앉아 있다는 사실보다 함께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진지한 눈빛이 오히려 그를 특별하게 보이게 했다.
그러면서 문득, 아까 복도에서 그가 내게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책 좀 주워주세요.” 단순한 부탁이었지만 그 한마디 덕분에 나는 그의 하루를 잠시나마 함께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침묵 속에서 책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면 나는 어쩌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말 한마디가 만들어 낸 연결이 이토록 깊은 울림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나는 그와 두 사람의 대화를 배경음악처럼 들으며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어쩌면 그는 새로운 길을 준비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누군가에게 든든한 동료이자 선배로 서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그의 하루 또한 누군가와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단단히 빚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는 빈 의자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빈자리마저도 하나의 풍경처럼 남았다.
휠체어가 머문 자리, 웃음 섞인 대화의 잔향, 그리고 책을 바라보던 그 첫 순간의 눈빛까지.
나는 오늘도 카운터에 서서 커피를 내린다.
여전히 사람들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또 언젠가 누군가의 하루 속 장면 하나를 오래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날 만난 휠체어의 그는 내게 그런 가능성을 일깨워 준 사람이었다.
삶은 때때로 뜻밖의 장면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짧은 부탁 한마디일 수도 있고, 카페 한 모퉁이에 앉아 나누던 대화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순간들이 내 마음속에 작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울림이 나를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깊게 살아가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