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투기하는, 그러나 부정되지 않는,

보통의 인간 <소현성록>의 화수은

by 고은임

우리나라 고전소설에는 처첩갈등이 자주 등장하고 이때 투기하는 여성은 악녀로 그려지곤 한다. 반면 선한 여성들은 남편의 처나 첩에게 심적 동요를 느끼지 않고 그들과 총애를 다투지도 않는다. 김만중 소설 <사씨남정기>에서 아들을 못 낳자 스스로 나서서 남편의 첩을 들인 사정옥이 첩의 악행에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었듯, 처첩갈등은 대개 선하기 그지없는 여성이 투기심에 눈먼 악녀에게 수난당하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여기서 투기는 여성인물의 선악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투기하는 여성은 악녀, 투기하지 않는 여성은 성녀인 것이다. 고전소설의 이러한 인물 구도는 당대의 통념이 반영된 것이었다.


“여자의 일평생 우러러 바라는 것이 오직 남편뿐이다. … 여자가 부군을 섬기는 일 가운데 투기를 아니하는 것이 으뜸가는 행실이니, 일백의 첩을 두어도 본체만체 말하지 말고, 첩을 아무리 사랑하여도 성난 기색을 나타내지 말고, 더욱 공경하여라, … 고금 천하에 투기로 망한 집이 많으니 투기를 하면 백 가지 아름다운 행실이 모두 보람 없이 되느니라.”
송시열, 『우암선생계녀서』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하며 송자(宋子)라 칭해지기도 했던 송시열(宋時烈)이 시집가는 딸을 경계하며 지은 <계녀서>(戒女書)의 일부이다. 당대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사대부 남성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필요를 위해 여성에게 불공정하고 부자유스러운 구조를 만들고선, 그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감정조차 억압하며, 투기하지 않음을 여도(女道)의 으뜸가는 행실이라 가르치는 한편 투기하는 여성의 인품과 자질을 비하하며 악녀화했다.


그런데 17세기 소설 <소현성록>은 여성의 투기를 경계하면서도 인지상정(人之常情)의 감정으로 다룬다. <소현성록>의 주인공 소현성은 화수은, 석명혜, 여씨 세 부인과 혼인하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 부인인 화수은은 남편이 두 번, 세 번 혼인할 적마다 불평한 마음을 드러낸다.


화수은의 인물됨이 소현성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던 서조모 석파는 자신의 조카 석명혜를 소현성의 두 번째 부인으로 주선하려 한다. 이에 화수은은 석파를 원망하는 마음이 골수까지 사무쳐 “흉한 할미가 능숙한 언어로 사리에 어둡고 경박한 사람을 부추기다니! 조강지처를 잊고 둘이 똑같은 마음으로 매섭게 나를 호령하면서 장차 재취할 뜻을 두니 어찌 분하지 않은가?” 혼잣말을 하며 성을 낸다.


그러나 화수은의 불평한 감정은 배려되지 않고, 도리어 투기하는 모습을 시어머니에게 들킨 탓에 책망을 받으며 남편 혼례복까지 직접 만들게 된다. 시어머니 명을 감히 거부할 수 없던 화수은은 남편의 두 번째 혼례 예복을 지으며 눈물을 쏟는다.


화수은이 어찌할 도리가 없고, 또 이파가 백방으로 위로하니 겨우 참고 취성전에서 바느질을 하였다. 눈물이 저절로 솟아나니 참지 못할 정도여서 행여 시어머님이 보실까 두려워 머리를 숙여 십분 마음을 넓게 가지려 하였다. 이 날 소현성이 들어와 문안하고 나서 화씨가 어머니를 뫼시고 앉아 예복 짓는 것을 보고 깊이 생각하되, ‘저가 무슨 투악으로 도리어 혼인 준비를 스스로 하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그 슬픈 빛을 보고 한 가닥 은정(恩情)으로 어여쁘게 여김이 있었다.
<소현성록> 권1


소현성은 자신의 예복을 짓고 있는 아내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낀다. 물론 소현성 역시 투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지만 자신의 또 다른 혼인에 아픈 그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혼삿날에는 직접 남편의 혼례 준비를 돕도록 명 받는다. 이때 역시 화수은은 슬픈 빛을 숨기지 못한다.


