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딸인 나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그 당시 아빠는 일 년에 한 대씩 차를 바꿀 정도로 월급이 꽤 많았고, 엄마는 전업주부로서 나의 모든 일정을 직접 관리해주셨다. 부모님이라는 온실 안에서 아주 여리고 예쁘게 자랐다. 그대로 성인이 되었고, 여전히 세상은 따뜻한 줄 알았다. 하지만 한 철 피고 지는 봄꽃처럼 땅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 직장은 대학병원 중환자실이었다. 첫 출근부터 의식 없이 누워있던 아이가 있었다. 숨을 쉬는 것도, 먹는 것도, 소변을 보는 것도 어느 하나 자연의 흐름에 따르지 못하고 인공적인 기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2개월이 지나고 3개월이 지나도 의식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호자의 면회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병원비가 도무지 감당되지 않아 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자식이 이렇게 누워있는데 퇴근길에 잠깐 들르지도 못한단 말이야?’ 그저 아이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물수건으로 손발을 닦아주는 게 최선이 아니라는 걸 이때는 알 길이 없었다. 하루라도 더 아이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면 돈도 중요하다는 잔인한 사실을 몰랐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중환자실에서 아이를 키웠다. 처음 봤을 때보다 확연히 몸집도 커졌다. 배에 직접 연결된 관으로 식이를 넣어줬는데, 한 끼에 먹는 양이 많이 늘었고 대변도 제법 어른처럼 나왔다. 하지만 아이가 버텨주는 것만큼 병원비가 버텨주는 것 역시 중요했다. 안타깝게도 치료 장비가 하나씩 줄어들더니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아이는 작은 상자에 담겨 나갔다.
다른 아이가 입원했다. 인공호흡기 사용 기간이 길어져서 목을 뚫고 기관에 호흡을 도와주는 관을 삽입한 상태였다. 부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를 보러 왔다. 알고 보니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쪽잠을 자며 24시간 아이 곁을 지키는 중이었다. 올 때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손발을 따뜻하게 데웠다. 간호 처치에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곧바로 따지고 들곤 했다. 야간근무 중이었다. 새벽 1시쯤 벨이 울렸다. 보호가 면회를 요청할 때 누르는 벨이었다. 오늘 낮에도 두 번 정도 왔던 아빠인데 이번에는 술을 조금 마신 상태로 왔다. 정식 면회 시간도 아니고 심지어 술까지 마신 상태라서 면회 불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해당 근무시간의 책임 간호사는 안타까운 마음에 휩싸여 원칙을 어기고 잠깐만 보고 가라고 문을 열어줬다. 아빠가 아이의 손을 만지작거릴 동안 다른 간호사들은 각자 담당 환자의 머리를 감기고 손발톱을 깎아주고 있었다. 갑자기 알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응급 상황을 알리는 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아빠가 아이의 목에 연결된 관을 직접 빼서 아이의 목에 산소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병원이 발칵 뒤집혔다. 아이는 곧바로 응급 처치에 들어갔고 동시에 아빠는 과호흡 상태로 울부짖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 당시 막내 연차였던 나는 숨을 헐떡이는 아빠를 응급실로 이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응급실로 가는 내내 괴로워했다. 몸을 비틀며 아이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오랜 간병 기간에 지쳐 세상이 끝나버리길 바라는 마음과 아이를 살리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아빠의 심정을 그때는 알 길이 없었다. 의료진들의 재빠른 대처에 아이의 호흡은 다시 돌아왔지만 끝내 중환자실에서 걸어서 나가진 못했다.
그런 시간을 겪으며 나도 제법 능숙해졌다. 환자의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간호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거기에 욕심을 더하여 환자 한 명뿐 아니라 보호자와 그 가정까지도 살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 말이 얼마나 껍데기뿐인 말인지 몰랐다. 내 아이가 희귀병에 걸리고 나서야, 약물과 수술이 없어서 손을 쓸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또래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심지어 수명이 짧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과거의 내가 간호사라는 탈을 쓰고 그들을 희롱했음을 알게 됐다.
내 아이, 그것도 두 아이 모두 희귀병을 진단받은 날로써 철없이 순수하고 따뜻했던 내 인생 1막이 끝났다. 한 철 피고 지는 봄꽃처럼 내 인생도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