소월영(소현성의 누이)이 저 화씨가 자기 욕함을 그릇되었다고 여겼지만 그녀가 매우 서러워하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화씨가 비뚤어지고 속이 좁음을 괴이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쌍하게 여겨 가만히 타일러 말하였다.
“오늘 어머니께서 반드시 그대에게 아우의 옷을 섬기라 하실 것이니 만에 하나라도 불평하지 마라.”
화씨가 사례하며 소리 높여 울었다. 시어머니 양부인이 화씨를 불러 소현성의 관복을 입히라고 하시니, 명령을 듣고 나아가 관대(冠帶)를 받들어 섬겼다. 양부인이 남모르게 눈길을 보내 그 행동거지를 살피니, 화씨가 얼굴색이 흙빛이 되어 그 옷고름과 띠를 매는데 손이 떨려 쉽게 하지 못하였다. 그윽이 애달프게 여기고 있는데 관대를 섬기기를 마치고 모인 사람들에게 하직하니, 양부인이 슬퍼하며 감탄하여 눈물을 흘렸다.
<소현성록> 권1


남편의 두 번째 혼인을 돕는 아내로서의 처참한 내면이 드러난 장면이다. 화수은은 남편의 혼례복을 직접 입혀야 할 것이라는 시누이 말에 울음을 터뜨리고, 남편 앞에서 흙빛이 되어 손까지 부들부들 떤다. 시누이나 시어머니는, 불평한 감정을 좀처럼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고야 마는 며느리 모습이 마뜩지 않았지만, 한편 그 마음을 불쌍히 여기고 애달파한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같은 여성으로서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화수은은 그리 참하거나 현명한 여성이 아니다. 귀도 얇은 데다 서운한 일에는 쉽게 토라지고, 시가 식구들의 험담도 서슴없이 한다. 자신의 아들들은 오냐오냐 키우면서 다른 부인의 아이들에게는 야박하게 굴기도 한다. 한 번은 화수은과 석명혜 아이들이 모두 스승에게 혼나고 나서 그 일을 고자질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스승을 고자질한 아이들의 태도를 훈계한 석명혜와 달리 화수은은 아이들 앞에서 스승을 욕하며 해고하려 한다. 화수은은 이 사건으로 석명혜와 비교당하며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어리석다고 책망을 듣는다. 그 밖의 경솔한 행실들로 남편이나 시어머니와 갈등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그는 부정적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인간적 결함이 있고 종종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그래서 갈등을 빚고 책망을 받기도 하지만 소현성의 첫 번째 부인 자리를 유지하며 그럭저럭 잘 지낸다. 시가 식구들도 그가 자신의 감정을 거칠게 표출하며 경솔하게 행동할 때마다 꾸짖으면서도, 한편으론 일부다처하의 시집살이 어려움에 힘겨워할 때면 연민하기도 하고, 그가 저지른 잘못을 수습하도록 적극적으로 돕기도 한다. 시어머니는 꾸짖을 땐 꾸짖더라도 화수은에 대해 “성품과 도량이 날카롭고 거칠지만 사람됨이 청렴하고 뜻이 높아 양반의 행실이 있는 인물”이라 평가한다.


울고 화내고 욕하며 투기하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화수은은 작품 내에서 악녀로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 행위들이 비판받고 훈계되곤 하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화수은의 존재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다.


화수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여성의 투기가 인지상정이라는 관점은 <소현성록>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남편의 여성 편력에 가장 격렬하게 투기했던 명현공주의 행위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해가 보인다. 남편 소운성이 창기를 가까이하자 명현공주는 그 창기들을 처벌해 운성이 격노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 일로 두 사람이 격렬하게 충돌하는데, 이때 중재에 나선 한상궁은 “다만 투기는 부인의 당연한 도”이며, “공주의 어린 질투심은 예삿일이니 가히 허물치 못할 바”라면서 운성을 만류한다. 한상궁은 악녀로 그려진 명현공주의 상궁이지만 사족 출신으로 인품이 훌륭하여 운성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위와 같은 한상궁의 변론에 운성 역시 수긍하며 화를 거둔다. 일부다처의 상황에서 여성의 투기가 인지상정의 일이라는 한상궁의 발언이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소현성록>은 ‘투기하는 여성=악녀’라는 프레임에 균열을 가한다. 물론 투기하는 마음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경우 징치되는 설정이 마련되지만, 그 감정 자체는 이해되고 연민되는 것이다. 질투심을 거칠게 드러내며 문제를 일으키기는 해도 누군가를 해하는 악독한 행위는 하지 않는, 보통의 인간 화수은의 존재는, 아마도 <사씨남정기>의 성녀 사정옥이나 악녀 교채란보다, 조선 여성의 현실태에 더 가까운 것일 터이다.



*참고자료

조혜란 외 역, 『소현성록』 1-4, 소명출판, 2010

송시열, 『우암선생계녀서』, 정음사, 1986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